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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평전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일제시대
때 먼 이국땅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해방 전이나 후나 오로지 통일 전선,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남한과 북한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던 김원봉. 혁명가, 독립운동가의 최후가 대부분 쓸쓸하고 비참했듯 28년 동안 해외에서 독립운동만을 해왔던
김원봉 역시 북한에서 숙청당했고 친일파 이광수도 죽어서 가진 무덤 조차도 남기지 못했다.
김원봉의
아내 박차정은 해방되기 직전 왜놈 총에 맞아 사망했고, 밀양에 살고 있던 가족들은 6.25전쟁 중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총살당했다. 친일파,
자치론자, 외교론자 등이 민족주의자로 둔갑해 미국의 비호 아래 권력을 잡아가는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순수한 자들이 설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통일정부수립과 반이승만 노선, 월북과 북한 고위직 역임,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의 ‘과격 사상’으로 인해 온전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주에서
의열단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던 당시 김원봉은 공산당계열로부터 여러 차례 합류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산주의 세력과
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원봉은 항일투쟁을 위해서는 어떤 단체나 국가와도 연대할 수 있다는 유연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념체계만은 아나키즘 성향의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다시 읽게 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정말 명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으면서 감동도 있다. “...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전멸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봉대한다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라는 부분에선 박근혜 당선자가 잠깐 생각났고..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치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라는 부분을 지금의 정치가들 모두가 같이 읽고, 느끼고 반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김원봉뿐만 아니라 의열단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의열단을 무장단체 중 하나로 생각했었는데, 임시정부에 이어 두 번째로 활동기간이 길었을
뿐만 아니라, 단원들이 보여준 희생, 헌신은 임시정부를 능가했다. 대표적인 예로 의열단원 박재혁은 중국인 고서적상으로 위장하고 부산경찰서 찾아가
서장을 면회, 서장 면전에 폭탄을 투척했다. 서장은 사망했고 박재혁은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체포당했다.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된 박재혁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이 의열단원의 길이라는 신념 아래 고문과 심문으로 쇄약해진 몸으로 단식을 시작했고 9일 만에 순국하였다.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해 활동했던 박용만이 독립운동 진영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의열단원 이해룡에 의해 처단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또,
중국 관내에서 처음 만들어진 독립군, ‘조선의용대’가 ‘군’이 아닌 ‘부대’라는 위상을 갖게 된 것이 자국에서 외국 군대가 창군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던 중국 정부의 이해가 반영된 결과였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김원봉은 김구에게 합류할 것을 권했지만, 김구는 끝까지
거절했다. 중일전쟁 중 일본군 내의 사회주의자들이 중국인 대장의 지도하에 반전운동을 벌였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화북지역으로 이동해 중국 공산당에 합류하게 되는데, 중국공산당은 의용대원들에 우호적이면서도 김원봉은 마땅치 않아 했고 결국 그의 화북행을
차단했다. 김원봉이 화북으로 오게 되면 중국이 의용대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던 거다. 조선의용대의 진로는 중국 국민당,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대결과 이해관계에서 선택되거나 배제되었다.
해방이
되었을 때, 한독당 계열에서는 임시정부의 조직을 그대로 갖고 귀국하자는 입장을 내세웠고,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계열은 임시정권을 인민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줄곧 해외에 있었던 임정이란 기구가 국내에서 들어가 인민의 지지를 받는 혁명정권이 되지 못할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귀국하느냐의 문제를 두고서도 심하게 대립했다. 약산은 한독당 계열 인사들에게 1진으로 귀국할 기회를 양보했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해방 정국에서 김원봉과 민혁당 계열은 3개월 만에 귀국하는 김구보다 한달이나 더 늦게 귀국하게 되면서 설 자리를 더 잃어 갔다.
김원봉은
합류한지 4년 만에 임정을 탈퇴했다. 그리고 47년, 전평이 주도한 총파업에 참여했다가 장택상의 지시로 체포되어 총독부 악질 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나와 꼬박 3일을 울었다고 한다. 고문의 아픔보다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결국 김원봉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이 기정사실화되고 신변에 대한 위협이 가중되면서 월북을 결심했다. 그리고 48년 4월, 38선을 넘었다.
김원봉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마크르시즘의 모든 장점을 취한 체제를 추구했고, 월북 이후 6.25때 ‘모시기 작전’으로 납북된 인사들과
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만들어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균등에 기초한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통일전선의 상징적 존재였던
김원봉 역시 58년에 숙청되고 말았다.
김원봉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력이 남한과 북한에 각기 들어선 정부에 의해 이용되고, 소모되었다가 비참하게 버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