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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난 무라카미 류를 참 이상한 순서로 읽고 있다. 맨처음을 <오디션>으로 시작했으니 첫인상이 좋을리가 없었고, (집 책장에 69와 코인로커 베이비즈가 꽂혀있음에도 그것들은 안 읽고) 재즈 음악을 소재로 한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을 두번째로 읽은 후 '앞으로 무라카미 류를 읽으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자' 라고 결심했었다. 그게 벌써 여러해 전 얘기다.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을 읽으면서 난 무라카미 류가 스노브 snob 중에 스노브란 인상을 받았었다. 알고보면 나도 '한 스노브' 하면서 왜 그렇게 불쾌감을 느꼈던지. '아주 배가 불렀군 불렀어. 느끼해서 미치겠다' 가 당시 내 독후 소감이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난 후, 무라카미 류의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를 읽게 되었다. (류를 읽지말자던 결심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흐리멍텅해진 바람에) 그런데, 아무래도 몇해 사이에 내가 좀 변한 모양이다. 이번엔 어쩐지 무라카미 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는 그가 슬슬 좋아지기까지 한다.
이건 도대체 무슨 변화인가. 나라는 인간, 타인의 취향에 대해 너그러워진 것인가, 아니면 방탕하고 소비적인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동경만 커진 것인가. ^^
감각의 최대치를 경험하고자 하는 인물이 있다. 하물며 그는 작가다. 그 경험에 드는 비용의 크기를 갖고 왈가왈부한다는 것, 혹은 상대한 여성숫자에 대해 불평불만을 토로한다는 건..... 어쩐지, 아니 상당히, 옹졸하다는 생각이 든다. 푸아그라가 주는 감각의 희열을 못 느껴봤다는 게 원통할 수는 있으나, 내 주머니에 푸아그라 만찬을 사먹을 돈이 없다는 사실에만 원통해한다는 것... 이것 역시 창피한 일이다.
과시하고 흉내내는 치들이 스노브라면, 무라카미 류는 분명 스노브가 아니다. 그가 끊임없이 자신의 감각기관과 인생 자체를 실험한 덕분에 나는 내가 결코 겪어보지 못할 감각들을 경험했다. 맹숭맹숭 착하기만 한 내 인생이 한없이 시시하게 느껴지는 그런 순간도 경험하고, 흑흑. (난 인간성은 하나도 안 착하면서, 어찌된게 라이프스타일만 착해.)
책장에서 고 있을 <69>와 <코인로커>를 꺼내서 읽어봐야 겠다. 거기엔 내가 모르는 또 무슨 세계가 숨어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