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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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파울로 코엘료의 신작 <아크라 문서>를 뒤적이다 정작 그 책의 후기에 <연금술사>에 대한 언급이 더 많은 것을 보고,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보게 된 책.

 

"항상 똑같은 사람들하고만 있으면 그들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해버린다. 그렇게 되고 나면, 그들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려 든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바뀌지 않으면 불만스러워한다. 사람들에겐 인생에 대한 나름의 분명한 기준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적 자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40)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게 이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47)

 

"난 내꿈을 실현하고 나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 자네는 양이나 피라미드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고 그걸 실현하길 원하지. 그런 점에서 자넨 나와 달라. 나는 오직 메카만을 꿈으로 간직하고 싶어. 마음속으로는 벌써 수천 번 사막을 가로질러 성스러운 반석이 있는 광장에 도착하고, 율법에 따라 그 바위를 만지기 전에 광장을 일곱 바퀴 돌고 있는 나 자신을 눈앞에 그려보았지. 나는 이미 내게 일어날 일이며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일, 그리고 함께 나눌 대화와 기도까지 상상해보았다. 다만 내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크다란 절망이 두려워 그냥 꿈으로 간직하고 있기로 한 거지." (94. 크리스털 상점 주인의 말) ...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꿈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묵숨이나 농사일처럼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것들을 잃는 일이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의 삶과 세상의 역사가 다같이 신의 커다란 손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단숨에 사라지는 것이오."(130. 낙타몰이꾼)

 

"지상의 모든 인간에게는 그를 기다리는 보물이 있어. 그런데 우리들, 인간의 마음은 그 보물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아. 사람들이 보물을 더이상 찾으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만 얘기하지. 그리고는 인생이 각자의 운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들을 이끌어가도록 내버려두는 거야. 불행히도, 자기 앞에 그려진 자아의 신화와 행복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세상을 험난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아예 침묵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우리의 얘기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기를 원해. 그건 우리가 가르쳐준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지."(214. 마음이 속삭이는 소리)

 

"바로 그게 연금술의 존재 이유야. 우리 모든 자신의 보물을 찾아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게 연금술인 거지. 납은 세상이 더이상 납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납의 역할을 다 하고, 마침내는 금으로 변하는 거야. 연금술사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거야. 우리가 지금의 우리보다 더 나아지기를 갈구할 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도 함께 나아진다는 걸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지."(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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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8 : 일본 2 역사편 먼나라 이웃나라 8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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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때부터 일본사는 왠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고 이해도 잘 안 됐었는데 이 책을 읽고나니 정말 쏙쏙 들어온다. 만화책이라 간단하고 쉽게 설명해서 그런 거겠지만, 일본사도 나름 매우 흥미롭고 재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전쟁 전까지 일본은 학교에서 신화를 가르쳤다. 그런데 2차 대전 이후에는 신화교육이 금지되어 상고사부터 다루고 있다. 일본의 신화가 일본 국민을 단결시켜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까지 몰고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일 거다.

 

천상의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오누이 신인 오빠 이자나기, 여동생 이자나미로부터 신화가 시작된다. 둘이 결혼해서 바다뿐인 세상에 일본 땅을 만들었다.(지금도 일본에서는 사촌끼리 결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자나미는 여러신을 낳았는데 그 중 불의 신을 낳다가 사망했다. 혼자가 된 이자나기의 눈과 코에서 세 아이가 탄생했는데, 그 중 하나가 태양신인 '아마테라스 오오가미'이다. 이는 덴노의 조상신이자 일본 민족의 시조신이다. 아마테라스는 손자 호노니니기에게 지상에 내려가 인간세계를 통치하게 한다. 이때 호노니니기에게 옥구술, 거울, 신검을 하사했는데 이 세 가지의 보물은 지금까지도 덴노의 상징이다.

 

호노니니기는 규슈땅에 내려와 고노하나(꽃)와 언니인 이와(바위) 두 여인을 만났는데, 이 중 고노하나를 선택했다. 수명이 짧은 꽃을 택했기 때문에 호노니니기와 고노하나의 자손은 신이면서도 영원히 살지 못하고 인간처럼 죽는다는 것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 같다.

 

초대 덴노는 기원전 7세기 무렵에 즉위한 진무덴노이다.

