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게 한걸음 -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서유미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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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이 넘으면서부터 생일이나 밸런타인데이 같은 기념일에 흥미나 기대를 갖지 않게 되었다. 계속되는 실망감이 기대를 없앤 건지, 나이가 들면서 어차피 그날이 다 그날임을 깨닫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바라는 건 특별한 날 싸우지나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8쪽

삼십대는 뭐랄까. 별로 열고 싶지 않은 문이 저 혼자 열린 느낌이다. 궁금한 것도 없고 할 수만 있다면 그 문을 도로 닫고 싶은 심정이다. 삶의 무게를 혼자 짊어져야 하고 시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이십대에는 더이상 자란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스스로 성숙하다고 느끼지만 삼십대에는 좀더 성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22쪽

나는 하루빨리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누가 나를 남쪽나라로 데려가지 않겠는가. 랭보처럼 신문에 광고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89쪽

삼십대가 되니 나도 어쩔 수 없이 갈 수 있는 길과 갈 수 없는 길을 나누게 된다. 하고 싶은 것은 이상하게도 갈 수 없는 길에서 반짝이는 기분이다. -91쪽

그렇게 오래 운 건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실컷 울고 나니 비록 눈은 퉁퉁 부었지만 지저분한 서랍은 깨끗하게 비었고 마음은 모처럼 바싹 마른 수건처럼 보송보송해졌다. 역시 울 수 있다는 건 다행이다. -241쪽

죽음 앞에 치통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런데도 타인의 죽음은 개인의 치통을 뛰어넘지 못하는 법이다. 이제 그걸 순순히 인정하는 나이가 되었다.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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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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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한 생활-연습이 지루할 때면 각 소리의 표정을 그려 봤다. 레는 곁눈질하는 느낌이고, 솔은 까치발 선 인상을 줬다. 미는 시치미를 잘 떼고, 파는 솔보다 낮지만 쾌활할 것 같았다. 나는 다섯 음에 적응해 갔다.-12쪽

침이 고인다-그녀는 '그러니까'와 '그렇지만' 사이의 깊은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선잠에 빠져든다. 물론 직장에 택시를 타고 갈 생각은 없다. 그녀는 자신이 아침마다 일어나는 데 필요한 것 중 하나가 결심이 아닌 '주저'라는 걸 알고 있다. -47쪽

침이 고인다-아울러 '그만둘까'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월급날은 번번이 용서를 비는 애인처럼 돌아왔다. -50쪽

칼자국-어머니의 몸뚱이에선, 계절의 끝자락, 가판에서 조용히 썩어가는 과일의 달콤하고 졸린 냄새가 났다.-178쪽

네모난 자리들-그러니까, 지하철은 턴테이블 같아요. 땅속에서 온종일 빙글빙글 돌며, 고독과 신산함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227쪽

작가의 말-어서 전했으면 좋았을 말을 이제 전한다. 아껴서-부르지 못한 이름들에게 인사를. 그리고 내게 위안받았다고 말해 준 독자, 이름 모를 당신. 책 뒤에 붙는 이 한 바닥을 빌려 말하니 나도, 진심으로 당신에게 위안받았다.

마침내 시시해지는 내 마음이 참 좋다.-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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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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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에 이는 바람은 모국어 'ㅜ' 모음의 바람이다. 그 바람은 'ㅜ' 모음의 울림처럼, 사람 몸과 마음의 깊은 안쪽을 깨우고 또 재운다.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 속에 온 것 같다. -김훈,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60쪽

숲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흐르고 쌓여서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소멸과 신생의 순환으로서 새롭고 싱싱하다. 숲의 시간은 언제나 갓 태어난 풋것의 시간이다. -김훈,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66쪽

된장국은 뜨거울 때 호호 불어가며 떠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가 있다. 젖을 뗀 후부터 줄곧 먹어 온 어머니의 된장국 맛은 이제 내 체질과 성격을 만들었다. -문순태,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95쪽

"이놈아, 에미한테서 나는 냄새는 에미가 자식 놈들을 위해서 알탕갈탕 살아온, 길고도 쓰디쓴 세월의 냄샌겨." -문순태,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99쪽

그것은 어머니가 살아온 신산한 세월이 발효하면서 풍겨져 나온 짙은 사람의 향기였다. 고통스러웠던 긴 세월의 더께 같은 것. 어머니의 냄새는 팔십 평생 동안 푹 곰삭은 삶의 냄새이며, 희로애락의 기나긴 시간에 의해 분해되는 유기체의 냄새가 분명했다. 나는 갑자기 어머니의 냄새가 내 몸의 모든 핏줄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문순태,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106쪽

