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일본과 通하다 - 우정과 배신의 오백 년 역사
손승철 지음 / 동아시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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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가 임란 이후 이뤄진 12차례의 사행에 대해 각 통신사 파견의 목적, 경과, 결과 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반해 손승철 교수의 이 책은 왜구의 출현에서부터 메이지유신으로 인해 교린체계가 막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1. 동아시아 해역의 약탈자, 왜구
2. 공존의 시대, 통신사와 국왕사
3. 경상도의 저팬 타운, 삼포
4. 임진왜란, 불구대천의 원수
5. 통신사의 부활, 돌아온 평온의 시대
6. 침략의 전주곡, 통신에서 배신으로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는 이 책의 5장에 해당하는 내용을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일본 탐방때 손승철 교수의 강연을 들었는데, 그때 책 들고가서 사인을 받았어야 하는데 그러지못한게 너무 아쉽다.
강연은 이 책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었지만 확실히 활자로 보는 것보다 생동감있고, 머리에 잘들어온다.

다음 학기, 한국사 수업에서 조선통신사 부분은 꼭 이 책을 가지고 교수님처럼 수업할거다. ㅋ ppt만들어서.

임진왜란 당시의 피해상황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상기시켜주고, 왜구가 조선인이었다거나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단순 영웅화 시키는 등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서 이시대의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도 알려줘야지.

쓰시마도주가 기록한 통신사 일행의 식단이라든가, 통신사 행렬을 지켜본 네덜란드인의 목격담 등은 아이들의 흥미를 끌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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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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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에서 벌어진 갈등의 핵심은 '기득권투쟁'과 '면죄부투쟁'이었다. 일제 36년을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과거에 대한 평가와 그 평가에 따른 이해득실의 문제를 둘러싼 혈투였다. 이데올로기는 그 과정에서 도입된 장식물의 성격이 강했다. 해방 초기 사회주의의 인기가 많았던 것도 그들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사회주의자라고 일컬어 지는 사람들이 민족, 민중들 삶의 문제에 훨씬 적극적으로 천착해왔기 때문이었다.

소련과 미국이 진주할 것이 확실해지자 일본은 하루만에 행정권 이양을 거부했다. 그래서 사실상 우리에게 해방은 16일 하루 뿐이었다.

"1946년은 단순히 1945년과 1947년의 사이가 아니다. 그것은 미군정 3년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였다."는 말은 1946년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지시켜줬다.

 

1946년에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건 역시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바로 이것이 좌우갈등을 심화시키면서 상호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남북분단으로 치닫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왜 그렇게 반탁운동에 매달렸을까?

서중석이라는 사람은, 김구가 "미국이 신탁통치 실시를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안 뒤에도 계속 반탁투쟁을 벌인 것은 중경 임시정부 추대 운동이 기본이유였다"고 말한다.


1946년 2월 우익 진영 중심으로 민주의원이 출범하였는데, 이를 임정 내부의 좌파인 민혁당계가 반대하였다. 임정 법통론을 완강하게 고집한 쪽은 김구의 한독당계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문제에 대해 신축적이었던 민혁당이 아닌 한독당측이 미군정의 자문기구에 불과한 민주의원을 포용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인 것 같다. 민주의원은 과도입법 의원이 창설될 때까지 미군정의 자문기구 역할을 했다.(여기서 3월 1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고 한다.)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하라고 종용하자 김규식은 몇번이고 거부하다가 결국 승낙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나무에 올라선 다음에는 형님이 나무를 흔들어서 나를 떨어뜨릴 것도 압니다. 또 떨어진 다음에는 나를 짓밟을 것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나의 존재와 경력의 모든 것을 희행하겠소. 내가 희생한 다음에 그 위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너무 드라마틱 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이승만의 정읍 발언 직후 김구가 보인 반응이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 라고 했다는데, 그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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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 - 400여 년 전, 조선과 일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정장식 지음 / 고즈윈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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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 한민족사' 연수를 앞두고 읽게 된 책.

부산에서 출발하여 크루즈를 타고 5박 6일 동안 진행될 예정인데, 통신사가 떠났던 것과 비슷한 여정이 될 것 같아 찾아 읽게 되었다.

 

일단 책을 통해 앍게 된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하면,

임진왜란 이후 파견된 최초의 통신사는 회답겸쇄환사(1607년)로서, 임란 직후라 믿음을 통한다는 기존의 통신사 명칭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임무는 일본이 재침해올 기미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었지만, 또 다른 주된 임무는 일본 조총을 사오는 일이었다.(조총은 일본에 1543년 포르투갈로 부터 들어와 오다노부나가의 천하통일 사업의 원동력이 되었다.)


