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역사 - 삼국편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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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에는 등자가 8세기 경에나 보편화. 그래서 알렉산더나 유럽 기병은 등자없이 말을 탔다. 반동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 그래서 돌격해서 창으로 직접 찌르기보다는 3m정도 근접하면 말위에서 창을 적에게 집어던졌다. 길이는 보통 2m~3.5m. 3kg. 동양의 중장기병은 4~5.4m, 9kg.

* 중장갑을 하고 훈련이 잘된 보병대열은 제 아무리 중장기병대라도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 말은 장애물을 싫어하고 겁이 많은 동물이라 아무리 기수가 명령해도 무모하게 돌격하지 않는다. 카이사르의 2천 중장보병이 폼페이우스의 7천 기병대의 돌격을 가로막게 했다.

* 중장보병 밀집대형 전술은 그리스 로마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후한서>에 예족들이 보병 전술에 능하여 9m나 되는 창을 여러 사람이 들고 다닌다는 기록이 있다.

* 고국원왕. 평양성 전투. 고구려군 탈영병 하나가 백제로 넘어가 고구려 군대 숫자 허세라고, 붉은 기 사용하는 부대가 정예부대라고 알려주었음.

* 고구려 군대가 모용황과 근초고왕에게 패배한 이유. 당시 사회가 부족연맹체를 극복해가는 과정이었다고 하지만 아직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 광개토대왕 장수왕은 과거의 부족연합군이나 귀족군대의 한계를 넘어선 체계화되고 표준화된 군대를 인솔하고 대정복전에 나섰다.

* 고구려군 공격이 시작되자 개로왕은 신라에 구원병 요청. 당연히 남부 귀족들에게도 구원 요청 했겠지만 정작 구원병은 신라쪽에서 먼저 왔다.

* 무령왕때 한번은 한성 탈환에 성공. 그러나 다시 고구려에게 빼앗김.

* 한성이 백제에게 점령되자 한강 이남에 진출한 고구려군 처지가 위험. 고구려군이 물러나자 곧바로 신라군이 소백산맥을 넘어 싸우지도 않고 죽령 이북의 10개군을 차지. 신라의 공격이 사전에 백제와 합의가 된 것인지, 백제의 공격 정보를 알아차리고 신라가 단독으로 행동에 나선 것인지 분명치 않다.

* 수 양제. 형 폐위시키고 병든 아버지 살해한 뒤 즉위. 제2츼 진시황이라 불린다.

* 현무문의 변 : 궁성 북문 현무문에서 고조 둘째 이세민이 형인 태자와 동생을 살해. 정변 후 이세민은 부친 고조를 감금했다가 퇴위시키고 황제로 즉위. 인륜을 중시하는 동양사회에서 형과 동생을 죽이고 동생의 첩을 강탈하고, 부친 쫓아내는 패륜을 저지르고도 그처럼 존경받는 사람은 당태종 이외에는 없다.

* 고구려와 당, 처음에는 평화관계. 당에 고구려지도를 보내고 1만 포로를 송환하기도. 수와의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해골 무덤)도 해체.

* 성화봉송은 히틀러 정권이 개최한 베를린 올림픽때 창안한 작품. 그리스에 채취한 성화가 유럽 대륙을 달려 베를린까지 가는 동안 독일의 올림픽 기록 영화 촬영팀은 유럽 국각의 주요 도로망을 샅샅이 적어 군사령부에 바쳤다.

* 과거 안시성주가 연개소문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성에는 중앙군이나 연개소문파 군대를 파견하거나 군대를 섞어서 재편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은 안시성 수비군이 이 지역의 토착병으로 구성되었으며, 그만큼 군의 단결력과 병사와 성 주민과의 유대감이 높다는 뜻이 된다.

