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테러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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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온 삶을 바쳐 싸웠던 가네코 후미코(일본),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잉글랜드), 마거릿 스키니더(아일랜드) 세 여성의 이야기. 

후미코는 20대 초반에 감옥에 갇혀 강제 전향에 거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에밀리는 여성 참정권 운동 끝에 경마장에서 국왕의 말 앞에 뛰어들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마거릿은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한 부활절 봉기에 병사로 참전하였다가 부상을 입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념과 가치를 위해 ‘온 삶을 바쳐 싸웠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몸을, 목숨을, 삶의 전부를 걸고 싸웠던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짓밟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지금에 와서 이들의 처절한 싸움을 자신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서 얻은 성과인냥 과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불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장 많이 도운 것은 전쟁이었다.”(273쪽) 전쟁이 아니라 여성들이 주체가 된 지속적인 운동의 결과 참정권이 확대되었다면, 이러한 운동의 성과에 대해 발언하고 평가할 권리도 여성에게 주어지지 않았을까. 

비슷한 시기 서로 다른 곳에서, 죽음을 앞당기는 한이 있더라도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던 세 사람.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발췌)
실제로 이런 낙천성은 후미코가 사는 동안 막다른 곳에서 발길을 돌리듯, 모래가 아래로 다 떨어진 모래시계를 뒤집듯 기사회생의 반전을 가져왔다. 이 낙천성의 근저에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참한 인생을 보내던 여자아이치고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었다. 대안은 있다. 왜냐하면 후미코 스스로가 바로 사회의 대안이었으니까. 13

도덕이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며, 지배 계급을 그 위치에 고정하고 유지하기 위한 ‘계급 도덕’이라는 것을 후미코는 간파했다. 후미코에게 계급이란 부자와 빈자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 지배 관계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 계급이 있었다. 49

후미코에게 사상이란 책에 쓰는 것도, 사색하는 것도, 더 나아가 굳이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삶 그 자체였다. 인간성과 사상이 분리된 ‘주의자’ 따위 후미코에게는 그저 사칭하는 자에 지나지 않았다. 94

1911년 인구조사의 밤, 청소 도구를 넣어두는 이 벽장에 에밀리와 와일딩 데이비슨이 불법적으로 숨어 있었습니다. 에밀리는 의회가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에 여성의 투표권을 요구하는 운동을 하던 용감한 서프러제트입니다. 인구조사의 밤에 이곳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에밀리는 자신의 주소를 ‘하원’이라고 등록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정치적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 영국인은 이런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해왔습니다. 101

세상은 ‘날뛰는 여자들’을 두려워했다. 특히 기득권층은 역사상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성들의 반역이 대영제국의 존속을 위협하는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경찰 당국은 서프러제트를 항상 감시했으며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최첨단 촬영 기술을 사용했다. 영국에서 망원렌즈를 사용해 감시한 최초의 테러 조직은 바로 서프러제트였다. 134

에밀리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우수한 성적을 받았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졸업 학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5년 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악마 취급을 받으면서 몸을 바쳐 싸웠지만 여성 참정권 운동은 진전되지 않았다. 그저 죄인으로 수감되어 고문이나 다름없는 강제 음식 주입을 당하고, 몸과 마음이 극한까지 고통받을 뿐이었다. 아무리 원해도, 아무리 외쳐도 여자는 언제까지나 2급 시민일 수밖에 없었다. 138

#북스타그램📚 #여자들의테러 #브래디미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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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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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전지구적 확산으로 인한 팬데믹 상황과 ‘흑수저와 금수저’, ‘벼락부자와 벼락거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불평등과 차별이 사회의 기본값인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국가인가,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한국인은 어떻게 불평등해졌는가’라는 부제를 단 책의 제목이 ‘쌀’로 시작되는 게 좀 의아하고 이상해서 책의 내용이 더 궁금해졌다. 이 책은 밀농사 문화권과 벼농사 문화권을 구분하고, 각 문화권의 생산 양식과 그에 따른 정치 체제의 차이, 국가의 역할, 불평등에 대한 인식의 차이 등에 대해 설명한다.

 

벼농사 시스템이 한반도 정주민의 정체성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고, 마을 단위의 공동노동 시스템 속에서 협력과 경쟁이라는 모순된 가치가 함께 발전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때 국가는 재난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 있어서 능력을 입증해야만 권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이어서 이야기한다.