통신사들의 사행은 반드시 대마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대마도의 다이묘들은 사신을 매우 극진하게 대접했는데, 조선의 사신들은 이것을 순수하게 막부의 선의로만 해석하였지.. 막부가 사신을 극진히 대접한 것에는 조선 사신이 장군을 알현하는 것처럼 연출하여 다이묘들에게 새롭게 출발한 도쿠가와 막부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통신사 파견의 명분은 언제나 포로 쇄환이었지만, 처음에 피로인 수는 1418명에 불과했다. 갈수록 귀국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더 감소했다. 조선은, 일본에 20여년 자리잡고 살았던 포로들에게 그동안 일구어왔던 것을 버리고 돌아갈 만큼의 가치가 없는 나라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1636년 네번째 사행부터 통신사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사신들은 막부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예물을 받았는데 거절해도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대마도쯤 와서 사람들이 보게끔 한뒤 강에 버렸다고 한다. 막부의 체면도 살리고 대마도에도 이득이 돌아가게 되어 삼자 모두 만족해했다고 한다.


1643년에도 사행이 이뤄지는데 이때는 병자호란 이후라 조선의 사신을 대하는 대마도주의 태도가 전과 달리 거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고, 패배의식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시기에 3대장군 이에미쓰에 의해 이에야스의 신격화 사업이 이뤄지는데.. 이때 막부는 천황의 권위를 규제하는 등 그 지위를 압도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통신사 일행도 닛꼬 동조궁의 이에야스묘를 참배했다. 단순한 유람도 거부했던 사행인들이 이를 수락한 것은 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 의도에 의한 것이기도 했고, 병진호란을 계기로 일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811년에 마지막 사행이 이뤄졌다. 이때는 이미 일본내에 사행의 필요성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때라, 형식적 수준의 문화교류에 그쳤다고 한다.

 

조선은 막부의 요청에 따라 마지못해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동향을 살폈다. 조선과 막부 모두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동안에도 많은 비용을 들여 사행을 지속시켰던 데에는 각자 사행을 통해 얻어고 했던 나름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일본의 군사력이나 각종 물력의 위력은 인정하면서도 문화적으로는 교화가 필요한 오랑캐라 여겼고 이를 왜란에 대한 정신적 복수라 생각했다. 반면 막부는 통신사를 '조공사' 처럼 보이게 하여 막부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대마도로서는 사신 접대를 명분으로 막부로부터 받는 경제적 지원이 간절한 입장이었다.

 

이때 우리가 좀 더 객관적으로 일본의 동향을 살폈다면, 세계 정세에 좀 더 일찍부터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행의 기록이 역관에게 맡겨졌던 몇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에 대한 무시와 적개심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임란 이후 전개된 12 차례의 사행에 대해 파견된 인물, 파견의 배경과 목적, 내용 등을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대마도의 컬러 사진이 여러장 수록되어 있고, 사행인들 모두가 대마도의 풍경에 감탄했었고 하니까,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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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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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쓸데없는 고민이었다는 걸 알게 될테지만,

지금은 날 피곤하고 짜증나게 하는 걱정거리들을 아주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끔 만들어주는 책.

 

나보다 더 날 걱정해주고, 내 문제를 자기 문제처럼 여겨서 같이 고민해주는 것보다

"신경 쓸 일 아냐, 생명엔 아무 지장도 없는데, 뭐!"라고 누군가 얘기해준다면

정말 그런가보다... 하고 짓누르는 무거운 어떤 것을 벗어던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원인만 알아내면 그 다음은 간단해. 원인을 없애버리면 되니까."

이렇게 모든 문제가 쉬워질 것 같다.

 

옮긴이의 말이 좋아서 조금 옮겨적어야 겠다.

 

"인간의 삶에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서로 경계를 알 수 없게 버무려져 있다. 그리고 사람마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정도는 다르다. 한마디로 상대적이다. 인간의 삶은 또한 겉과 속이 다르게 되어 있다. 완벽주의자는 있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듯이,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속까지 그런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 역시 상대적이다.

... 오쿠다 히데오의 이 소설들을 읽다 보면 가면 뒤에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들킨 것처럼 뜨끔한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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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
주강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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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갔다가 두세시간 정도 있을 생각으로 역사 코너에서 두껍지 않은 책을 골라 들었다. 나의 짧은 생각일줄은 알지만, 어쨌든 유홍준씨가 공중파 방송을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원래 유명하셨나;;) 그리고 최근 문화재 환수 움직임도 활발해지면서,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 같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물은 말할 것도 없고, 화인열전이라든가 국보순례 등의 책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문화사가 안 보면 하나도 모르고, 읽어서 알게 된 것 같으면 또 금방 까먹는.. 그런 특징이 있어서 많이 접하는 것이 일단 중요한 것 같다;;ㅋ 암튼 그래서 집어 들게 된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1>.  