 

한편 불교를 수용하려는 소가가문과 신토를 지키려는 모노노베가문의 싸움에서 소가가문이 승리하여 불교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조정은 다시 소가파와 덴노파로 나뉘게 되는데 소가세력이 덴노를 암살하고 최초로 여성을 덴노 자리에 앉혔다. 스이코 덴노는 조카인 쇼토쿠태자에게 정권을 맡겼고 일본 역사상 첫 섭정이 시작되었다. 이때의 정권은 소가 가문과의 연립정권으로 적극적으로 불교를 장려했고 이때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다. 쇼토쿠태자는 덴노를 중심으로 왕권을 확립하고 고조쿠(호족)를 제압했다. 또 17개조 헌법을 제정했는데 이때 와(和)를 강조했다. 和는 일본의 국시이자 국가이념이 되었다.

 

소가가문의 힘이 너무 강해지자 덴노의 아들은 대신과 공모해 소가가문을 제거했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해 '후지와라'라는 성을 하사했다. 후지와라가문은 그 후 수백년간 일본을 주무르는 세도가문이 되었다. 소가가문 제거한 직후 덴노는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했다. 호적을 파악해 토지를 분급하고(반전수수법) 이후에 다이카개신을 단행했다. 덴노 단독의 강력한 중앙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673년에 덴무 덴노가 즉위하면서 개혁에 박차를 가했고, 나라로 천도했다.

 

귀족세력이 계속 강해지자 덴노는 정부기구를 축소하고 통폐합하면서 중앙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율령체제가 더 해이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귀족들의 장원 확대가 심화되고 덴노의 힘은 약해졌다. 귀족의 힘이 덴노를 능가하면서 덴노가 어릴 때 대신 정권을 맡아 정사를 보는 셋쇼(섭정) 정치가 시작되었다. 왕이 성인이 되어도 정권을 내놓지 않고 간바쿠(관백)가 되어서 정치를 주도했는데, 이를 셋칸정치(섭관정치)라고 한다.

 

최고의 세도가문은 후지와라 가문이었다. 헤이안시대는 덴노세력과 후지와라 세력 간의 힘겨루기의 역사였다.

 

고쿠시는 덴노가 지방에 파견한 관리인데 지방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스스로 장원을 소유하고 토지 개발 사업을 벌였다. 농민들이 고쿠시의 횡포 때문에 귀족에게 땅을 바치고 보호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농민에게 토지를 기증받은 장원 주인을 영가라 했다. 점차 전국의 토지가 장원으로 개인소유화 되어 갔다. 심지어 장원의 영주들은 귀족 세력 내세워서 고쿠시의 장원 출입을 금지하고 세금도 국가에 내기를 거부했다. 이에 정부가 장원금지령을 내렸지만(902년) 효과는 없었다.

 

장원소유자들은 고쿠시에 맞서기 위해 부시(무사)계급을 양성했다. 점차 세력이 커져 결국엔 귀족세력 몰라내고 바쿠후라는 부시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가장 두드러진 바쿠후 가문은 서부의 미나모토 가문, 동부의 다이라 가문이었다. 이들은 전국의 농민반란을 진압해 중앙정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귀족에 눌려 뒷전으로 밀려나있던 덴노가 일대 반격에 나서면서 덴노와 귀족의 세력 다툼은 본격화되었다. 이때의 덴노는 '고산조'였는데 170년 만에 후지와라의 피가 섞이지 않은 덴노였다. 덴노는 후지와라 가문을 몰아내고 불법 장원을 모두 폐쇄했다. 고산조의 뒤를 이은 시라카와 덴노는 즉위하자 마자 일곱살난 아들에게 물려주고 조우고(상황)가 되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인(院)을 설치해 실질 권력을 장악했다. 이를 인세이(원정 정치)라고 한다. 이때 조우고의 신임을 얻은 신하, 후궁, 그들의 친인척 등 주변집단이 실세로 등장했고 귀족세력은 부시 집단과 손을 잡았다.

 

양대 부시귀족인 겐지(源氏) 가문과 헤이시(平氏) 가문은 서로 대립했다. 덴노와 조우고가 권력을 잡기 위해 대립하자 후지와라, 겐지, 헤이시 가문도 덴노파, 조우고파로 분열되었다. 그 결과 호겐의 난(1156년)이 벌어졌고, 덴노파가 승리했다. 곧이어 헤이지의 난(1159년)이 일어났고 덴노를 지지했던 헤이시 가문이 승리했고 미나모토 요시토모는 죽임을 당했다. 아들 요리토모와 요시쓰네는 유배를 가게 됐다. 두 사건을 통해 부시의 힘에 의해 덴노 자리가 좌우됨이 드러났다.