* 안시성 전투 당시 고구려군이 3개월 동안 버티자 당이 맞은편에 토성을 쌓아. 토성이 비에 허물어지면서 토산과 성이 연결. 위기의 순간에 고구려 군 수백명이 역습을 가해 거꾸로 토산을 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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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 개정증보판
서중석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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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자료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사서 읽었는데 역시 꽤나 유익했던 책. 대학 1학년때 '청한사'로 세미나 했던 게 계속 생각났고, 대학 때 한국현대사 만큼이라도 제대로 깊이 있게 공부할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여순사건 때부터 지리산은 빨치산의 무대가 됨. 국군은 여순사건 계기로 군내부에 있는 남조선노동당 프락치 처단하는 대규모 숙청사업 진행. 관동군 지배하의 만주군 장교로 항일세력을 '토벌'하던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하다가 육사동기생 등 동료 프락치에 관한 정보를 군 정보당국에 넘겨주어 살아남음. 여순사건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 제정. 한 연구자는 국가보안법 제정을 분단의 법제화로 평가.

 

-49년 6월. 이른바 6월 공세. 국민보도연맹 결성, 반민특위습격사건, 국회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사건.

 

-안두희는 아버지가 토지개혁으로 땅을 몰수당한 뒤에 월남하여 서북청년회 간부, 미군 방첩대인 CIC 요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두희는 사건현장에서 체포되었으나 재판 이후 정부와 군의 비호 아래 특별대우를 받으며 생활했다. 1996년 한 시민의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다.

 

-처음 휴전협정은 휴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4개월을 끌었다. 그것이 해결되자 포로문제가 18개월이나 휴전을 지연시켰다.

 

-신익희가 선거도중 사망하자 야당 단일후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조봉암보다 이승만을 선호했다. 그래서 조봉암에게 표가 가지 못하도록 신익희 추모표를 던지라는 전대미문의 희한한 투표를 권장했다. 조봉암은 2011년이 되어서야 대법원 재심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학생들의 분노는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부터 폭발했다. 일요일인 28일 민주당 유세에 가지 못하도록 학생들을 강제 등교시키자, 맨 먼저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1960년 12월 장면내각은 역사상 처음으로 네 차례에 걸쳐 면의원과 면장에서부터 서울특별시장과 도지사를 뽑는 지방자치선거를 실시했다. 그런데 지방자치가 시작될 무렵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그 이후 30년 동안 지방자치선거가 없어짐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는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다.

 

-민주당 간부들은 자유당 간부처럼 극우반공적이라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었고, 친일파도 똑같이 많았다.

 

-1960년 10.8. 서울지방법원이 3.15무정선거 주범들의 형을 감형하거나 무죄를 선고하자, 이에 격분한 4월 혁명 부상자들이 목발을 짚고 국회본회의 의장석을 점거한 후 "혁명입법"의 조속한 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임.

 

-4대 대통령 선거는 허정후보와 옥중의 송요찬 후보가 사퇴해 박후보와 윤후보의 양자대결이 되었다. 선거 결과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불과 15만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로 당선이 결정된 것이다. 박정희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많은 표를 얻었고, 윤보선을 서울 경기 지역과 충청도 강원도에서 많은 표를 얻어 표의 남북현상을 보여주었다. 대체로 해방 직후 좌익세가 강했던 지역에서 박정희의 표가 많이 나왔다.

 

-한국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타이, 필리핀, 대만, 스페인이 베트남에 보낸 총병력의 약 세배인 5만 여명을 파견했다. 미국을 제외하고 베트남에 가장 많은 군대를 보내. 5000여 명이 전사.

 

-1971년 대통령 선거. 김영삼 40대 기수론. YS(43), DJ(45), 이철승(48) 세사람은 한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당내 자유 경선. 2차에서 DJ가 역전승. YS가 패배 인정.

 

-1973 김대중 납치.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일. 반유신투쟁에 불을 지핌.

