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2003/03/10 20:51

포괄적이고 싶습니다.
리플이라기 보다는 그냥 느낀 것입니다.

역사만을 생각하다보면 혹은 역사적으로만 생각하다보면 역사의 우물 외부에서 역사를 어떻게 보는 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어집니다.
아니면 역사학 외부에서 역사학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학문의 정체성에 대해서 논할 생각은 없습니다. 역사학은 이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도덕적 고민 철학에 빠지는 것 또한 마땅해야 한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부의 고민으로만 빠져드는 것은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든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부로 침체되어 그 속에 몰입이 묶여 있다면 때론 발상의 전환으로 나가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을 하는 사람들, 혹은 역사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어떠한가를 느껴보는 것.
그러나 고유의 권한과 중심을 잃지 않을 당당함과 자부심을 가질 것.
그것은 밥그릇 싸움이 아닌 치열한 고민에서 얻은 학문적 정체성이겠지요. 그래서 철학은 어느 학문에서든지 기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학적 고민이 없는 인문학은 미래가 없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역사를 접한 학문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역사학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을 들으면 종종 화가납니다. 사료를 활용하면서 역사학적 연구 방법을 사용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들 학문적 이론의 근거를 구축해 가는 사람들은 종종 학문을 서열화 하려고도 합니다. 역사를 좀 알다 보니 자기네 학문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논조로 비아냥 거릴 때는 분노가 치밀기도 합니다.

또는 역사논문과 자신들 학문의 논문들의 일반적 성향을 비교하면서 역사학 논문의 내러티브한 고유 방식을 두고 티끌만한 사실도 빠짐없이 나열하려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역사가들은 아주 조그만 기록이나 사소한 것도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가시적이고 크게크게 보이는 변화에 주목하여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일반적 경향을 이끌어내고 앞으로의 변화에 직접 동참하고 싶은 사람들은 개미처럼 부지런한 역사가의 발로 뛰어 얻어낸 사실적 자료들과 그 해석의 바탕이 모아져야 자신들이 주장하는 큰 패턴또한 가능하다는 것을 때로 간과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이론을 뒷받침 할 사료, 부분들만 가져가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나머지의 부분은 관심 영역 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학은 나머지의 구석까지도 건져내려고 합니다.
역사학의 세밀함과 꿋꿋함. 빠진 것 없이 건져내려는 노력이 갖는 의미는 화려한 무대 뒤의 깊고 넓은 지하의 음침한 곳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계들의 숨은 움직임과도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직접적으로 보이는 화려함은 없지만.. 누군가 말했듯이 역사학은 우회적인 것이지 바로 기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처럼

이러한 매력이 역사학이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역사학은 취사선택적이 아닌 인간의 흔적이 있는 어디든지 달려갈 마음으로 인간이 존재했던 어느 구석이던지 세밀한 부분에까지의 애정이 밑바탕 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학은 노가다일 수 밖에 없는 이유.. 어디든지 달려가야 하니깐..
그래서 역사학은 인간의 존재 기억,흔적에 대해 포괄적일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구석구석 찌든 때까지 쏙쏙.. 긁어낸다는 자세.. 작은 것 조차에 대한 관심과 애정.

오늘 누가 역사학에 대해 은근히 비아냥 거리는 말을 말을 듣고 좀 흥분한 나머지 글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것은..
그에 대항하여 반박할 용기를 내어 보지 못한 자신입니다.
다른 분들은 저 같은 처지에 놓이면 꼭 용기내어 한 말씀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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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3/03/06 10:27

뜨끈뜨끈한 해물탕 소박하게 소주 한 잔

생각나는 날

먼 곳 있는 술 친구 아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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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3/02/06 20:40

오페라의 유령은 1910년 프랑스에서 나온 가스통 르루의 공포추리소설이다. 저자
(Gaston Leroux, 1868-1927)는 명탐정 셜록홈즈로 유명한 영국의 코넌 도일(A. Conan Doyle, 1859-1930)이나 아르센 루팡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모리스 르블랑(Maurice Leblanc, 1864-1941)과 동시대에 활약한 추리작가이다.

처음에 창작과 비평사 판을 샀다가 다음 날 서점에 가서 문학세계사 판으로 바꿔왔다.
두 개가 다른 점은 창비판은 영문판을 한글로 옮겨놓은 것이고 문학세계사판은 프랑스판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이 다르다. 편견의 차이인지 정말 내가 느껴서인지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지만 불어판 번역에서 좀 더 섬세하며 프랑스 문학 특유의 무겁고 음습한 분위기(?)를 보다 깊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더 끌렸던 거 같다. 그냥 커피 향의 종류가 다른 것과 같은 것과 같은 느낌. 영문판이 브랜드 커피라면 불어판이 에스프레소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하면 너무 오버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어떤 사람은 불어판 조차도 너무 가볍고 원작을 훼손하는 번역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봤지만 아직 그 감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는가 보다.