 

헤이시 가문이 폭력적 군사독재정권의 모습을 보이자 전국적으로 반헤이시 움직임이 고조되었다. 그 중심인물이 미나모토 요리토모였다. 요리토모는 군사를 일으켜 헤이시 가문과 5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 지방의 부시계급도 겐지편에 가담했다. 헤이시가문은 덴노를 데리고 도망갔고 미나모토 요시나카가 세이타이쇼군(정이대장군)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곧 요시쓰네에게 격파되었고 헤이시가문은 토벌되어 겐지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들은 가마쿠라에 바쿠후를 설치했다. (1192년)

 

이들은 덴노를 정치에서 완전히 격리시키고 정치권력을 박탈했다. 그럼에도 덴노를 그대로 둔 이유는 덴노는 곧 일본 역사의 시작과 함께 있었고 일본의 정통성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겐지정권은 부시 계급과 교토의 귀족 계급을 갈라놓기 위해 부시 계급을 가마쿠라 바쿠후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지방에는 슈고와 지토를 파견했다. 고쿠시는 그대로 두었는데 그 이유는 교토정부가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다 것을 과시하는 한편 실제로는 바쿠후가 전국의 토지와 세금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었다.

 

요리모토 사후 바쿠후의 내분으로 2대 쇼군과 3대 쇼군이 사망했다. 덴노는 이때 토벌명령을 내렸는데 이 사건이 조큐의 난(승구의 난)이다. 이 난은 바쿠후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겐지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호조가문이 득세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했는데 태풍으로 실패했다. 여원연합군의 침략을 막아낸 바쿠후의 위세는 더욱 강화되었고 1318년에 즉위한 고다이고 덴노는 덴토친정을 내세웠다. 호조의 장기집권으로 부시 계급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바쿠후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칸코의 대슈고였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덴노와 연합해 가마쿠라를 점령했다. 다카우지는 덴노 군대를 격파하고 1336년 교토에 입성했다. 덴노는 남쪽 요시노란 곳으로 도망갔고 다카우지는 새로운 덴노를 즉위시켰다. 두명의 덴노와 두개의 조정이 수립된 것이다. 이 시기를 남북조시대라고 한다. 끝내 북조가 승리하였는데 3개의 보물을 가진 남쪽의 덴노가 정통성 측면에서 앞섰다. 아직도 일본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남북조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가 매우 활발하다고 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교토 무로마치에 바쿠후가 수립되었다. 바쿠후는 지방 행정 담당자로서 슈고 다이묘를 파견했다. 가마쿠라 바쿠후 시대의 슈고와 차별화하기 위해 슈고 다이묘라 불렀다. 쇼군은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다이묘에게 상당한 힘과 자치권을 부여했는데 부시들은 쇼군보다는 직속상관인 다이묘와 사적인 주종관계를 맺어 쇼군의 권위를 떨어지게 만들었다. 강력한 다이묘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관계가 성립되었고 이 시기를 센코쿠 시대 즉 전국시대라고 한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명나라와 교역을 활발히 했다. 명 조정에서는 요시미쓰에게 일본국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는데 이 국서는 일본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기록으로 매도되고 있다.

 

전국시대.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농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스스로 토지와 생명을 지키기위해 조직적인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이를 고우손세이라고 한다. 농민들이 일으킨 잇키를 도잇키라고 하는데 15~16세기에만 50여 차례의 잇키가 발생했다. 