중딩들 몇몇이 기말고사 공부하고 있는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서 읽기 시작했다.  

1권은 총 16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번째, 두번째 주제가 '성적 제의와 반란의 굿', '남근과 여근의 풍속사'다. 중딩들 틈에서 남근과 여근을 상징하는 자연석, 조각품, 토우들이 마치 그림책 처럼 크게 등장하는 책을 보고 있으려니 괜히 눈치보이고, 밝히는 사람 취급 받을 것 같아서 신경쓰였다;;ㅋ 월경서답을 장대에 걸어 놓고 재해를 막는 제의를 올렸다는 건 여성만의 성적 특징이 이런식으로도 이용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성황당', '서낭당' 구분 없이 썼던 용어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성황은 두가지 기능을 지닌다. 하나는 국가적인 성황을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민간적인 음사를 의미한다. 둘은 이름은 같고 의미는 다른다. 민간에서 음사는 두가지 이름을 지닌다. 하나는 성황이요 다른 하나는 서낭이다. 둘은 이름은 다르고 의미는 같다."는데 이게 무슨 말장난 같은 소린지..;; 기원에 있어 다르긴 하나 서낭이든 성황이든 그 이름과 관계없이 내용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데... 

서낭당의 돌무더기는 마을을 지켜주는 결정적인 무기였을 거라는 주장이 기억에 남는다. 돌을 쌓아 두는 풍습은 보편적인 민간 신앙일 뿐이라는 반론도 있다고 한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청룡사'를 저자는, '광대들의 메카'라고 했다. 장동건, 원빈, 이효리 등 연예인들에게 순례 메카로 권하고 싶다고..ㅋ  

저자는 조선후기의 유랑 예인이 현대에 계승되지 못했음을 한탄했다.19세기 이들이 사라지자 일본에서 들어온 대중 오락물이 그자리를 차지했는데, 일제시대를 풍미했던 곡마단, 신파극단, 여성가극단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새로운 집단들이다.   

그 중 남사당패는 남색사회였다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중국 패왕별희에서도 드러나듯이 경극패에게도 있었던 남성 예인집단만의 특이한 성문화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문화가 자리잡게 된 이유중 하나는 그들이 억눌린 성적 배출구가 없는 하층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영화 <왕의 남자>가 떠올랐다;

기억에 남는 또다른 주제는 '배꼽문화와 혁명, 혹은 구멍'이라는 주제이다. 옛날부터 엄마와 아기를 연결해주는 '태'를 신성시여겼었는데, 민간은 주로 태를 강에 버렸다고 한다. 저자가 어렸을 때 개울가에서 놀고 있으면 태가 떠내려와 기겁하기도 했다고 한다.  

왕실은 그것을 태항아리에 담아 태실에 보관했다. 금줄까지 쳐서 신성하게 보관했다. 안태사라는 관리를 두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일제시대때 일제는 모든 태실을 모아들여 고양시 서삼릉에 집결시켰다. 여기 저기 말뚝을 박았던 것 처럼 민족정기를 진압하려 했던 것이다.  

가슴은 드러내도 배꼽은 드러낼 수 없는 신성한 신체 부위였고, 그런 인식은 선운사 석불 비결의 위치가 배꼽이었다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실제 석불에는 배꼽이 없다는데..  그 비결이 정약용의 경세유포나 목민심서라는 설도 있다는 데 몰랐던 사실이다. 
 

■ 성적 제의와 반란의 굿
■ 남근과 여근의 풍속사
■ 금줄과 왼새끼의 비밀
■ 미륵의 손가락에 숨은 뜻은?
■ 우리 민족은 왜 흰옷을 입었을까
■ 브리지드 바르도와 황구의 비밀
■ 숫자 3의 비밀
■ 돌하르방은 어디서 왔을까
■ 솟대, 하늘로 비상하는 마을지킴이
■ 서낭당이냐 성황당이냐
■ 그 광대들은 어디로 갔을까
■ 배꼽문화와 혁명, 혹은 구멍
■ 동성동본, 혼인과 불혼의 수수께끼
■ 똥돼지의 내력을 묻는다
■ 매향의 비밀문서를 찾아라
■ 장례, 놀이와 의례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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