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청목 스테디북스 9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안영신 옮김 / 청목(청목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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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담담하다. 십년 가까이 강제노동 수용소에 갇혀 지내는 수감자의 하루를 제3자적 입장에서 아주 담담한 필체로 써내려갔다. 배경이나 시대상황이 자세하게 그려지진 않았지만, 수감자들의 일상을 통해 당시가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엄혹했던 시절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곡괭이질을 하고 빵 300g으로 하루를 버티며 그나마 건더기가 좀 더 많은 스프를 차지하기위해 줄을 서야하는 위치, 자리배치 하나하나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하지만 따뜻한 국물 한입에 "지금의 슈호프는 모든 것에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기나긴 형기에 대해서도, 고달픈 하루에 대해서도, 또 다시 일요일을 쉴 수 없다는 불길한 소식에 대해서도. 지금 그의 머릿속을 사로잡고 있는 오직 한가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보자, 라는 생각뿐이다." 하고 설명될 정도로 소박하다.

슈호프의 죄목은 ''조국에 대한 반역''이다. 독소전에 투입되었다가 자진하여 독일군 포로가 되었고 독일군 첩보부대의 임무를 수행한 뒤 소련군으로 귀환했던 것이다. 이때 자진하여 포로가 된 것은, 단지 그래야만 하루라도 더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간첩 혐의로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체자르는 영화감독이었으나 촬영이 끝나기전에 사상에 문제가 있다하여 투옥됐고, 부농의 아들이라는 사유로 투옥된 자도 있었다. 

책은 이반 데니소비치(슈호프)가 기상하는 새벽 5시부터 점호를 끝내고 자리에 눕는 밤 10시까지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슈호프는 특별한 일이라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강제수용소에서 이곳이 '사회주의 단지'(아마 그곳은 훨씬 더 통제되고 모진 노동이 행해지는 곳이었나보다)가 아닌 것에, 빵 300g과 스프가 제공되는 것에, 그나마 일몰 후 노동이 멈춰지는 곳이라는 것에 자족한다.  

 "하느님, 덕분에 또 하루를 무사히 보냈습니다! 영창에 들어가지 않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여기서라면 어떻게든지 견디어낼 수 있겠습니다." 

"슈호프는 묵묵히 천장을 응시했다. 이제는 자기가 과연 자유를 바라고 있는지 없는지조차 분명치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애타게 자유를 갈망했었다. 저녁마다 앞으로 남은 형기를 손꼽아 세어보곤 했다. 그러나 얼마 후엔 그것도 지쳐서 포기했다. 그리도 또 얼마 후엔 형기가 끝나더라도 집에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유형지(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등의 변방)로 쫓겨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의 생활이 과연 여기보다 나을지 어떨지, 그것도 그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부분은 슈호프가 현재 생활에 자족할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오늘보다 못한 내일이 예정되어 있는 자에게 현재가 가지는 의미는.. 체념적이긴 하지만 간절하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하루가, 우울하고 불괘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가 지나갔다. 이런 날들이 그의 형기가 시작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만 10년을, 그러니까 3,653일이나 계속되었다. 사훌이 더 많은 것은 사이에 윤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 소설을 끝이 난다. 윤년으로 인해 사흘이 더 늘어났다는 설명은, 정말이지 뭐랄까.. 에누리 하나 없는, 조금의 여유로움도 용납되지 않는 통제된 수용소의 느낌을 전달해주는 것 같아서 숨 막히게 했다.  

실제로 작가 솔제니친은 스탈린을 비판한 글귀를 쓴 것이 문제가 되어 체포당한 뒤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8년, 추방 3년형을 언도받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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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8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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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추리소설'로 읽기에는 아까운, 아쉬운 책인 것 같다.

그치만 두껍고 어려워서 소설로 읽는 것도, 역사서로 읽는 것도 다 실패한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 갖고 강독까지 했다는데..