 

한편 8대 쇼군 아시카라 요시마사는 쇼군 자리를 동생에게 물려주기로 했다가 아들이 태어나자 약속을 철회했는데 이를 계기로 쇼군가에 분쟁이 일었다. 전국의 다이묘가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11년 동안이나 치열하게 싸웠다. 이를 오닌의 난이라고 하는데, 이를 계기로 교토는 폐허가 되었고 쇼군의 권위는 추락하게 됐다. 그리고 센코쿠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다이묘는 '센코쿠 다이묘'라 불리는데 이들은 독자적인 지방세력으로서 바쿠후가 임명한 슈고 다이묘와는 달리 지방에서 군림하는 존재였다. 오다 노부나가도 센코쿠 다이묘 중 한 명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포르투갈을 통해 들어온 조총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고 병농분리제를 시행해 병사들의 전투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교토에 입성해 쇼군을 폐위하고(1573년) 혼노지라는 절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아케치 미쓰히데라는 부하의 공격을 받아 싸우다가 자결했다. 적은 바로 내부에 있다는 의미로 "적은 바로 혼노지에 있다"는 말이 쓰이고 있다.

 

도요토미는 주군을 배신한 아케치 미쓰히체를 죽이고 권력을 계승했다. 오사카성을 건립하고 경쟁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을 벌여 승복을 받아냈으며 에도의 다이묘로 봉해졌다. 1590년 센코쿠 시대를 종식하고 일본을 통일했는데,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전쟁을 중단하라고 선포했다. 이 시기 전국의 토지와 수확량을 조사해 세금을 부과했고 농민의 무기 소유를 금지했다. 그리고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성립시켰다. 도요토미는 부시들에게 영지를 나눠주기 위해 조선 침략을 계획하는데, 애초 계획은 인도까지 쳐들어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도요토미가 다섯살짜리 아들 히데요리를 남기고 죽은 뒤 다이묘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이때 도쿠가와는 중립을 지켰고 도요토미 가문과는 혼인관계를 맺기까지 했다. 도쿠가와의 힘이 커지자 다이묘 세력은 도쿠가와의 동군과 이에 반대하는 서군으로 나뉘어 대립했는데 이 전투가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도쿠가와가 승리했고 에도에 바쿠후를 설치했다. 도쿠가와는 모든 경제기준을 쌀로 통일했고 병농분리와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시했다. 부시들은 상공업자들과 함꼐 도시에서 사는 관리로 변화시켰다. 또 쇼군의 허락 없이 다이묘들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그리스도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후미에'라는 것을 시행했는데 예수의 그림을 밟고 지나가도록 한 것이다. 도쿠가와 바쿠후 말기 대기근과 연이은 농민반란으로 국내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사쓰마, 조슈, 히젠, 도사번 등이 자체적으로 개혁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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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 - 세종.문종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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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역자 후기에서 세종실록의 내용과 분량이 엄청 방대해서 정리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했다고 말했는데 많은 내용을 너무 압축적으로 축약해서 그런지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세종에 대한 이야기보다 '조선 전기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던 세종시대의 인물에 대한 소개가 잘 돼 있었다. 이천, 정인지, 장영실, 정초, 최윤덕 등.

 

장영실은 관노 출신 임에도 종3품 자리에까지 올랐고, 이천은 무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자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정인지는 정초 이후 과학기술 분야의 이론적 지휘자였는데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고려사>, <세종실록>을 편찬하는데 참여했다. 세종 말년 중국 학자 예겸이 사신으로 와 정인지와 토론한 적이 있는데 '그대와 하룻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10년 동안 글 공부하는 것보다 낫다'라 할 정도로 학문의 깊이가 깊었었나보다.

 

충녕은 세자가 된지 두달만에 보위에 올랐다. 태종은 왕이 서른살 될 때까지 군사나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참여하여 돕겠다고 말했다. 병조참판으로 있던 강상인이라는 자는 군사 관련 일을 세종에서 직접 보고했다가 관노비가 되는 벌을 받았고 병조판서는 유배되기도 했다. 태종은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왕에게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을 색출해 집요하게 제거해나갔다. 왕의 장인 심온을 명에 사은사로 보냈다가 한달이나 지난 강상인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 자백을 강요하여 그의 입에서 심온이 동조하였다는 말이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결국 사은사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심온을 의주에서 기다렸다가 잡아들이고 그의 처와 자식을 관노로 만들었다. 그런데 세종은 태종이 죽고 난 뒤에도 처가 세력 제거에 앞장선 신하들을 벌주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그릇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세종때의 대마도 정벌도 태종이 직접 추진한 것이라고 한다. 이종무가 이때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하들이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려 유배되었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한편 처가세력이 모두 몰락한 뒤 숨죽여 지내던 원경왕후 민씨가 눈을 감았는데 이때 세종은 최복을 12일 동안만 입으라는 태종의 명령을 거역했고 무덤 옆에 절도 세웠다. 세종이 태종의 뜻을 거역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세종은 학문을 위한 학문, 연구를 위한 연구, 발명을 위한 발명 같은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직 현실의 필요만이 그를 자극했다."라는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세종시대의 업적들은 세종이 신분에 구애됨 없이 인재를 등용해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능력을 발휘할 환경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오늘날의 시각에서 봤을 때에도 굉장히 선진적이라 느껴질 정도의 복지정책도 실시하였다. 당시 관비들은 출산시 산후 7일간의 휴가를 받았는데 세종은 출산이 예정된 달과 출산 후 100일을 더 쉴 수 있게 해주었다. 나중에는 남편도 산후 한달간 쉬게 했다.

