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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 - 태조.정종실록 ㅣ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권에서 새로운 주인공, 이방원의 등장. 외모부터 범상치 않다. 저자는 작자 후기에서 이방원을 일컬어,
"정세를 읽는 눈, 어떤 사건이 몰고 올 파장에 대한 안목, 고비고비마다에서 보여준 적절한 처신, 결단력 등등에서 단연 발군이다. 오랫동안 우리 정치사의 주연으로 활약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세상은 정치 9단이라 불렀다. 김대중의 두뇌와 지식, 김영삼의 감각과 결단력, 김종필의 수완까지 두루 갖춘 인물이 태종 이방원이 아닌가 싶다. ... 정치투쟁의 달인, 정치 10단." 이라 평가했다.
세자 책봉에서 밀려나 단단히 뿔받은 이방원.
태조는 개국초 민심을 우려해 조심스럽게 처신했다고 한다. 궁궐로 즉각 이사하지 않고 출퇴근을 했고 조회도 선채로 받았다고 한다. 국초에는 나라 이름도 고려라 하고 고려의 법제를 따르는 모습을 모였다. 왕씨들은 거제도와 강화도에 나누어 살게 했다. 나중에 육지에서도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완화했는데 박위와 관련한 역모 사건에 왕씨들이 휘말려 대대적으로 숙청된다. 야사에 따르면 이때 살아남은 왕씨들은 王자가 들어가는 田, 全, 玉 등으로 성을 바꿨다고 한다.
이성계는 자기 편이라고 생각한 사람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두터웠던 것 같다. 천도에 반대한 정도전에게도 그러했고, 끝까지 정권에 협력하지 않은 이색 조차도 죽는 날까지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이색은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몽주의 후배이자 제자였던 길재, 원척석이 남긴 시조 두 편.
길재.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원천석.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株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이성계의 부인 한씨(신의왕후)는 6남(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막내는 일찍 사망) 2녀를 낳았는데 이성계가 왕이 되는 걸 보지 못하고 죽었다. 또 강씨(신덕왕후)는 2남(방번, 방석)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많았던 것 같다. 배갯머리 송사(?)로 자기 아들을 세자로 삼도록 부추긴듯 그려져 있다.
정도전은 '바보가 왕이 되더라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 재상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펼치고자 했는데, 그러자면 똑똑한 방원보다 강씨의 아들 방석이 왕위를 계승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한편 개국초 사병을 없애고 병권을 집중하는 조치로 인해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홍무제는 조선인들이 왜구로 위장해 명나라 섬에 들어와 해적행위를 했다며 왕자를 보내 사과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때 이방원이 명에 다녀오게 되면서 정치적 위상을 높아졌다. 홍무제는 방원을 국빈으로 대우했고 명 학자들도 방원을 조선의 세자라며 극진히 환대했다고 한다. 명과의 관계는 표전문 문제로 다시 악화되는데 이때 교정 책임자 정도전을 보내라며 다시 한번 압박한다. 명의 집요한 간섭과 요구로 인해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주장하게 된다.
태조의 사병 해산 조치로 이방원은 위기를 맞는다. 이런 상황에서 정도전, 남은 등이 임금의 병을 핑계로 왕자들을 대궐로 불러들인다. 방원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있던 차, 궁문에 불어 꺼져있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정도전과 남은은 결국 죽임을 당한다. 1차 왕조의 난이었다.
정도전은 주위에 적이 많아 사방에서 비방을 많이 받았지만 부정축재나 사리사욕을 취한다는 이유로 지탄받은 적은 한번도 없다고 한다. 그의 정치 인생을 평가하기엔 아는 바가 거의 없어서 힘들겠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좋았을리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원이 된 것도 조선말 대원군때라고 하는데, 저자가 추천한 <왕조의 설계사 정도전>, <정도전을 위한 변명> 같은 책을 좀 읽어봐야 겠다.
1차 왕자의 난 후 이방원은 세자 자리를 형 방과에게 넘겨준다. 방과는 서자는 많았지만 적자는 없었다는데, 만약 방과에게 적자가 있었다면 이방원이 형에게 세자자리를 양보했을까, 싶다. 적자가 업었던 덕에 방과는 잠깐이었지만 세자도, 왕도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종은 죽은 뒤 묘호를 받지 못해 오랫동안 명이 내린 시호, 공정왕이라 불렸다. 정종이란 묘호는 숙종때 가서야 주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