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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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아버지의 땅>에 이어 내가 읽은 임철우의 세번째 소설이다.

박완선의 <나목>이나 <그 많던 싱어는 누가 다 먹었을까> 같은 자전적 이야기이다. 배경도 비슷하다. 한국 전쟁 직후.

 

몇대목 옮겨 적어 본다.

오목이 누나의 말처럼 은매 누나의 죽음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우리는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기도 하리라. 나무들이 아픈 생채기에 새순을 틔워내고 가지에 무성한 이파리를 열심히 피워내듯이. 그러나 나무는 저 홀로 그 생채기를 기억하는 법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나무는 제 깊은 속살에 그 생채기의 흔적만은 어쩔 수 없이 나이테의 어두운 옹이 하나로 남몰래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 또한 그런 것인지도 몰라. 끝도 시작도 가능할 수 없는 영겁의 시간, 그 하염없는 초라한 그림자를 흐르는 물 위에 드리우다가 이윽고는 하나 둘 사라져가곤 할 뿐..... 그렇지만 어찌하랴. 저 끝없는 물의 흐림이 영영 우리들의 흔적조차 기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내일은 또 다른 낯선 나무들의 그림자가 새겨질 뿐이더라도,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다만 여기 우두커니 늘어서 있을 수밖에. 저 하염없는 시간의 수면 위에 저마다의 쓸쓸한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더러는 구부러지고 혹은 휘어진 채로 말이다.

저자 임철우 자신이 마치 옹이 투성이의 한 그루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저자에게 과거란, 향수나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후회이고 아픔이고 눈물이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마 살지 못했거나, 죽을 때까지 원양어선을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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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반양장) -전16권
박경리 지음 / 솔출판사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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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토지>를 다 읽었다.

 

처음 읽기를 시도했다가 절반 정도까지 읽고 중단,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마음 먹는데 2년 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결과적으로 <토지>를 다 읽는 데 3년이라는 시간이 걸림 셈이다. 읽는 것도 쉽지 않은데 쓰는 일이야 오죽했을까. 읽으면서 내내 했던 생각. 소설 <토지>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이 세상 어떤 소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이다. 문학을 시, 소설, 희곡, 수필 등으로 분류한다고 했을 때 <토지>는 그 중 소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토지>인 것이다. 그것만으로 범접할 수 없는 독보적인 무엇, 자체로서 그냥 <토지>. 

 

<토지>가 다루는 시대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19세기 후반부터 해방까지이다. 해방 이후의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고, 일본 천황의 항복 소식을 알리는 것으로 끝을 맽는다. 허탈하고 허무한 결말이다. 시간과 공간이 날줄과 씨줄로 엮이며 번지고 퍼진 이야기가 너무나 방대했기 때문에 해방과 동시에 끝나버린 결말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저자에 대한 원망이 아니다. 수습되지 못하고 이곳 저곳에 흐트러뜨려진 수많은 인물들의 안부가 궁금해서이다.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서 혹은 일본의 징병제, 징용제에 희생되어 타지로 흩어진 석이, 홍이, 주갑이, 윤국이 이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들이 마치 내 지인인 것처럼 아직도 만주 허허벌판에, 중국 여기저기, 일본 여기저기 낯선 땅을 떠돌고 있지 않을까 걱정되고 미안하고 애달프다. 소설은 말해주지 않지만, 그들의 미래가 어떠했을 거라는 걸 추측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사가 그래왔다. 역사는 힘 없고 가난한 자들을 보듬어 가며 발전했다기 보다는 힘 없고 가난한 자들이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며, 때로 그들끼리 아웅다웅 하다가도 결국은 그들끼리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며 발전해 왔다. 역사가 보듬지 못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 그들이 바로 <토지>의 주인공들이었다.

 

<토지> 같은 작품이 또 나올 수 있을까. 감사하다. 해방 이후부터의 현대사를 다시 어루만져줄 제2의 박경리를 기다려본다.

 

16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조병수와 소지감이 주고 받는 대화이다.

"밤낮으로 정상을 다하여 장롱 하나를 만들어놓고 나면 배가 고프다 했지요? 그 배고픔은 위장에서 오는 것이 아닌 마음에서 오는 배고픔이라 했소."

"그런 말 한 것 같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것도 쟁이받이의 얘긴데, 큰일을 하나 끝내고 나면 설움이 왈칵 솓는다 하더이다. 왜 그럴까요?"

"글쎄올시다. ... 인연이 끊어지니까 그런 것 아닐까 싶은데... 떠나야 하니까요."

"무슨 인연?"

"물(物)과의 인연 말입니다."

"물과의 인연!"