 

문종은 세자로 30년을 있었는데 스무살이 넘어서부터는 세종 곁에서 실무를 배우고 세종을 도왔다. 마지막 8년은 병든 세종을 대신해 정무 대부분을 직접 처리했다고 한다. 문종은 부인이 셋 있었는데 첫번째 부인 휘빈 김씨는 용모가 단정치 못해 문종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결국 폐출되었다. 두번째 부인 봉씨는 처녀집을 돌아다니며 용모로서 1차 심사를 한 결과 간택되었는데 성격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궁녀와 스캔들을 일으켜 역시 폐출되었다. 결국 권씨, 홍씨, 정씨를 후실로 들이게 됐는데, 문종은 28세 되던 해에 세번째 부인 권씨에게서 첫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권씨는 아이를 낳자마자 죽었다. 이 아이가 후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부인, 처가도 없이 열두살 나이에 보위에 오르게 되는 단종이다.

 

세종의 능은 원래 태종의 능(헌릉) 곁에 있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후손이 끊어지고 장자를 잃는 곳이라 하여 예종때 지금의 영릉(여주)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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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미원주 2015-08-12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리를 정말 잘 해주셨네요. 세종대왕의 인간적 면모와 황희정승의 잘못들도 인상 깊었어요.

자네 2015-08-18 09:33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 - 태종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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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은 세자로 책봉되었고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다. 이방원이 드디어 보위에 올랐을때 태상왕에 대한 동정 여론이 형성되자 이성계는 이를 활용해 아들에 맞설 시도를 하였다.  신덕왕후의 친척 조사의가 신덕왕후의 복수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순식간에 만여명의 무리가 규합한 것을 가지고 사전에 태상왕과의 모의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전면전 양상이 되었는데 결국 아들이 승리한다. 기세가 꺾인 태상왕은 궁으로 돌아와 살다가 1408년에 눈을 감았다. 함흥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었는데,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에 묻혀 있다. 태종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를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어 고민하다가 함흥에 묻는 대신 함흥의 흙과 억새로 덮은 봉분을 만들어주었다.

 

한편 원경왕후 민씨는 1차 왕자의 난때 꾀를 써 대궐에 있던 이방원을 불러내 거사를 종용하고, 친정에 빼돌려두었던 무기를 풀어 이방원 세력을 무장시켰다. 이방원에 보위에 오르는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즉위 후 민씨 일가를 지독하게 탄압하고 견제했다. 아홉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후궁제도를 아예 법제화한 것도 태종이었다.

 

태종은 왕으로서의 위엄과 권위, 아비로서의 너그러움과 자상함을 고루 갖춘 정말 매력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왕으로서는 굉장히 집요하고 치밀하고 결단력 있었지만 자식에겐 한없이 약하고 무딘 사람이었다. 사냥을 좋아해 신하들에게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온갖 핑계를 들어 사냥을 가고자 했던 것과 물려줄 생각도 없으면서 선위파동을 일으켜 세자와 신하들의 마음을 떠보려 했다는 것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느껴졌다. 정도전과 태종이 뜻을 같이하는 콤비였다면 바람 만난 바다위의 배처럼 굉장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양녕대군 즉 세자의 장인 김한로가 쫓겨난 어리를 거두어 살피다가 몸종으로 꾸며 아내가 딸인 세자빈을 만나러 갈때 슬쩍 들여보내 결국 분란을 일으켜 세자가 폐세자 되게끔 한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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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 - 태조.정종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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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에서 새로운 주인공, 이방원의 등장. 외모부터 범상치 않다. 저자는 작자 후기에서 이방원을 일컬어,

"정세를 읽는 눈, 어떤 사건이 몰고 올 파장에 대한 안목, 고비고비마다에서 보여준 적절한 처신, 결단력 등등에서 단연 발군이다. 오랫동안 우리 정치사의 주연으로 활약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세상은 정치 9단이라 불렀다. 김대중의 두뇌와 지식, 김영삼의 감각과 결단력, 김종필의 수완까지 두루 갖춘 인물이 태종 이방원이 아닌가 싶다. ... 정치투쟁의 달인, 정치 10단." 이라 평가했다.