"각 교단 간의 이단 논쟁과 종교 재판의 와중에서, 흑백 논리의 칼질이 난무하던 중세 기독교사를 정확하게 그려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 종교관, 세계관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데 지금 이 시대에 그 시대의 경직된 교조주의와 병적인 흑백논리를 되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도 이 책만이 줄 수 있는 재미일 것이다."(개역판 <장미의 이름>에 부치는 말 중)

'웃음'이 필요한 거냐, 불필요한 거냐에 대한 논쟁이 결국 사건 발생의 원인이었다니. 그치만 난 진짜로 상권에서 헤르헤와 월리엄 수도사가 논쟁할때부터 '이거 뭔가 있겠구나'라는 생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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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0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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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은 아비뇽유수 때로 교황과 교회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종교개혁 이전까지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가장 높았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수도원운동이 본격화 되었던 10세기 무렵 부터의 상황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너무 자세해서 상권 중간 부분까지는 집중이 잘 안됐다;; 

지루해서 책을 접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폰으로 책을 검색해봤더니, 상을 많이 받은 책이기도 하고, 줄거리를 읽어보니 곧 재밌어 질 것 같기도해서, 붙잡고 읽었다. 

상권에서 3명의 수도사가 의문사했다. 하권에서 죽음의 원인이 밝혀질테지. 

아, 이 책은 서유럽 중세 역사서 같은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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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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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완전 강추!!

'제자백가'를 들어본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푹빠져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중국 철학에 관심있는.. 혹은 관심 가져서 나쁠게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강추!!

<제자백가의 귀환> 시리즈 목록
1권 철학의 시대: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2권 관중과 공자: 패자의 등장과 철학자의 탄생
3권 손자와 오자: 전쟁에서 승리하는 두 가지 방법
4권 묵자와 양주: 반전 평화사상과 아나키즘
5권 상앙과 맹자: 법치의 군주론과 자율의 수양론
6권 제나라에 모인 제자백가: 사상의 용광로 그리고 『관자』
7권 노자와 장자: 통치의 논리와 소통의 논리
8권 혜시, 공손룡 그리고 묵가의 후예들: 법, 언어, 논리에 대한 다양한 생각
9권 순자: 고대 중국의 아리스토텔레스
10권 한비자: 절대군주와 천하통일을 위한 조언
11권 진나라에 모인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마지막 불꽃 그리고 『여씨춘추』
12권 제국의 탄생 그리고 제자백가에 대한 기억

이 시리즈 중에 1권을 읽은건데, 3권부터는 출판 예정인 책들이다. 꼭 다 읽어야지. 너무, 아니 정말 재밌다! 강신주 이분 정말 훌륭한 분인가보다..ㅋ 

1권의 서문이 압권인데, 책이 곁에 없어서 옮겨 적지는 못하겠다.

갑골문이 발견된 것은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다.1899년에 베이징에 말라리아 전염병이 유행했는데, 마땅한 치료법이 없던 중에 용골이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전설상 동물인 용을 대신해 소의 어깨뼈나 거북의 껍질이 불티나게 팔렸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수집된 소뼈나 거북의 껍질에서 이상한 흠집이 발견된 것.

연구자들은 이 흠집들이 초기 청동기 시대에 새겨진 글자의 서체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골문의 내용은 국가의 중대사에서부터 군주의 개인적인 치통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고 한다.

상나라는 한번 제사를 지낼때 2556명의 목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는데 그 이유는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의 읍민들에게 복종을 강요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통계에 따르면 이들은 순장된 사람들 보다 20배나 많았다고 한다.

상나라와 가까워 약탈의 대상이 되었던 주나라는 상나라를 굴복시키고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나중에 제나라를 이루게 되는 강족은 주족과 함께 상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다. 이때 강족의 수장이 그 유명한 강태공.

주족은 강족이 자신들의 패권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들을 제나라 군주로 삼는다는 명분으로 산둥성 쪽에 옮겨 살게 했다. 그리고 주와 제 사이에 노나라와 위나라를 겹겹이 만들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경제적, 군자적, 문화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국가는 바로 제나라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마천을 필두로 중국인들은 상, 주, 진, 한으로 이어지는 주류 한족 문화를 강조하는 한편 강족의 정치, 문화적 영향력을 축소해왔다는 것.

저자는 티베트어군에 속했던 강족이 한족에 수모를 당했던 과거와 지금의 티베트-중국의 갈등을 연결시키고 있다.

