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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 - 태종실록 ㅣ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방원은 세자로 책봉되었고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다. 이방원이 드디어 보위에 올랐을때 태상왕에 대한 동정 여론이 형성되자 이성계는 이를 활용해 아들에 맞설 시도를 하였다. 신덕왕후의 친척 조사의가 신덕왕후의 복수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순식간에 만여명의 무리가 규합한 것을 가지고 사전에 태상왕과의 모의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전면전 양상이 되었는데 결국 아들이 승리한다. 기세가 꺾인 태상왕은 궁으로 돌아와 살다가 1408년에 눈을 감았다. 함흥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었는데,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에 묻혀 있다. 태종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를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어 고민하다가 함흥에 묻는 대신 함흥의 흙과 억새로 덮은 봉분을 만들어주었다.
한편 원경왕후 민씨는 1차 왕자의 난때 꾀를 써 대궐에 있던 이방원을 불러내 거사를 종용하고, 친정에 빼돌려두었던 무기를 풀어 이방원 세력을 무장시켰다. 이방원에 보위에 오르는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즉위 후 민씨 일가를 지독하게 탄압하고 견제했다. 아홉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후궁제도를 아예 법제화한 것도 태종이었다.
태종은 왕으로서의 위엄과 권위, 아비로서의 너그러움과 자상함을 고루 갖춘 정말 매력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왕으로서는 굉장히 집요하고 치밀하고 결단력 있었지만 자식에겐 한없이 약하고 무딘 사람이었다. 사냥을 좋아해 신하들에게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온갖 핑계를 들어 사냥을 가고자 했던 것과 물려줄 생각도 없으면서 선위파동을 일으켜 세자와 신하들의 마음을 떠보려 했다는 것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느껴졌다. 정도전과 태종이 뜻을 같이하는 콤비였다면 바람 만난 바다위의 배처럼 굉장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양녕대군 즉 세자의 장인 김한로가 쫓겨난 어리를 거두어 살피다가 몸종으로 꾸며 아내가 딸인 세자빈을 만나러 갈때 슬쩍 들여보내 결국 분란을 일으켜 세자가 폐세자 되게끔 한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