 

벼농사 시스템이 과거제, 유교와 결합하면서 가부장 중심의 가족 문화, 출세 지향 문화가 생겨났고, 산업화 이후에는 공장 내지는 기업에 이 시스템이 고스란히 이식되었다. 저자는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 벼농사 시스템이 이식된 결과 연공제가 생겨났고, 이 공고한 연공제 시스템으로 인하여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모든 설명 논리가 결국은 ‘쌀 환원주의’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낳기도 하지만 그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쨌든 묘하게 납득이 된다. 그리고 이 책의 장점은 현상을 분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저자 나름의 대안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평등과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는 계속해서 재난 대비 구휼 국가로서의 국가 역할을 기대할 것이고, 그런 국가 속에서 우리는 재난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그것도 장담할 수 없지만) 그 외의 사회적 안전망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은 선택은 우리의 몫인 것 같다. 재난에 강하지만 보편적 복지에 취약한 국가에 살 것인가, 아니면 보편적 사회안전망이 충분하고 재난에도 강한 국가에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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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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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책 중 단연 최고다. 이렇게 훌륭한 책과 훌륭한 연구자인 저자를 알게 되어 정말 뿌듯하다. 이런 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책의 부제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에 나타나 있듯이 질병의 '원인의 원인'을 추적하는 사회 역학에 관한 것이다. 질병의 원인을 개인의 나이나 가족력, 생활습관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와 그들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찾는 것이다.

저자는 흔한 감기부터 암, 심장병, 우울증과 같은 정신 질환에 이르기까지 질병을 개인 혹은 가족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정 질병에 취약하다면, 그 이유가 혹시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어떠한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였고, 연구를 통해 질병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쌍용자동자 해고 노동자, 삼성반도체의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사례를 접하며 너무 가슴이 아프고 왠지 죄스러웠다. 또 동성애자, 이주민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그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지도 알게 됐다. 저자는 본인이 경험하고 목격한 것을 이야기하고 관련 데이터를 제시할 뿐이지만, 그게 어떤 회초리나 호통보다도 큰 깨달음을 준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지만 노동시장 프로그램에 가장 적은 돈을 투자하는 나라 중 하나이다. 심지어 박근혜 정권은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인한 해고, 노동자의 잘못으로 인한 징계 해고 이외에 '저성과자 해고'라는 규정을 추가하여 기업으로 하여금 업무 능력을 명분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도록 했다.

실업은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한다. 우리나라 보다 더 높은 실업률을 보이는 나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해고가 곧 살인인 나라는 없을 것이다. 왜 유독 우리나라만 한 사람이 직장을 잃으면 삶이 붕괴되고 가족이 해체되고, 결국 자살로 이어지는 비극이 많이 발생하는 것일까? 얼마 전에 읽었던 오연호의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에서 목격했던 덴마크의 모습이 자꾸 오버랩됐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실업자가 직장을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삶을 포기하는 이 비극을 그대로 방치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괜찮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기회를 주는 사회여야 하지 않을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지 않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다 읽고 난 지금, 왜 더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다.

'꽃이 필 것이라는,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기대없이 어떻게 나는 계속 씨앗을 뿌릴 수 있을까.' 20대에 저자가 했던 고민이라는 이 말이 지금의 나를 너무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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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 지금 가까워질 수 있다면 인생을 얻을 수 있다
러셀 로버츠 지음, 이현주 옮김, 애덤 스미스 원작 / 세계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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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러셀 로버츠, 세계사)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소개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안내하는 책이다. 중반까지는.. 애덤 스미스가 이런 책을 썼어? 하는 신기한 마음에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다. <국부론>과 '보이지 않는 손', 자유방임주의, 고전 경제학의 아버지. 이게 애덤 스미스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였고, 그래서 막연히 애덤 스미스가 철저한 개인주의자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덕감정론>에서의 애덤 스미스는 인간을 파편화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존재로서 그려내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도덤감정론>에서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할 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했다. 이때의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 존경, 관심 등을 포함한다. <도덕감정론>은 <국부론> 보다 먼저 쓰여진 책이고, <국부론>을 집필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정, 보완된.. 어떻게 보면 애덤 스미스가 더 '애정한' 책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고 나니 애덤 스미스가 왜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라고 했는지 조금 이해가 될 것 같다.