주나라의 사회구성은 종법제에 의한 중층적 구조를 가지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상나라와 거의 유사했다고 한다. 상나라의 백성에 해당하는 귀족들을 주나라에서는 '人'이라 불렀고 소인에 해당하는 민중은 '民'이라 불렀다고 한다.

1부3-4 <동양적 가부장제와 그에 대한 엇갈린 반응들> 부분에서 가부장제에 대한 상앙과 장자의 해석 차를 설명하고 있는데, 인상적이었다.

둘은 똑같이 중국 역사가 국가가 없었던 모계제 사회에서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가부장제 사회로 이행했다고 보지만, 상앙은 가부장제와 국가는 남성이나 국가권력의 이익을 위해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 모계제하에서의 갈등과 대립,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출현했다고 본다. 홉스가 자연상태를 바라봤던것처럼..

반면 <장자>에는 국가를 외적으로는 전쟁을 수행하며 동시에 내적으로는 사람들을 억압한는 폭압적 기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나온단다. 상반된 논리의 두 역사철학이 동시대에 유행했다는 것은 전국시대라고해서 부국강병의 논리가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저자는 '춘추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속앓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로 주역, 춘추좌전, 시경을 꼽았다.

주역은 책 제목이 알려주는 것 처럼 주나라의 점치는 책인데, 역경과 역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경과 역전 모두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저자는 역경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그것이 상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부터 주족의 부족장이 점을 쳤던 기록을 모아서 만든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역경을 문왕이 지었다고한 사마천의 주장을 부정한 것이다.

상나라가 주로 갑골로 점을 쳤다면 주족들은 시초라고 불리는 뻣뻣한 나무 줄기 여섯 개를 이용하여 점을 쳤다고 한다. 저자는, '역경은 당시의 점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나라가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 주족의 눈으로 바라본 중국 고대사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춘추시대에 들어서면서 신의 정치가 사라지고 인간의 정치가 그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합려, 월구천이 춘추 오패이자 군주이다. 이들이 패자가 된 것은 내적으로 부국강병을 달성하면서 다른 한편 싸우지 않고도 다른 제후국들의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한편, 춘추는 춘추시대 지배층의 속내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라고 한다. 춘추시대의 정치 패러다임이 존왕양이에서 일국의 명예와 존망을 추구하는 것으로, 군주 일인지배체제에서 경, 대부와의 협력체제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고.. 변화 과정에서 제후와 사인계층의 정치적 갈등이 심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시경에는 역사의 기록에서 배제된 평민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어 주역, 춘추와는 다른가치를 지니는 텍스트라고 한다.

한자 '儒'에 대한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원래 '儒'라는 글자는 사람을 뜻하는 人, 비를 뜻하는 雨, 그리고 제단의 모양을 본뜬 '而'라는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儒'라는 말이, 비를 내리게 하는 제사를 주관했던 사람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儒'는 신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를 매개해주는 종교의식의 전문가였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주로 제사와 같은 종교적 의식에 관련 되었던 예도 이제 공자 당시에는 사회의 질서 원리라는 의미로 확장되어 등장하게 된다... 묵자와 그의 제자들은 모두 전국시대 초기부터 활동했던 사람들로 지금 유가들이 제사 의례에 기생하며 무위도식하는 세태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유학을 인문학으로 변형시키려고 했음에도 유가들 대부분이 전국시대나 혹은 지금까지 상례나 제사의식에 집중했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라 하겠다. 191"

3부 <제자백가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에서는 학파 구분과 분류에 대한 통념을 만들어낸 게 한나라 역사가이기 때문에, 반고의 한서와 사마천의 사기에 주목하고 있다.

한서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을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묵가, 종횡가, 잡가, 농가, 소설가라는 10개의 학파로 정리하고 이중 유가학파에 최고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반면 사마담은 제자백가를 음양가, 유가, 묵가, 법가, 명가, 도가 여섯개로 분류하면서 유가가 아닌 도가를 가장 완벽한 종합철학이라 평가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대부분의 사상가를 열전에서 다룬 것과는 달리 예외적으로 공자만은 세가에 포함시켰다. 저자는 한서와 사기보다 먼저 쓰여진 <회남자>가 도가 중심으로 제자백가를 이해했다는 것을 밝히고, 한제국의 지성계가 도가가 지배하던 시대에서 도가와 유가가 패권을 다투던 시대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유가가 권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던 시대로 이행했다고 설명한다.