 

-국제법학자협회에서는 인혁당 관련자들이 사형 확정 선고를 받은 1975년 4월 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 일곱명이 사형선고(인혁당 재건위 사건).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도 사형과 무기, 20년형을 무더기로 선고받았다.

 

-박동선 로비사건 : 주한 미군 감축 막기 위해 재미실업가 박동선이 현금으로 미의원 70여명을 매수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미국 현지 신문에 크게 보도됨으로써 촉발. 이를 계기로 한미관계가 크게 악화.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 여당이 야당에 뒤져.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99%의 지지를 받고 당선. 미국, 일본, 대만 등 축하사절 보내지 않은 쓸쓸한 취임식.

 

-박정희 정권이 중화확 공업의 과잉중복투자로 몰락을 자초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심한 불황속에 1979년 8월 YH 여자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사건이 있었고 10월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수출증가와 관련해서 잊어서는 안될 것이 양적 증가 수치가 가지는 문제점이다. 1950년대에는 미국의 군사지원위주의 원조경제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수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수출액이 매우 적었다. 이때문에 1960년대에는 약간만 수출을 해도 증가율이 매우 높게 나왔다.

 

-심각한 농촌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1971년부터 새마을 운동이 펼쳐졌다. 새마을운동은 남아도는 시멘트 생산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북과의 경쟁관계에서도 필요했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직후 가수 조영남은 시민회관(세종문화회관 전신)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고산타령'을 '신고산이 와르르르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로 불렀다가 체포되어 도피하다 결국 군대에 끌려갔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국민교육헌장 암송에 이어 박정권은 일제 말기의 전시 총동원 체제기에 성행했던 여러가지 국가주의 의례도 부활시켰다. 모든 국민은 거리를 걸어가다가도 오후 6시가 되면 반드시 부동자세로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해야 했고, 극장에서는 영화 시작 전에 기립해서 애국가를 불러야했다.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2525표 가운데 2524표를 얻어 박정희, 최규하에 이어 세번째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다. 위컴 주한 미군사령관은 전두환을 공공연히 지지했다.

 

-김대중은 사면 복권 이주일만에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번복했고, 김영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 담판도 결렬되었다. 이와 맞물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네명이 모두 출마하면 반드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다는 4자 필승론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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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1 - 해방과 혼란 인천 상륙 작전 1
윤태호 글.그림 / 한겨레출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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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선생님과 같이 읽기로 한 <독재자의 노래>를 사서 광장서적에 갔다. 저녁에 딱히 할일이 없어서 서점에서 책을 산뒤 근처 카페에서 읽다 집에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아쉽게도 서점에 책이 없었다. 카페에는 가야겠고, 해서 이 책을 사게 됐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시리즈를 읽고 난뒤 역사만화물이 가진 매력에 푹 빠졌던터라ㅋ
 
이 책, 조선왕조실록 이상으로, 100°C 만큼이나 재밌다. 앞으로 나올 시리즈가 정말 많이 기대된다.

페이지는 적지 않았지만 발췌한 몇부분.

"가만...그러고 보면 해방을 상상이나 했었는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무와 바위가 마땅하듯 일본인의 존재도 마땅했다. 가지 말아야 할 곳과 살지 말아야 할 곳과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이 자연스레 체득됐다. 그것이 사라진 지금 남은 것은 혼돈과 광기, 그리고 불확실성이다. 누구나 내일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내일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해방을 기뻐하기에 해방은 너무 짧았다. ... 모두가 시대를 말하고 인민을 말하고 새
세상을 말하지만 나는 그속에 속하지 않은 듯했다. ... 모두가 비겁했던 사회보다 모두가 정의로워진 사회가 훨씬 두렵다. ... 욕망하는 모두가 두려웠다."

"가족이 전부 일본놈 덕보고 살다니! 이게 뭔 꼴인고"하며 철구의 종아리를 때리던 엄마가 마지막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삼촌봐요. 얼마나 매사에 열심인지! ... 돈 되는 일이면 체면이고 뭐고 일단 하는 거 아뇨. 친일했네 뭐했네, 해방되고 며칠 개잡듯 잡다가 이젠 죄다 한통으로 섞이지 않아요?"

