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깊은 집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5
김원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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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혼자서 읽기'에 도전. 이번엔 김원일이다. <노을>, <바람과 강>, <겨울 골짜기>, <늘 푸른 소나무> 등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왠지 어느 특정 시기의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인 것 같아서 하나씩 읽어보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방황하다가 우연히 읽게 됐는데, 정말 우연하게도 바로 직전에 읽었던 박완서의 <나목>과 시대 배경이 같았다. 그런데 느낌은 전혀 다르다.

 

두 작품 모두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박완서의 <나목>이 쓸쓸하고 어두운 느낌, 그리고 주인공의 상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반해 이 책 <마당깊은 집>은 왠지 애잔하고 애처롭지만 따뜻한 느낌,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성장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서 주인공과 엄마의 갈등관계도 공통적으로 등장하는데, <나목>에서는 끝내 화해하지 않지만, <마당깊은 집>에서는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205) 나는 일 환 한장 없이 비어 있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약전골목 쪽이 아닌, 종로통 쪽 어두운 긴 골목길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이제부터 나는 부모와 형제가 없는 고아라고 나 자신을 마음으로 매질했다. 한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대신 나 혼자 살아가야 한다고 나를 격려했다. 이제 어머니, 누나, 아우들도 영원히 찾지 않으리라. 어금이 응덩 물고 결심을 새기자 어느 사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220) 아침 밥상을 받자, 콩나물과 대파건더기 사이에 쇠고기 기름이 동동 뜨는 고깃국이 내 밥그릇 옆에만 놓여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도 그렇다, 그렇지 않다며 변덕이 죽 끓듯 했지만, 그 순간만은 내가 어머니 아들임을 마음 깊이 새겼다. 목이 메어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고, 어머니는 여전히 아무 말씀이 없었다. 나는 가출에 대한 죄갚음이라도 하듯 이틑날 아침부터 이모댁 도끼와 징을 빌려와 부지런히 장작을 패었다. 더러운 세월과 가난에 따른 분풀이라도 하듯 땀을 흘리며 열심히 도끼를 휘둘렀다.

 

주인공이자 화자의 아이스러움이 잘 드러나는 부분인 것 같다.

 

(249) 중년이 된 그런 우리 형제를 길수는 아직도 추운 겨울 밤하늘의 천사로, 아니면 쓸쓸하고도 다스운 등불이 되어 내려다보고 있을까. 그 하늘나라는 추위가 없고 굶주림이 없는 곳인지 알 수 없지만, 길수는 지금도 이 반도 땅 골골 샅샅을 사팔눈으로 살피며 얼굴 모르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아뿌지'를 부르며 찾고 있을까. 그 유현한 세계의 사정을 나는 알 수 없으므로 겨울 밤하늘의 별무리 중에 떨어져 제 혼자 숨듯 나타나듯 반짝이는, 유독 추워 보이는 별 하나를 따로 볼 때마다 나는 그 별이 마치 막내 아우이듯 어린 날의 길수를 그려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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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도둑맞은 가난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1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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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나는 그렇게 천천히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아주 상식적이고도 완만한 궤도로부터 과감히 탈선해서 지름길로 삶의 재미난 것을 재빠르게 핥으며 가야하는 것이다.

 

(96) 밤이 깊다. 밤은 텅빈, 무엇으로도 충족시킬 수 없는 텅빈 내일을 몰고 오리라. 차라리 내일이 없었음 좋겠다.

 

(170) "어울리는 사이라는 건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보다 몇배나 더 축복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해. ... 지금 나에겐 어울린다는 게 훨씬 부러워. 조화, 균형..."(옥희도의 말)

 

(304) 김장철 소스리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달프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발고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대하며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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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시간 동안의 남미 - 열정에 중독된 427일 동안의 남미 방랑기 시즌 one
박민우 지음 / 플럼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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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시간. 427일 간의 남미 여행기 1편이다. 여행 가고 싶은 곳 중 하나이지만 갈 가능성이 가장 적은 곳이기도 한 남미.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됐다. 저자는 낯선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현지인들과 직접 소통하고 그들 생활의 한 부분인 것 처럼 살다오고자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그점이 가장 존경스러웠다. 난 일단 영어공부라도 해야겠다;; 아쉬웠던 점은 사진이 좀 별로라는 거. 엄청난 풍경을 자랑하는 세계적 명소라고 쭉쭉쭉 나와있는데 그에 맞는 사진이 거의 없다. 그래도 교통비를 절약하고자 납치의 위험을 무릅쓰고 히치하이킹을 했다는 에피소드는 좀 인상적이었다. 남미를 여행하려면 목숨.. 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리 한 짝 정도는 걸어야할 것 같다;;
 
"여행 중 가장 염려스러운 질병은 바로 '기대'다. 기대와 앙탈은 도통 절제를 모른다. 기대감은 날개를 달고 우주까지 내달릴 태세였다."
 
사람을 사귀는데 있어서 가장 염려스러운 것 역시 상대방에 대한 '기대'인 것 같다. 기대는 실망이라는 동전의 다른 면이다.
 
P118. 여행은 늘 외롭고 그리운 시간이다. 혼자여서 외롭고, 가족이 그립고, 집에 두고 온 것이 아쉽다. 그런 나그네들은 이런 한줌의 대화가 간절하다. 비슷한 처지, 비슷한 외로움을 마주보며 두런두런 시간을 응시하는 순간, 이 순간이 사실 여행이 클라이맥스라고, 그때 나는 생각했다.
 