 

 
 
세자 책봉에서 밀려나 단단히 뿔받은 이방원.
 
 
 
태조는 개국초 민심을 우려해 조심스럽게 처신했다고 한다. 궁궐로 즉각 이사하지 않고 출퇴근을 했고 조회도 선채로 받았다고 한다. 국초에는 나라 이름도 고려라 하고 고려의 법제를 따르는 모습을 모였다. 왕씨들은 거제도와 강화도에 나누어 살게 했다. 나중에 육지에서도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완화했는데 박위와 관련한 역모 사건에 왕씨들이 휘말려 대대적으로 숙청된다. 야사에 따르면 이때 살아남은 왕씨들은 王자가 들어가는 田, 全, 玉 등으로 성을 바꿨다고 한다.
 
이성계는 자기 편이라고 생각한 사람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두터웠던 것 같다. 천도에 반대한 정도전에게도 그러했고, 끝까지 정권에 협력하지 않은 이색 조차도 죽는 날까지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이색은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몽주의 후배이자 제자였던 길재, 원척석이 남긴 시조 두 편.
 
길재.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원천석.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株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이성계의 부인 한씨(신의왕후)는 6남(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막내는 일찍 사망) 2녀를 낳았는데 이성계가 왕이 되는 걸 보지 못하고 죽었다. 또 강씨(신덕왕후)는 2남(방번, 방석)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많았던 것 같다. 배갯머리 송사(?)로 자기 아들을 세자로 삼도록 부추긴듯 그려져 있다.
 
정도전은 '바보가 왕이 되더라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 재상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펼치고자 했는데, 그러자면 똑똑한 방원보다 강씨의 아들 방석이 왕위를 계승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한편 개국초 사병을 없애고 병권을 집중하는 조치로 인해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홍무제는 조선인들이 왜구로 위장해 명나라 섬에 들어와 해적행위를 했다며 왕자를 보내 사과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때 이방원이 명에 다녀오게 되면서 정치적 위상을 높아졌다. 홍무제는 방원을 국빈으로 대우했고 명 학자들도 방원을 조선의 세자라며 극진히 환대했다고 한다. 명과의 관계는 표전문 문제로 다시 악화되는데 이때 교정 책임자 정도전을 보내라며 다시 한번 압박한다. 명의 집요한 간섭과 요구로 인해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주장하게 된다.
 
태조의 사병 해산 조치로 이방원은 위기를 맞는다. 이런 상황에서 정도전, 남은 등이 임금의 병을 핑계로 왕자들을 대궐로 불러들인다. 방원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있던 차, 궁문에 불어 꺼져있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정도전과 남은은 결국 죽임을 당한다. 1차 왕조의 난이었다.
 
정도전은 주위에 적이 많아 사방에서 비방을 많이 받았지만 부정축재나 사리사욕을 취한다는 이유로 지탄받은 적은 한번도 없다고 한다. 그의 정치 인생을 평가하기엔 아는 바가 거의 없어서 힘들겠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좋았을리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원이 된 것도 조선말 대원군때라고 하는데, 저자가 추천한 <왕조의 설계사 정도전>, <정도전을 위한 변명> 같은 책을 좀 읽어봐야 겠다.
 
1차 왕자의 난 후 이방원은 세자 자리를 형 방과에게 넘겨준다. 방과는 서자는 많았지만 적자는 없었다는데, 만약 방과에게 적자가 있었다면 이방원이 형에게 세자자리를 양보했을까, 싶다. 적자가 업었던 덕에 방과는 잠깐이었지만 세자도, 왕도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종은 죽은 뒤 묘호를 받지 못해 오랫동안 명이 내린 시호, 공정왕이라 불렸다. 정종이란 묘호는 숙종때 가서야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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