해방 이틀만에 일본이 행정권 이양을 거부하고 점령군 행세하며 주둔한 미군이 대화 상대로서 한국인보다는 일본인을 우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정신적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엄마의 의식의 흐름이 바뀌어 가는 모습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해방 훨씬 전부터 어떤 '주의자'가 아니었다면 누구나 처세의 달인이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나는 친일이고 자시고 없소이다. 나는
생존당이요.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신념이란 게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 단지 선택되어진, 언제든 쉽게 갈아입을 수 있는 외출복 같은 것이었을 거다. 그래서 우린 신념이라는 말을, 스스로 어떤 주의자라는 말을 가벼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 말에 생존에 대한 절실함이 빠진 상태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에 영화 변호인에서 처럼, 어떤 주의자라는 이유로, 실체도 없는 사상을 이유로 수도 없이 많이 사람의 인생을 짓밟아 온 한국의 현대사는 얼마나 불우하고 참담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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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2 -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역사 ⓔ 2
EBS 역사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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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e 1권을 정말 재밌게 읽었던 기억 때문에 2권도 사서 읽게 되었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전 재산을 탕진한 노름꾼 행세를 했고 죽는 순간까지 밝히기를 거부했던 김용환의 일대기를 다룬 '파락호의 비밀'. 역사채널 영상으로 먼저 접했던 이야기인데, 글로 접했을 때의 감동 역시 덜하지 않았다. 잊혀진 자들의 역사 '6264'는 서대문형무소 한 켠 방 한가득 붙어있던 낯선 애국지사들의 얼굴을 떠오르게 했다.
 
'귀신폭탄'에서는 1380년의 진포해전이 화포가 장비된 전함에서 함포 공격이 이뤄진 세계 최초의 전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양에서 이런 전투가 등장한 것은 200여 년이 지난 1570년의 레판토해전 때였다.
 
다산 정약용이 헤르만헤세, 루소, 드뷔시와 함께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기념인물이라는 사실 역시 새롭게 알게 됐다.
 
다른 영상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조선은 없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다운 받아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미국 내부에서 조차 역사상 최악의 위선적 재판이라 일컬어진다는 도쿄 전범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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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5 - 단종.세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5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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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실록은 본래 <노산군일기>라는 이름으로 편찬되었다. 편찬 경위, 편찬 일시, 편찬자 이름 등은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숙종때 복권되면서 <단종실록>으로 개칭되었는데 제목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단종은 노산군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기술되어 있다. 게다가 수양대군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이 많이 강조되어 있어서 진실에 접근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문종 사후 조정은 친수양파, 친안평파가 형성되어 대립하였다. 대신들은 안평의 편에 섰다. 한편 단종과 가장 가까웠던 종친은 금성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은 고명사은사를 자처하고, 단종의 혼인을 적극 청하는 등의 행동을 통해 왕위에 오르려고 한다는 주위의 의심을 불식시키고자 했다. 이징옥이 북방의 무기를 한양으로 빼돌렸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수양파는 안평이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록에는 안평과 김종서 등이 역모를 꾀했다는 신뢰할만한 증거가 제대로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수양 측은 역모의 전모를 밝혀내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다만 관련자들을 그자리에서 모두 죽여버렸다. 아비와 열여섯 살 이상의 아들도 죽임을 당했고 15세 이하의 아들은 관노로, 처, 첩, 딸은 원수격인 공신들의 노비가 되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은 명나라 사진들을 대접하는 연회 자리에서 수양대군과 한명회 등을 제거하려고 계획했다가 수양 측이 별운검을 두지 않기로 함에 따라 주춤해진 사이 이탈자가 발생하여 단종 복위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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