P192. 사랑은 그렇게 일렬종대로 번호를 부르는 군인처럼 일방적으로 흘러간다. 2번은 3번을 향하고, 3번은 4번을 향한다. 그리고 2번과 3번은 곁에 있어도 절대 마주보지 않는다. 서로 마주보는 일은 기적처럼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운명적 사랑이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을 평행 한두번 밖에 간직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p202. 팔렝케에 있는 피라미드 앞에서..."언젠가 다같이 죽는다는 것. 그 순간이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소수지만 반가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오는 최후의 순간이 억울하지 않으려면 지금 이순간이 극도로 행복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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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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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자의 책은 처음이다. 재밌다는 얘기, 80년 광주를 떠올리게 한다는 얘기 등을 들었던지라 기대가 많이 됐다. 화양이라고 하는 가상의 도시에서 전염병에 맞서 인간과 짐승이 벌이는 사투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언뜻 공상과학소설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차피 닥치지 않을 비현실적인 일이라 치부해버리고 읽기엔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광우병, 사스 등으로 소나 닭, 돼지 같은 짐승들이 살처분 됐던 적이 있고 올여름에는 살인진드기라는 게 출몰해 아주 살짝이지만 공포에 떨게 하기도 했다. 이런 전염병이 내 주변에서 파급된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도 소설 속 가상 도시 화양처럼 봉쇄, 고립되었다가 결국엔 사라지게 되는 걸까? 소설에서 화양 시민들은 탈출을 시도하다 군인들에 의해 학살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충분히 닥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소설의 내용이 너무나 소름끼치고 무섭게 느껴졌다.

 생명을 위협받는다고 느낄때 나는 화양에 갇히 시민이 될 수도, 그들을 봉쇄시키는 군인이 될 수도, 화양의 공중분해를 주장하는 화양밖 시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살기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존재인 것 같다. 갑자기 이 세상이 자연상태인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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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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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숙이가 적은 리뷰를 보고 읽게 됐다.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 말고도 이책을 읽고 위화라는 작가에 푹 빠졌다길래, 어떤 매력과 재미가 있는 책인지 궁금해져서 출근하자마자 도서관을 뒤져 찾아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책의 내용을 "평등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또 "오래도록 버리지 못하고 간직해온 미련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가난했고 아팠고 힘들었던 지난 날에 대한 미련. 그래서 저자는 서문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글쓰기와 독서는 기억의 문을 두드리는 일 혹은 이미 지나가버린 삶을 다시 한번 살아보려는 뜨거운 욕망과도 같은 것이다."

책은 문화대혁명을 전후한 시기, 허삼관이란 자가 우연히 피를 판 대가로 돈의 맛을 보고부터 자식을 위해, 딱한번 잠자리를 같이 한 외간 여자를 위해 피를 팔게 되고 나중엔 생존을 위해 피를 팔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는 내용이다. 살기위해 피를 팔아야한다니. 상황자체는 무지 역설적이고 참혹하나 소설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만큼 무겁지 않다.
 
허심관이 이락이, 삼락이한테 허옥란의 첫남자(하소용)의 딸들을 나중에 꼭 강간하라고 하는 부분이나, 온가족이 국수 먹으러 가면서 일락이만 쏙 빼놓고 "피를 팔아 번 돈으로 먹는 것이니 내 핏줄이 아닌 너는 데려갈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유치해서 왠지 희극적으로 느껴진다.

살기위해 자신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고 있는 형국이라니. 그렇다고 허삼관 일가족이 하나같이 게으르거나 허삼관이 피를 팔아 돈 벌어오기만을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내, 아들 셋 전부 생계전선에 뛰어들어 나름대로 제몸을 축내가며 성실히 살고 있다. 문혁을 전후한 시기 인민공사가 설립되고 대약진운동, 제강생산운동이 전개 될 때 중국 하층민들의 삶은 다 이렇게 비참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허옥란이 자신을 겨냥한 대자보 때문에 마을에서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고, 가족내에서 비판대회를 열도록 강요받는 상황은 좀 충격적이었다.

이토록 비인간적이길 강요당하는 시절이었지만, 주인공들은 인간적이고자 노력한다. 아니, 그것은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애초부터 정해져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이런 부분이다.
191.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 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놓고. 가고싶으면 가, 이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거 아니냐. 널 십일년이나 키워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 안되는 거 아니냐. 그 개 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일 원도 안 들이고 네 친아비인데 말이다.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거다. 내세에는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
하련다. 나중에는 네가 내 계부 노릇 좀 해라. 너 꼭 기다려라. 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테니."
 
일락이를 업고 가며 허삼관이 하는 말이다. 인정받고 싶은, 생색내고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을 여과없이 표출하는 허심관. 그는 결국 일락이에게 국수를 먹인다.

저주를 퍼부었던 일락의 친부, 하소용이 교통사고를 당하자 일락이를 보내며 "이게 인간의 도리다, 양심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몰인정한 세상과 그래도 양심적이고자 애쓰는 인간성의 괴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인 것 같다.
아. 무엇보다 이 소설, 나름 해피엔딩이라 좋다. 허삼관은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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