중반 이후부터는 흡입력이 좀 떨어지는 책이긴 하지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있기 전에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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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하는 어떤 원칙이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히 있다. 또 자식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자 한다. <도덕감정론>

어떤 국가는 부자인데 왜 어떤 국가는 가난한지에 대한 이유를 밝힌, 엄청나게 유명하고 훌륭한 책을 쓴 덕에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감정론>에서의 애덤 스미스는 행복을 얻기 위해 돈을 따르는 삶이 얼마나 헛된지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설득력 있게 말해준다. 19

누구나 마음속에 공정한 관찰자가 있다. 나의 행동이 옳은지 공정하게 알려주는 가상의 인물이다. 공정한 관찰자 덕분에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신성한 미덕을 실행하는 것은 이웃과 인류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인류애보다 더 큰 사랑, 더 강력한 애정 때문이다. 그것은 명예롭고 고상한 것에 대한 사랑, 존엄과 위엄에 다한 사랑, 그리고 탁월한 자신의 인격에 대한 사랑이다. <도덕감정론>

내가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혹은 실행하지 않은 나의 동기에 대해 칭찬하는 사람은 나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칭찬으로부터 어떤 만족도 얻을 수 없다. ... 그 칭찬은 우리에게 어떤 비난보다도 더 큰 굴욕감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칭찬으로 인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반성을 하게 된다. 그 칭찬처럼 되지 못한 지금의 우리 모습에 대하여. <도덕감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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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빈곤 - 땅은 누구의 것인가 e시대의 절대사상 24
헨리 조지 지음, 김윤상 외 옮김 / 살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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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조지가 살았던 19세기 중후반의 미국은 산업화와 서부 개척의 시대였다. 전신, 통신회사 그리고 철도회사가 성장하고, 땅에 대한 투기 현상이 극심해진 시기이기도 했다. 헨지 조지는 신문사의 뉴욕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극도의 사치와 비참한 빈곤이 공존하는 뉴욕의 현실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물질적으로 점점 풍요로워지는데 빈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농민과 대화를 나누던 중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이때 부의 증가와 빈곤의 증가가 함께 나타나는 이유가 머릿속에 영감처럼 번쩍였다. 인구가 늘어나면 토지 가치가 오르고, 토지가 필요한 사람은 돈을 더 내야 한다. 아는 이 이치를 깊이 생각했고, 그 생각은 그 뒤로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31쪽)

그리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진보와 빈곤>을 썼다. 그의 핵심 주장은 지주에게 보상하지 않고 지대세를 부과해 지대를 공유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토지에 대한 권리는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했다. 토지에 대한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은 개인에 따라서 사실로, 또는 견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

 

헨리조지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쑨원, 톨스토이, 아인슈타인, 헬렌 켈러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심지어 사회주의에도.

 

헨리조지는 또한 19세기 후반 침체되었던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을 부활하는 데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헨리조지 사상은 경제활동의 자유와 자본의 사유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본질적으로 융화될 수 없었다. 헨리조지가 살아 있을 때에는 전 세계에서 헨리 조지의 영향력이 칼 마르크스보다 더 컸다고 한다.

빈곤을 정당화하는 이론 중 하나가 임금기근설인데, 임금기근설은 '임금은 자본에서 나온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다양한 노동 형태 모두에서 임금은 자본이 아니라 임금이 그 대가로 지불되는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임금기근설의 전제는 오류이다. 임금기근설 자체도 오류이다. 비록 임금협상 때마다 자본이 주장하는 임금기근설이 여전히 먹히고 있는 실정이지만.

 

 

헨리조지는 지대조세제가 그 해결책이라고 얘기하는데 지대조세제의 내용은 이렇다.

대안은 사유 토지의 매수도 환수도 아니다. 매수는 정의롭지 못한 방법이고, 환수는 지나친 방법이다. 현재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대로 토지를 가지게 한다. 각자 보유하는 토지를 지금처럼 자기 땅이라고 불러도 좋다. 토지를 사고파는 것도 허용하고 유증과 상속도 할 수 있도록 한다. 속만 얻으면 껍질은 지주에게 주어도 좋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지대의 일부를 조세로 걷고 있다. 그러므로 단지 조세 방법만 약간 바꾸어 지대 전체를 조세로 징수하고 다른 조세를 면제하는 지대조세제를 실시하면 된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전근대 사회부터 지금까지 모든 농민들의 염원인 '경자유전'의 원칙이 실현되지 않을까. 토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하는 사회.

 

헨리조지는 지대조세제가 최선의 해결책이라는 근거와 그것이 가져올 긍정적 변화에 대해 다섯가지 정도 제시했는데,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부에 대한 욕심이 사라져 각종 사회범죄가 없어질 거라는 예측은 지나친 것 같다. 그렇지만 빈곤이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의지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지적은 적확한 것 같다.

문명의 차이는 개인의 차이에서가 아니라 사회조직의 차이에서 생긴다는 점, 진보는 언제나 어울림에 의해 촉발되었다가 언제나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뒷걸음질한다는 점, 지금도 현대 문명 속에 과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했던 원인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점, 정치적 민주주의만으로는 무정부 상태와 전제정치로 빠지게 된다는 점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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