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2002/04/03 01:22

우선 님에게 또 하나의 해명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님에게 개인 메일까지 보냈지요.
끌리오에 리플을 달았다가는 그야말로 감당못할 사태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의 리플이 님을 자책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님이 저라는 인간을 몰라서이기 때문입니다.
소리님에게 문의해보면 수업 시간에 얼마나 많은 욕설이 저의 입에서 튀어나가는지 알겁니다. 오늘도 한 건 했으니까요.
그러나 소리님은 말해줄 것입니다.
저는 "냄비형"이라서 소리지르면 그 때 뿐입니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닙니다.

제가 냄비형으로 님의 리플에 화가났을 때는
님께서 저를 "오리엔탈리스트"로 몰아부쳤을 때였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그런 시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정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님이 지적하였듯이 제가 서양의 시각에 서기 때문이라서 그런지, 아님 제가 서양과 지속적으로 비교를 해서 그런지..
문제는 문제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일은 참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그러나 그러다가 그것이 한낱 매스터베이션에 그칠 우려가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고유한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그리 좋은 태도가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고유 가치로부터 보편적 가치를 끌어내는 것이다.
네.. 그런 식으로 저는 보편성과 독자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답니다.

포스트모던 역사학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만일 님의 생각처럼, "우리에겐 모던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고 정리하고 끝장낸다면, 그래도 된다면, 참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우리의 고통이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 해결은 결코 단계적으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산업화가 직물업-> 철강 -> 철도-> 전기와 화학의 순서대로 진행되었다고 해서, 그 뒤를 따르는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이 결코 그 순서를 지켜야 된다는 법이 없는 것과 동일합니다.
프랑스처럼 사치수공업-> 전기와 화학->중공업으로 갈수도 있고,
독일처럼 철도/중공업->전기와 화학 산업으로 점프를 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단계적으로 모던주의, 그 이후의 포스트로 나아가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모두를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가 때로는 정면으로 대립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자칫 게으른 타협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이런 답변을 한다면 반야님께서는 도대체 머리가 혼란스럽고,
연이어서 저에게 정답을 달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정답이 없답니다.
단지 스스로 고민하라는 말밖에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학문의 기본 자세라는 것,
정답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민하는 것 그 자체,
도대체 혼돈에 쌓여있는 것 그 자체,
바로 그것이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대학에서 정답을 원하는 바보처럼 황당한 인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 주변에는 정답을 요구하고, 정답을 제시하고, 정답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누가 올바르게 지적하였지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러나 똑같이 타당한 것은, "아는 만큼 모른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천재가 아닌 저같은 범재에게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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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2/04/13 14:09

너에게 묻는다

안 도 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먼 불빛

안 도 현

들녘 끝으로 불빛들이 >
일렬횡대로 줄지어 서 있는 만경평야 >
이 세상 개울물을 잠방잠방 맨처음 건너는 >
아이들 같구나 >
너희도 저녁밥 먹으러 가느냐 >
날 추운데 쉬운 일이 아니다 결코 >
저 스스로 몸에다 불을 켠다는 것 >
그리하여 남에게 먼 불빛이 된다는 것은 >
나는 오늘 하루 밥값을 했는가 >
못했는가 생각할수록 어두워지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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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2/04/20 11:16

어린 왕자는 장미꽃들을 다시 보려고 길을 나섰다.

"아직 너희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도 나를 길들이지 않았으니까.

너희들은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여우 같구나. 그 여우는 수많은 여우들과 다를 것이 없는 한 마리의 여우에 지나지 않았단다. 하지만 내가 그를 친구로 삼았고 이제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지."

그러자 장미꽃들은 매우 당황스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 너희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속이 비어 있어."

물론 평범하게 지나는 사람들은 나의 장미꽃과 너희들과는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 꽃 한 송이는 너희 수많은 장미꽃들보다도 더 중요하지. 왜냐하면 내가 그 꽃에 물을 주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유리상자를 씌워 주었고 바람막이로 가려 주었고 그 꽃을 위해서 벌레도 잡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꽃이 투덜대거나 자랑하거나 심지어 때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에도 내가 귀기울여 주었으니까. 그리고 그 꽃은 바로 내 꽃이니까."

그리고 어린 왕자는 다시 여우를 만나기 위해 돌아갔다.

