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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6월
평점 :
- 제 3신분은 평민 압도적 다수의 농민과 소수의 도시 상공업자 즉 부르주아와 극소수의 도시노동자로 분화되어 있었다.
- 18세기 프랑스 경제가 호황기를 맞이하면서 자본가 계급을 부유하게 만들었고 상층 부르주아지와 하층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분화를 자극하여 상층 부르주아지는 더욱 더 부유해졌다. ... 부르주아는 현실과 제도의 모순을 날카롭게 인식하였다. 마티에는 <프랑스혁명사>에서 혁명의 궁극적 원인은 번영 속에서 불거진 계급간의 불균형이라고 말한다. “혁명은 쇠퇴하는 나라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오히려 발전하고 번영하는 나라에서 일어난다. 가난은 더러 봉기를 일으키게 하나 사회를 전복시키지는 못한다. 사회 전복은 언제가 계급간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 “혁명 전의 프랑스는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의 지층의 균열 상태와 유사한 것이었다.”
- 18세기 프랑스는 대체로 호황기였는데 1775년 이래 불황에 직면했다. 이 불황기에 두가지 정책적 과오를 저질렀다. 첫째는 1778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이고, 둘째는 1786년에 영-불 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은 영국에 대한 복수심 같은 원시적 감정에 따른 것이었고, 후자는 영국 공업 제품을 수입하게 됨으로써 프랑스 공업에 타격을 주었다. 프랑스의 곡물을 수출함에 따라 곡가가 폭등하였다.
- 파리민중에 의한 강제천도의 의미는 바스티유 사건 이상으로 중요하였다. 왕과 의회는 혁명의 인질이 되고 행정, 입법부는 파리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 (91년 당시) 혈통의 특권적 지배를 무너뜨린 민중은 이제 돈의 특권적 지배를 오래 참고 견딜 생각이 없었다. 푀양파와 같은 보수적 부르주아는 헌법의 제정으로 혁명은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민중은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였다.
- 91년 헌법은 인민주권의 원리를 지나칠 정도로 널리 적용하여 입법부는 물론 사법부와 지방자치제에 이르기까지 선거제를 채택했으나, 국민을 능동시민과 수동시민으로 양보하여 능동시민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이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짓이었으며 인권 선언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었다.
- 당통파 숙청후, 혁명정부의 재건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편이었으나, 혁명정부의 독재는 대중적 기반을 잃어가고 있었다. 혁명당국과 상퀼로트의 직접적이고 우애적인 접촉이 없어지고 공포정치의 관료주의가 곳곳에 침투하여 혁명의 활력소가 메마르고, 언론의 자유와 독립이 사라져 어용신문만이 메아리 없는 함성을 높이고 이에 대하여 비판적인 많은 언론인이 사형에 처해졌다.
- 테르미도르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파가 처형당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프랑스의 민주공화주의를 100년간 후퇴시켰다. 테르미도르파의 지배하에서 뒤늦게 그 쿠데타의 성격을 깨달은 노동자들이 최고임금제 부활을 위해 봉기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프랑스 혁명은 후퇴를 거듭하다가 나폴레옹의 제정과 부르봉왕가의 복위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 산악파는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철저한 민주적 공화국의 건설을 명확히 자각하여 중요한 3대 목표를 내세웠는데, 그 3대 목표란 조국의 방위와 혁명의 수호와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이었다.(177~179) 이 목표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미치고 있는 영향...
“산악파가 정권을 담당한 시기는, 유럽의 모든 나라가 연합하여 인권의 나라 프랑스의 국토와 국민공회가 세운 공화제도를 위협한 시기였다. ... 그러나 산악파의 정권은 1년 미만에 적군을 물리쳤다. 공화국 프랑스가 유럽의 모든 인민에게 자유와 평등을 주려던 꿈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으나 제 힘으로 제 나라를 훌륭히 구출할 수는 있었다. 자코뱅파는 무엇보다도 먼저 애국자였다. 그들에게 민족자결의 권리란, 제 손으로 세운 공화국을 제 힘으로 지키는 것을 의미했다. 1870년 독일의 침략을 받고 강베타가 철저한 항전을 외치면서 프랑스 국민이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려 했을 때 그가 믿었던 것은 바로 이 자코뱅의 애국적 전통이었다. 조국 방위라는 자코뱅적 전통은 그 후에도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자코뱅파는 조국 방위의 어려운 일을 수행하면서 국내의 완강한 반혁명 세력을 타도하려고 했을 때 스스로의 원리에 거역하는 행동을 취하였다. 자유의 수립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혁명이 자유의 가면을 쓴 적의 음모에 희생당하려 했을 때, 혁명 정부는 공화주의와 자유를 구출하기 위하여 자유가 수립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시민의 자유를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자코뱅의 독재정치는 일시적, 잠정적인 것이었다. ... 자유의 억압을 정당화할 만큼 자유가 위태롭게 되었다는 것을 판단하게 하는 기준을 무엇일까? 국민공회와 자코뱅의 전통은 그 기준을 대외전쟁이라는 명백한 사실에서 찾았는데... 이처럼 자코뱅적 전통이 남긴 독재의 특성은 자유의 일시적인 억압이라는 정당성의 기준이 모호하지 않고 명확하다는 사실이다. ... 방토즈법은 대담한 토지 재분배에 의하여 아무리 비천한 국민에게도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토지를 소유하게 하려고 하였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시민이 저마다 소생산자인 사회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자코뱅의 신념이었다. ... 자코뱅의 민주주의는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제한한 독립적인 시민들의 토대 위에 자유를 수립하려는 것으로서, 원칙적으로는 평등주의적이었으나 재산의 평등 따위의 비현실주의로 달리지는 않았다. 다만 재산의 격차가 민주주의 건설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소유의 극단적인 불균형이나 무산 시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시민은 정치적으로 시민 구실을 하지 못하고, 그러한 시민이 광범히 존재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할 것은 명백하다. ... 이러한 제한적 평등주의의 이상은 자코뱅적 전통에 일관하여 흐르고 있다. 이 전통은 프랑스 사회주의에 깊이 침투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민주주의 이상에도 짙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 1792년,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 나폴레옹의 사회정책에서 특기해야 할 것은 농민과의 관계였다. 프랑스 혁명이 전형적인 시민혁명이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농민 혁명이 가장 광범하고 가장 철저히 수행되었기 때문인데, 나폴레옹은 농민 혁명의 결과를 잘 보호하였다. ... 따라서 농민은 나폴레옹을 싫어할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혁명을 통하여 새로 얻은 농토를 나폴레옹의 군사력이 안전하게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강력한 군사력이 등장하기 이전에 농민은 항상 자신의 새 토지에 대하여 불안해했는데 이제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 그만큼 농민은 나폴레옹에게 고마워했고, 또 그만큼 보수화하였다. 농민의 보수화야말로 보나파르티즘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 대륙봉쇄는 그 자체가 모순에 가득찬 억지였다. 이 억지를 지탱하는 힘은 오로지 나폴레옹의 군사적 지배력이었다. 총칼이 순리를 이기지 못함은 만고의 진리이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지배력이 이 억지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거기 그의 몰락의 궁극적 원인이 잠복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