당신에 대한 내 사랑도 부드러웠지만, 슬픈 거였어요. 당신이 날 사랑할 동안, 나는 낯선 별에 불시착해 있는 거였어요. 당신은 낯선 행성이었는걸요. -구효서, 밤이 지나다-130쪽

남자는 아내 곁으로 다가가 아내의 손을 쥐었다. 냉장고에서 깡통 음료수를 꺼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성란, 그림자 아이-237쪽

아내가 두통 발작으로 시트를 차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때도, 나는 아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훈, 화장-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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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거짓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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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불만을 사거나 비난을 받기 싫어하는 성격은 자신의 성적표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오랜 우등생 전력에서 비롯된 신경증일 뿐 상대를 위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축복 없는 봄-45쪽

명선에게는 때때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방치돼 버리는 위태로운 순간이 있었다. -세 개의 대문에 관한 꿈-114쪽

영우가 자신의 도움 없이 제 힘으로 살아갈 날이 오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소원은 그러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대신 영우는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영우가 자기 인생에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이었다. 자신을 함부로 방치하는 것이 자기 인생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바람의 신탁-143쪽

네이폴의 소설 <흉내>에서 자기 고향에 가도 영원히 방문자일 수밖에 없는 '뿌리뽑힌 이방인' 싱은 독백한다. '우리는 진짜인 척하고, 배우는 척하고, 인생에 대한 준비를 하는 척했으나, 사실은 새로운 세계의 한모퉁에 사는 흉내내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바람의 신탁-178쪽

인간은 강인함으로 인해 위대해지지만 약점을 통하지 않고는 완성되지 않는다. 위인이란 존재는 철인경기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종으로서의 긍지를 주어 인간을 고양시킨다. 반면 약점투성이인 사람은 때로 인간을 안심시키며 자신과 화해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바람의 신탁-191쪽

품위 없는 사회는 인간을 치사하고 비굴하게 만들었으며 그곳에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소수의 싸움꾼과 매사에 막무가내인 갓난아기들 정도였다. -바람의 신탁-207쪽

내 사주에는 '외로울 고'와 역마살이 있다. 타인을 향해 달려가지만 가까스로 합해진 다음에는 떠날 궁리를 하고, 혼자가 되면 또다시 타인을 갈망하는 자. 무엇을 갖기 위해 애쓰고 가진 뒤부터는 거기로부터 떠나기 위해 애쓰고 또 그 다음에는 돌아오기 위해 애쓰는 자. -작가의 말-316쪽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쉬 지나가는 것을 사랑하라고 여행자는 가르쳐 준다. 여행자는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기에. 그리고 모든 것은 이별이기에-생명이라는 것을. -김화영, <시간의 파도록 지은 성>-316쪽

사십을 넘긴 지가 언제인데 이제야 비로소 유치한 장식이 잔뜩 달린 채로 빛이 바랜, 청춘이라는 무거운 외출복을 벗어 놓는 느낌이 든다. 이제는 늙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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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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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이 말은 빠스떼르나끄가 했고 <문장백과 대사전>에 따르면 그 이전에 A. S. 그리보예도프가 했다. 언젠가 늦은 밤 우리는 서대문에서 아현까지 가로수의 수를 세기 위해 차를 몰고 거리로 나갔다. 그날은 비가 왔다. 검게 젖은 포도 위로 불빛들이 흘러다녔다. 일생일대의 느린 운전. 다 세고 나자 그가 물었다. 몇 시야? 내가 대답했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아. -서문-6쪽

절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빠져나가려는 희망도 모색할 수 있는 강선배는 나와 달리 늘 활기가 있었다.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15쪽

인연을 끊겠다는 사람일수록 마음 깊이에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다.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집착의 대상을 찾는 것이 인간이 견뎌야 할 고독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17쪽

사랑의 첫단계에서는 자기보다 상대를 우선하려는 긴장이 이기심을 유보해 준다.
....
내게 고통스러운 것은 오늘 했던 수술이 아니라 내일도 지속될 사랑이며, 만약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술잔을 앞에 놓고 호들갑의 여분인 감상을 즐길 것이 아니라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려야 한다. 영원히.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19쪽

다들 사는 게 그래. 꿈도 사라지고 떠나 온 길은 멀고, 다 그런 거지.
-멍-66쪽

그는 반드시 그렇게 돌아올 것이다. 늘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는가. 너와 함께 늙어가는 것은 거룩한 희망이라고. -멍-90쪽

"당신은 조상에게 하듯이 때때로 자기의 스무 살을 제사 지내는 거예요." -여름은 길지 않다-219쪽

밤 시간을 보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집에서 거리를 내다보며 보내는 방법과 거리에서 집을 향해 가며 보내는 방법. 죽어 있는 것의 평화와 썩어 가는 것의 생명력. -인 마이 라이프-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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