" 그리고 이제는 내 비밀을 말해줄께. 아주 간단한 거야. 그것은 마음으로 보아야만 올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네가 너의 꽃을 위해 보낸 그 시간 때문에 너는 그 꽃이 그토록 소중한 거란다."

"하지만 너는 이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돼. 너는 영원토록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너의 장미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나는 내 장미꽃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어린 왕자는 확실히 기억해 두기 위해 이 말도 되풀이해서 중얼거렸다.

===================================================================
제가 초등학교때 이 구절이 좀 짧게 되어서 교과서에 나와 있었어요
그때는 선생님이 정말 이 부분이 좋은 부분이라고 했었지만.. 전 이해하질 못했죠

그러다가 어느날 십 여년이 지난 후 길에 가다가 깜찍한 어린왕자의 삽화와 함께 이 구절이 있는 카드를 발견하게 되었죠.. 어느 구석진 문방구 안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뭔가가 탁..오는 걸 느꼈죠..

주변을 보면..저를 포함해서.. 물질적인 것에서 상처받는 부분보다는 정신적인 공허함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전 한동안 그 정신적 공허함, 형태가 묘연한 힘듦의 상태..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일까 하고..참 고민했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니는 "배부르고 등따시니깐 그런소리 한다"고 하기도 하죠.. 한 3일 굶으면 그런 생각할 여가가 없은낀데..라는 핀찬을 받기도 하지만..

전 이 구절을 본 순간 그런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적 공허함이라는 것이 가만 있어도 뭔가 채워줄 것이 나에게 왔으면 하는 헛된 바램들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구요.. 자꾸 받기만을 원하고 그것만을 기다리다 보면..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내가 바라는 정신적 만족을 채워줄 어떤 것(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죠)이 오는 것은 확률상으로도 거의 불가능하니깐.. 그 괴리감에서 오는 힘듦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 구조가 그런 허무감을 자꾸 조성하고 있으니깐 말이죠
현실과 환상의 세계의 차이를 체감할때 정신적 스트레스는 증가한다.
굳이 예를 안들어도 아시겠죠? 미디어의 영향이 크기도 합니다.

결국..이러한 현실에서 그 정신적 공허함..허탈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안이 필요할까..에 대한 고민.. 속세를 떠나 스님이 되거나 수도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적절한 대응이 될 수 없을테니깐 말입니다.

어린왕자처럼 자신에게 맞는 어떤 대상(공부일수도 있고 사람일수도 있겠죠..)에게 정성을 다해 주는 것..즉..주는 것을 통해서 그 공허함을 채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준다는 것은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베푼다는 것입니다. 거만한 베풂이 아니라..정말 진심에서..주고 싶어서..정성을 다한다..
받음으로서 공허함을 채우기보단.. 주면서 기쁨을 느낄 때 사람은 인생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점이죠.

누군가가 그러기를... 자식이 꼭 있어야 하는 이유는 대를 잊기 위함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은 애정을 줄 대상이 있어야 살 힘을 얻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주는 대상이 있어야 사람은 삶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죠. 전 그 말을 아직 잘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 분이 자신이 직접 느끼신것을 말하니깐.. 참 와닫더라구요..

사람이 행복을 찾는 비결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하구요..
대가없이 줄..대상을 찾는 것.
그 대상은 사람마다 가지각색이겠죠.

또 제가 아는 어떤 선생님은 그럽디다.. 공부할 때..이 공부한 선량한 지식들을 학생들에게 다 주어서 걔네들 인생을 확 바꿔놓을 감동을 주고 말테다..라는 자세로 공부한다구요..
그러다 보면 안되던 공부도 그리 집중이 잘된다고 하더군요..

전 그런 경지까지는 아직 오르지 못했습니다만..글쩍..
하지만 전 확신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그런 대상 하나만 찾더라도 삶 전체가 풍요로워 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종교일수도 있고 학문일 수도 있고 사회일 수도..노동자일수도.. 아님 어린이..일수도..