"그렇소. 정성을 다할 때 그것은 하나의 인연이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박경리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배고픔이었을까, 설움이었을까. 24년 동안 자신의 손에서 태어난 <토지>와 맺은 인연을 끊어졌을 때의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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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4 - 5부 2권
박경리 / 솔출판사 / 199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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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떠난다는 것은 새로움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의 자신이 마치 번데기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폐쇄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문을 열고 나서는, 그것은 신선한 해방감이다. 그러나 새로움이란 낯설음이며 여행은 빈 들판에 홀로 남은 겨울새같이 외로운 것, 어쩌면 새로움은 또 하나의 자기 폐쇄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마주치는 사물과 자신은 전혀 무관한 타인으로서 철저한 또 하나의 소외는 아닐는지.

제국주의 일본의 동물적 탐욕은 그 얼마나 많은 조선 백성들의 운명을 바꾸어왔는가. 두메산골, 골짝골짝마다 핏줄같이 시내 흐르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 이 그 얼마인가.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지게 된 사람들은 해방 이후 다 어떻게 되었을까. 타국 산천을 떠돌다 어느곳엔가 정착해 그곳에 뿌리를 내렸을까 아니면 여전히 떠돌고 있을까. 죽어서 또는 살아서도 결국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스러져간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12권은 조금 지루했는데, 13권부터 본격적으로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3대, 4대에 걸친 대하드라마가 어떻게 막을 내리게 될지 정말 궁금하다. <태백산맥>과는 다른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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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3 - 5부 1권
박경리 / 솔출판사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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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수가 간도 땅에서 죽었다. 부자의 연이 끊어질듯 말듯 어긋나기만 했던 아들 영광과의 재회를 앞두고 허망하게 죽었다.

일본 경찰에 끌려가 매를 맞다 죽은 것도 아니고, 친일파에게 습격을 당해 죽은 것도 아니고, 호열자(콜레라)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백정 송관수에게는 어울리는 죽음일지 모르나 형평운동에 앞장서고 친일, 부역자 처단에 앞장섰던 송관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허망한 죽음이다.

 

십여년 만에 다시 만난 유인실과 오가다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이들의 최후는 결국 비극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달빛 아래, 수평선이 아득한 바다, 오가다는 자신의 앞날을 수평선이 아득한 바다같이 느껴졌다.

"네, 그래요. 전쟁이 끝나고 인실씨를 만날 수 있다면, 두 사람이 살아남았다면 그 사람과 내 아들을 끌고 나는 북국으로 갈 겁니다. 빙하를 건너서요."

믿을 수 없는 꿈을 꾸듯 말하고서 오가다는 소리내어 웃었다.

애초 믿을 수 없는 꿈이었듯 결코 이뤄질 수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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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1 - 4부 2권
박경리 / 솔출판사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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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이 출옥했고, 관수와 연학, 길상은 군자금 마련을 위해 김두만과 이도영의 집을 습격했다.

 

저자가 인실과 오가다, 조찬하의 입을 통해 자신이 시국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것들을 발언하게 하는 부분들이 많은데, 어려운 얘기들이 많아서 읽기가 좀 힘들었다. 박경리 선생의 자료 수집력, 분석력, 통찰력 같은 것들이 기적처럼 느껴져 감탄하며 읽었다.

 

11권의 주인공은 명희, 그리고 관수였다. 관수의 최후가 예상되어 마음이 뭉클했다.

 

관수가 이 지점까지 온 것은 우연도 작심에서도 아니다. 동학당으로 죽음을 당한 장돌뱅이였던 아비, 김훈장을 따라 산에 들어간 사이 행방을 모르게 된 어미, 그리고 은신처에서 만나 부부로 맺어진 백정의 딸인 아내, 그 응어리가 여기까지 오게 했으며 또 앞으로 가야 할 길에는 아들 영광의 한이 짙게 서릴 것이다. 네 사람 중에 가장 많은 설움과 고통을 넘어온 송관수, 해서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다. 딸을 남겨두고 아들의 행방은 모른 채 떠나야 할 자신, 그는 마음속으로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강수는 너무나 잘 안다.

별안간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내린다. 다홍치마 유록저고리를 입은 딸 영선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간다온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칠흑 같은 밤길을 걷고 있는 자기 자신이 괘씸하기 짝이 없다.

'애비 노릇도 제대로 못한 주제에 서운하기는 와 이리 서운하노.'

관수는 걷다 말고 강변 둑에 주질러앉는다.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빨갛게 타는 담뱃불, 담뱃불이 빨갛다는 것을 처음 발견이라도 한 듯 눈앞에 담뱃개비를 세우며 쳐다본다. 바람이 불 때는 불꽃이 튄다. 한 모금 가슴 깊이 빨아당겨 연기를 뿜는다.

글이지만 왠지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관수의 눈물, 처진 어깨, 담배를 쥔 투박한 손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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