작가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일단 기자출신 답게 글이 신문의 사건 사고를 다루듯이 진행된다. 소설을 논리 있는 기사처럼 포장해 놓는다. 제목은 오페라의 유령이라서 중세의 마녀를 다루는 것과 같은 종류의 신비성을 주축으로 하는 내용이 아닐까란 착각을 하게 만들지만 제목에서 가지게 되는 신비의 기대는 첫 줄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깨어진다. "오페라의 유령은 정말로 존재했었다" 의 시작 문장은 트릭이 아니다. 1910년에 나온 책인 만큼 작가는 시대정신의 반영자이다. 이성에 대한 믿음, 불확실한 미신적 존재에 대한 불신, 원인에 대한 논리적 증명, 과학성. 작가는 다수의 조연들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 일단 사람들이 믿고 있는 유령의 존재에 대한 공포를 부산스럽게 과장시킨다. 그리고 제 3자의 엘리트적이며 논리적이고 지적으로 세련된 화자를 통해 공포의 원인이 되었던 사건들을 탐정의 시각을 통한 과학적 수사로 매듭을 풀어 나간다. 오페라의 유령이란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 더 이상 터치하면 안 될 미스테리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서 순순히 오페라의 유령에 복종해야 순리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 저항에의 포기, 단념. 그리고 유령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반드시 그의 행적에는 이유와 설명이 가능하며 밝혀낼 수 있다는 제 3의 목소리. 제3의 시점을 대변하는 사람은 귀족 출신인 라울 샤니 자작과 페르시아인이다. 그렇다면 미스테리를 풀어 해치게 되는 귀족 출신의 라울의 동기는? "사랑" 이다. 오페라 무대의 아름다운 목소리의 크리스틴 다에를 향한 "사랑의 힘"이 동력이다.

이 통속적인 요소는 무엇을 위하여 등장하는가? 사랑에 대한 매체에서의 표현은 무수하게 등장하고 있고 굳이 옛날 소설에서의 사랑을 찾지 않아도 날마다 그러한 스토리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많고 많은 사랑의 얘기 중에서 1910년에 지어진 추리소설에서의 "사랑"이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쩜 자본주의적인 것인지 모른다. 누군가 까페에서 연애는 혁명의 적이라는 발언을 익명 게시판에 남겨서 웃고 지나가게 만들기도 했지만...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는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정의하는가..

추리소설은 자본주의와 함께 존재함으로서 그 가치를 부여받는다. 부르조아, 귀족의 재산은 법적으로 보장받기 때문에 그것을 노리는 자는 "악"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힘인 노동력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조치-상해, 살인 행위의 범법화- 는 타인의 신체에 대한 공격적 행위를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즉 부자의 재산을 노리는 자나 살인자는 징벌의 대상이 된다. 물론 살인자가 당연히 징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현재 논리로서는 당연하겠지만 중세와 비교해 봤을 때 신체의 예속화는 근대화, 자본주의화의 맥락과 같이 한다는 점에서 초점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 "감시와 처벌"에서 말했던 것처럼...
아무튼... 누구를 위한 권선징악인지는 모르나 추리소설에서의 권선징악은 자본주의의 속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조목조목 해부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이는 역설적으로 사회주의에서 추리소설이 활개치는 것을 봤냐? 는 논리로 설명하기도 한다.

아차..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 "사랑의 힘"의 등장 때문에 오페라의 유령이 여타의 탐정 추리소설과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탐정 소설에서의 탐정은 돈 많은 귀족에 의해 고용된 전문가이다. 동기는 주로 값비싼 보석이나 대대로 내려오는 소중한 귀족의 가보..같은 것을 다시 찾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고 부수적으로 소소한 로맨스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점차 추리소설의 다양화가 됨에 따라 루팡과 같은 매력적인 범죄자가 등장하고 알고 보면 "사랑의 힘"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더라..는 식으로 구성되는 소설들도 있긴 했었지만 어쨌든 동기는 부르조아틱하게도 "재산" 이다.

그러나...
오페라의 유령에서의 탐정활동의 주역은 전문가 탐정이 아닌 젊은이 "라울"이다. 그리고 그의 목적은 잃어버린 "재산"을 찾기 위함이 아닌 잃을 뻔한 "사랑"을 찾기 위함이다. 어쨌거나 주인공이 귀족이라는 점은 별반 기존과 쌤쌔미..그게그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주 목적의 전환의 시점에서부터의 결점까지의 기존의 탐정 추리소설과는 다른 방향 전환은 아주 색다른 맛을 지닌 소설로 변모시킨다. 물론 한계를 지적하고 꼬집고 헤집자면 또 끝이 없긴 하겠지만... 오페라의 유령에서의 "사랑"은 어떤 결말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인가..