함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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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24 13:10

"당신은 누구세요?" 어린 왕자가 물었다.
"나는 여우란다" 여우가 대답했다.
"이리 와서 나하고 놀아요."어린 왕자가 제안했다.
"난 너무나 슬퍼요."
"나는 너와 놀 수가 없단다. 난 길들여 지지 않았거든." 여우가 대답했다.
"길들여 진다는 것이 무슨 뜻이죠?(What does that mean..'tame'?)
"너는 여기에 살지 않는구나. 넌 무엇을 찾고 있니?" 여우가 말했다.
"난 사람들을 찾고 있어요.
"사람들은 총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냥을 하지. 그건 참으로 불온한 것이지. 그들은 또
닭을 기른단다. 이런 것들이 그들의 유일한 흥미거리지. 너도 닭을 찾고 있니?
"아니에요." "난 친구들을 찾고 있어요. 길들여진다는 것이 무슨 뜻이죠?

"그건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쉬운 일이지.(It is a act too often neglected) 그것은 관계
를 맺는다는 뜻이야.(It means to extablisth ties)" 여우가 대답했다.
"관계를 맺는다구요?" "바로 그거야." 여우가 말했다. "넌 나에게 수많은 어린아이와 조
금도 다를 바가 없단다.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아. 그리고 네 입장에서도 내가 필요하지 않는 거지. 너에게 있어서도 나는 수많은 다른 여우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네가 나를 길들이게 된다면 그 때는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지. 나에게 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고 너에게도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고......"

"이해가 되기 시작해요." 어린 왕자가 말했다. "꽃이 한 송이 있는데, 나는 그 꽃에 길들여졌나 봐요......" "아, 그런데 그 꽃은 이 지구 상에 있지 않아요!"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런데 너는 금빛 머리카락을 가졌구나.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상상을 해봐! 저 금빛 나는 밀밭을 보면 네 생각이 날거야. 그러면 난 저 밀밭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를 좋아하게 되겠지......" 제발,나를 길들여 주렴!" 그 여우가 말했다.

"당신을 길들이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린 왕자가 물었다.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단다." 여우가 대답했다. "우선 너는 나에게서 약간 떨어져서 이렇게 잔디에 앉아 있어봐. 내가 곁눈질로 너를 쳐다볼 거야. 그래도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이라는 것은 오해의 근원이 되지. 그래도 너는 날마다 점점 가까이 다가와 앉게 될거야......"

==================================================================== 제 친구는 이 구절이 너무 와닫는다고 나란히 앉은 문대 도서관 자리에서 노트에 적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눈시울이 붉게 변하는 것이 보입니다.. " 아냐.. 잠을 못자서.. 하품이 나서.."

나는 또 이 귀절을 두번 세번 읽어 봅니다. 실은 지금도 정신이 쪼매 엄서서..뭔가 길게 적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역사과니깐.. 아무래도 길들여 진다..는 것도 역사적인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이리저리 머릴 굴려봅니다.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듯..(--'') 인간은 구속과 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데 그 비율을 적당히 맞추어 안정되기 살려는 노력을 해 오는 모양이다. 라는 생각.

구속된 속에서는 항상 해방을 생각하고 ..지나친 해방속에서는 갈 곳을 몰라 방황하여 어디엔가 구속되고 싶어하는 인간.
적절한 불안이나 긴장이 유발되어야 행동에 돌입한다는 인간..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을 동시대에 맞추거나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가는 것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것인데.. 그 적응의 과정 속에서 사회화 되어 간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많은 않은 문제. 이 시대하고 나하고 마음이 안맞는 경우..자꾸만 고민하게 되고..더더욱 반항적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삐걱거림.
사회 부적응 인간..
정신 병자는..우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일 뿐이지요.
학교 부적응 아동.. 그네들도 마찬가지이고..
소외된 자들..
정말 소외된 자들은 그런 사람들이라는 생각.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오늘도 잠재된 불안의 힘에 밀려 어디론가 가도록 무언의 힘이 저를 독촉하는군요
문도로...

아하..
논리적이지 못한 나열식의 글이라도 너그럽게 애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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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18 09:30

