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구판절판


그래서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 닥친 불행에 대해 고통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낀다. 아이의 입원 기간이 길어지자 아내는 어느밤 울면서 내게 말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부끄러워. 사람들 보기가. 살면서 이렇게 부끄러운 적은 없었어. 내 엄마 노릇도. 내 팔자도. 사람들이 돌아서서 내 인생에 형편없는 점수를 매기는 거 같아. 아이를 병들게 한 여자. 팔자 센 여자. 그렇게 말이야.

그러므로 긴 고통의 이면에는 부끄럽다는 느낌이 포함된다. 지상의 삶에 무능한 인간이라는.-156쪽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불안하게 흔들리는 심전도 모니터를 지켜보며, 가망없이 꺼져가는 불에 풀무질을 하듯 점점 많은 분량의 아드레날린을 링거 선에 퍼부어대던 그날 밤, 카데터를 뽑아버린 순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삶은 스스로 완벽하다는 것을. 어떤 흐트러진 무늬일지라도 한 사람의 생이 그려낸 것은 저리게 아름답다는 것을, 살아있다는 것은 제 스스로 빛을 내는 경이로움이라는 것을.

---<성스러운 봄> 중에서.-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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