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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 / 나무의철학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었는데, 책 속에서 저자가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라 언급했길래 보게 되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와 있다고 생각한 26살 미국 여성이 4000km가 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도보 여행하며 경험한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극한의 고통을 견디어내며 걷고, 걷고, 걷는 일을 반복한 100여일 동안의 여정은 곧 삶을 내팽개치다시피한 자신을 용서하는 여행이자, 돌아가신 엄마를 마음으로 이해하고 놓아드리기 위한 여행이었다고 여겨진다.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의 길이가 1178km라는데.. 4285km라니. 한반도를 가장 크게 한 바퀴 돌아도 부족한 거리이다. 일어섰을 때 균형을 잡기 조차 어려울 정도의 무거운 가방('몬스터')를 짊어지고 여성 혼자 수없이 많은 강과 산을 건넜다. 발톱이 거의 다 빠졌을 정도로 고단했을 여정. 만나는 사람 없이 며칠씩 혼자 걷기를 반복하며 고독과 외로움을 견디는 과정 자체가 퓨마와 뱀, 곰을 맞닥뜨렸을 때의 공포 만큼이나 큰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책 앞 장에 적혀있던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 번을 길을 만든다." 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어쩌면 새로운 길을 내고 있는 시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몬스터라는 이름에는 내 애정이 듬뿍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두어야겠다. 나는 내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내 등에 지고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일은 내가 그 짐을 지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도저히 내가 질 수 없는 짐을 지고 가는 중이었다. 내 육체적, 물질적 삶이 감정적, 정신적 영역까지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내 복잡한 삶이 이렇게 단순해질 수 있다는 사실도 나로서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여행을 하며, 이제 더 이상 내 인생의 슬픈 일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한 걸까. 아니, 어쩌면 내 육체적 고통에만 신경을 집중하느라 감정적 상처 같은 건 저 멀리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 길에 들어서고 두 번째 주가 끝나갈 무렵, 나는 여행을 시작한 뒤로는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65)
"나는 신발에 다시 테이프를 감고 습기 찬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난밤 나는 계획을 하나 세웠다. 어디가 나오든 이 길을 계속 따라가기로. 길을 가면서 어떤 다른 그럴듯한 길이 나타나더라도 철저히 다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끝없는 미로를 헤매게 될 뿐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383)
"때때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은 내가 올라야 하는 하나의 긴 산길처럼 느껴졌다. 내 여정의 끝은 컬럼비아 강이지만 마치 어디 높은 정상에 올라야 여정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올라간다는 것은 그저 은유적인 표현만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나는 거의 언제나 엄청난 높이를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 냉혹한 현실에 매번 거의 울 뻔했고 근육과 허파는 전력을 다해야 했다. 언제나 내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야 PCT는 내리막길을 보여주곤 했다.
그렇다면 내려가는 길은 또 어떠한가. 잠깐 동안은 천국 같다!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그렇게 내려가다 보면 이번에는 그 내리막길이 엄청난 형벌처럼 느껴지고 급기야 지쳐버려서 다시 오르막길을 나오길 기도했다. 내각 생각하는 내리막길이란 오랜 시간을 들여 막 완성한 털실 스웨터의 실을 잡아 풀기 시작해 다시 원래의 털실 뭉치로 되돌리는 작업 같았다. 하지만 실제 PCT를 걷는 일은 스웨터를 짰다 풀었다 끝없이 반복하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다 잃게 되는 그런 여정이었던 것이다."(393)
"어떤 일이 일어나고 또 일어나지 않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도는 없는 법이다. 일이 어떻게 이어지고 또 일을 망치는 원인이 무엇인지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인생을 피어나게 하거나 망치게 하거나 혹은 방향을 바꿔버리게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도 우리는 잘 모른다."(536)
"나는 발톱이라곤 거의 붙어 있지 않은 부르튼 내 맨발을 바라보았다. 발목 위로는 다 떨어져서 내버린 모직양말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털 많은 종아리는 구릿빛으로 탄탄하게 근육이 잡혀 있었고 상처며 멍 자국과 함께 먼지가 뒤덮여 있었다. 나는 모하비 사막을 걷기 시작하면서 오리건 주와 워싱턴 주 경계선 위의 컬럼비아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도착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이른바 ‘신들의 다리’라고 불리는 거창한 이름의 디리였다.
나는 다리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 다리는 생각만으로도 내게 특별한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나는 그동안 걸어온 남쪽도 쳐다보았다. 나를 가르치고 깨우쳐준 거친 야생의 땅이었다. 그리고 다시 배낭을 메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방법이 하나뿐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언제나 그랬다. 그냥 계속해서 길을 걷는 것뿐." (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