역사 연구 방법론을 분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관념론과 실증주의라고요?
과학적이면 실증주의고, 과학성이 떨어지면 관념론인가요?
허허..
유의할 것은 근대 역사학이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지면서
가장 강력하게 표방한 것이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입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학에서 엄정한 사료비판에 입각한 역사적 사실 확립 방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사실 확립의 준칙을 세우지요.
이게 역사주의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는 바로 실증주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실증주의"하면 우리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우선 꽁트를 떠올려야 합니다. 바로 실증주의 사회연구의 길을 연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 자가 한 일은 사회발전의 법칙을 정립하려 하였어요.
그래서 실증주의는 법칙을 정립하려는 지적 조류이지요.
법칙은 당연히 자연과학에서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렇듯 사회현상을 법칙화하려면 우선적으로 사회현상에 대한 통계가 작성되어야 합니다.
바로 서양에서는 19세기 중반이 왕성한 통계작성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대를 실증주의 시대라고도 부릅니다.
역사주의는 법칙을 정립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문화는 그 자체로 유니크하고 일회적(단 한번밖에 없다는 뜻)인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지요.
자연현상은 일회적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지요. 따라서 법칙 정립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과 문화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 역사주의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역사주의는 법칙을 정립하려 하지는 않더라도 과학적이려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사실확립에서 찾으려 합니다.
따라서 법칙 정립의 측면에서 보면 역사주의는 실증주의적이지 않지만,
사실 확립을 통한 객관성(이것이야말로 과학성이지요) 확보라는 목표에서는 실증주의적입니다.
그래서 나는 실증주의적 역사학이란 표현을 싫어합니다.
그 시기의 역사학은 법칙 정립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입문서에서는 역사주의를 실증주의로 분류합니다.
바로 객관성을 향한 지향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해가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나는 역사학을 실증주의와 관념론적 역사학으로 나누는 것은 처음 봅니다.
하하... 관념론적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역사철학에서나 있는 것이에요.
예컨대 헤겔 같은 사람이 그렇지요.
그리고 소위 과학적 역사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사실은 그게 얼마나 관념적인데요.
법칙을 정립하는 것은 인간의 관념이랍니다.

ps. 이크 하나 빠트렸네. 역사주의의 방법이 이해입니당~ /선생님

--------------------- [원본 메세지] --------------------- 저 다름이 아니고..

역사학에 있어서 감정이입을 실증주의 연구 방법의 대표라고 하신 대목에서 궁금한게 있어서요..
제가 수업시간에 배우기로는
역사학의 연구방법은 관념론적 연구방법과 실증주의적 방법이 있구..
감정이입은 이해를 위주로 하고 좀 덜 과학적..인 방법을 추구하기 때문에 관념론적인 방법의 대표 중의 하나라고 배웠거든요..

근데 북해님은 감정이입을 실증주의 대표라고 하신거 같아서..
어떤게 맞는건가요?^^ /나

--------------------- [원본 메세지] ---------------------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읽고 있답니다.
에반스가 "역사학을 위한 변론"에서 잘못된 포스트모던 역사 이해의 대표선수로 여러 번 지적하기도 하였고, 그 놈의 포스트적 역사인식의 개괄적인 그림이 궁금하기도 하여서, 읽고 있어요.
아주 얇은 책이에요.
내용도 그리 어렵지 않고...
그러나 웬만해서는 읽지 마세요.
재미 드럽게 없으니까니*^^*.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한토막 있길래 소개하려합니다.
젠킨스가 소위 실증주의 역사학의 고전적 방법인 "감정이입"을 비판하는 대목입니다.
실증주의라기보다는 역사주의라고 해야 더 올바를 터인데..
양자가 접점이 많기는 하므로,
xx주의 문제는 놔두기로 합니다.
어쨌거나 19세기 역사학은 첫째, 역사학의 대상을 인간으로 삼고,
문화 혹은 문명이라는 것도 인간이 자연을 변조시킨 것이니만큼 인간이 아닌 도시를 대상으로 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둘째, 인간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이해"를 꼽습니다.
"설명"이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라면,
"이해"는 인간의 동기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해의 핵심적 수단이 감정이입이에요.
감정이입이란 역사가인 내가 역사상의 타인의 마음이 되어보는 방법입니다.
예컨대 루터가 반박문을 쓰기 직전의 마음 상태에 도달하려는 것이지요.

감정이입에 대한 비판은 이미 사회사에서 많이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루터와 내가 세계를 대하는 감성과 인지 방법이 근원적으로 다르다면 내가 루터가 되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젠킨스도 그 이야기를 하는데, 예가 걸작이에요.
우리들은 친구간에도 서로의 마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는 것이에요.
현대의 타인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데 어떻게 역사상의 인물이 되어볼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낄낄거리면서 속으로 그랬답니다.
"하기야..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만큼 사랑하는 애인의 마음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거늘.."
아시지요? 연애하는 님들..
연인끼리 왜 싸워요?
서로가 될 수 없으니 싸우지요.. 허허..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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