패권이 도가에서 유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살았던 인물이 사마담이고 유가가 패권을 차지했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 사마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문제, 경제 통치기를 지나 무제에 의해 중앙집권화가 시도 되었던 때와 일치한다.

이때 공신과 제후들부터 등용되지 못했던 일부 유가들이 무제에게 붙어버린다. 만약 모든 유가들이 공자의 정치 이념에 따라 공신과 제후 등 분권세력에 붙어 있었다면 공자의 사상은 무제에 의해 부정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가급적 제자백가 모두를 고유명사에 입각해서 이해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한대에 명명되기 전까지 학파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유가와 묵가뿐이었고 이들 내부에도 여러 분파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맹자와 순자는 공자를 계승했다고 얘기하지만 두 사람의 사상적 거리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먼 것이라니까.

관중을 모르고 공자를 알 수 없다고 했다. 2권 완전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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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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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제후 고드푸르아, 보에몬드, 레몽, 보두앵, 탄크레디가 세상을 떠났다. 1차 십자군의 주역들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이슬람은 재정비에 나서게 된다.

장기에 의해 에데사가 함락되었고, 이렇게 되자 예루살렘 여왕은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에게 새로운 십자군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시토파 수도원(클뤼니수도원과 경쟁 관계에 있던) 출신의 베르나르두스는 프랑스 왕에게 원정을 요청했다. 왕은 최상위의 기사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 아래의 제후와 기사들이 함께 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이때 프랑스 왕비도 참가함으로써 2차 십자군에는 여자도 정식으로 참가하게 된다. 1차 십자군과 달리 황제나 왕이 이끄는 십자군이었기 때문에 출발 당시 누구도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한편 이때 비잔티움의 황제 마누엘은 셀주크투르크와 밀약을 맺어 휴전을 약속한 상태였다. 이 사실을 모르고 다마스쿠스로 떠난 2차십자군은 매복해 있던 투르크군에게 대패했다. 당시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들에게(특히 십자군들에게) 비잔티움 황제가 불신의 화신이었던 것은 그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큰 것 같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2차 십자군들은 누레딘의 원군 파병 소식이 들려오자 바로 철수해버렸다.

시오노 나나미는 종종 특정 상황을 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설명하곤 하는데.. 위의 상황을, '1차 원정은 다이묘와 다이묘의 대결, 2차 원정은 쇼군과 다이묘의 대결'로 묘사하고 2차 십자군을 그리스도교 세계의 두 쇼군이 이슬람측의 지방 다이묘에 퇴각당한 것이라 설명했다.

또 작가는 십자군 원정의 진정한 원인을 십자가에 서약한 신앙심에서만 찾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온갖 물자의 해상 수송과 성지 순례자를 태우고 지중해를 왕래하는 일을 했던 이탈리아 해양도시 국가들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이탈리아 해양도시 국가가 이슬람교도와 교역을 시작한 것은 아말피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순이라고 한다. 베네치아 상인이 9세기에 이미 오리엔트에 출몰했으니 나머지는 훨씬 전부터 활약하고 있었을것이란다.

한편, 누레딘에 의해 바그다드에서 다마스쿠스를 거쳐 카이로까지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누레딘보다 스무살 정도 어렸던 살라딘이 카이로 지역의 통치를 맡으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살라딘의 능력을 가볍게 여겼던 누레딘은 살라딘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자 위기 의식을 느끼지만, 결국 대세는 살라딘에게 기울게 된다. 

살라딘이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그가 예루살렘을 되찾은 뒤에 보여준 통치의 내용 때문인 것 같다.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작업을 했지만 콘탄티누스 대제가 건립한 성묘교회는 파괴하거나 모스크로 바꾸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의 순례를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십자군 역사상 가장 화려한 조합의 제3차 십자군이 유럽을 떠나 속속 중동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직전에 자기 사유재산을 털어서 그리스도교의 몸값을 지불해준 뒤 그들을 풀어주었다. 진정한 '무혈입성'이었다. 물론 그전까지 무수히 많은 피를 뿌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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