재산 -> 사랑 의 동기 전환의 끝에서 기다리는 결론의 전환 권선징악 -> OOO? 의 OOO은 무엇? 그것은 권선징악이 해소의 전부이며 끝이며 해피앤딩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다 속사정을 면밀히 들여다 보고 우리가 생각없이 규정지었던 "악"의 근원은 어디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자며 연결 고리를 이어간다. 오페라의 유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에릭의 어린시절, 불합리한 외모(?)로 인한 소외당함과 인간적 절망, 증대되는 반사회적 복수심, 분노..등등이 빚어내고 만들어 낸 현재의 에릭의 존재와 그의 범죄 행각은 "악"이란 결국 혹처럼 붙어 있는 떼어내야 할 존재 조차도 우리=인간이 만들어 낸 참극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크리스틴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애정 방식 또한 그 범주의 하나이다. 앞에서도 "사랑의 힘"을 말하곤 했지만 여기서 에릭을 잠재울 수 있는 것 또한 징벌이 아닌 "사랑"임을 결과적으로 드러내는데 어떻게 보면 참으로 단순한 귀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알고보면 크리스틴은 에릭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저 동정할 뿐...소외된 자에 대한 작가의 관심... 가장 그나마 최근에 나왔던 영화 "프랑켄 슈타인"적인 관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그런데 인간의 비극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뭔가 중요한 인식을 하고 바꿀 필요성이 있다는 식의 교훈적 느낌에서 끝나지가 않는다. 이것은 개인적인 끊이지 않는 의문과 모호성, 혼란이기도 한데 그러한 교훈적 진리를 끌어내리기에는 이제까지 이끌어온 책속의 너무나 많은 구성 요소들이 도마에 오를 준비를 스스럼 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결국은 귀족인 라울이 승리하는 구도로 끝나지 않았는가 부터 시작해서 그 "사랑의 힘"의 그 속성의 비약까지를 포함한... 좋은 맘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고나니 더 모호한 이 기분 -.- 예전에는 책 읽고 감동받으면 그 좋은 느낌으로 끝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감동과 동시에 시작되는 의문..들이 나타나는 증상.. 갑자기 이 책이 정말로 좋은 책이었나 하는 의문까지 들기 시작한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 산만한 이제까지의 글의 남은 한마디는 이것뿐이다. 인간과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다는 것이다..

또한.. 딱 떨어지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소중한 책으로 점 찍혔다는 감흥의 모호성 또한 현재로서는 밝혀내지를 못하겠다. 글 쓰기 시작할 때는 뭔가가 밝혀진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시작했으나 의도와는 결국 다른 상태로 끝맺음이 되는데...

갑자기 최근에 본 "이중간첩"이 생각이 난다. 잘 봤다는 생각이 들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좋은 꺼리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 영화는 재미없고 지루하며 비약이 많고 영화로서는 실패작이라 생각되는 것과도 비슷한 현상인지도...

암튼.. 오페라의 유령을 읽으면서 참기가 어려웠던 것은 크리스틴과 에릭의 목소리.. 그리고 무수히 등장하는 오페라를 너무나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망상이었다. 결국 음반을 사게 되었는데 오페라의 유령 대사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있는 두 장의 CD가 들어있었고 대사를 보지 않고는 도저히 따라 들을 수 없는 진짜 오페라가 들어있어서 2시간 동안 다 듣는다고 시껍했다.. 그래도 마지막 부분에 에릭이 크리스틴을 떠나보내는 장면에서는 울컥....하구 말았다. 음악의 미혹...을 즐감하는 보람이 있었다.

너무나 핵심이 없는 글을 올린데 대한 미안함..(--)(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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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3/01/17 12:23

"유용한 문제의식의 전달체"

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현재까지의 짧은 저 개인적 사고의 한계를 보이는 것 같기도 해서.. 쓰기가 망설여지는 말이기도 한데...
저에게 역사는 위와 같은 점에서 호기심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저의 도구적 모티브란 점일 뿐 아직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역사를 사랑하려면 그 이상의 역경을 딛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을 거란 점에서 부끄럽네요..
꼭 善이란 무엇인가의 질문과 같은 오묘한 느낌.

저의 무식함 또한 용서해 주시길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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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2/10/18 18:29

예전에 읽다가 인상에 남는 부분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그때는 이 대목이 어찌나 충격적이었던지..

"이렇게 살아도......되는 겁니까?"
교수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나는 새겨 말했습니다.
"이 술 말씀인데요......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교수는 안경테를 밀어올렸습니다. 미간에 주름이 모아지는 것으로 봐서 기분을 상한 듯했습니다. 그러나 말만은 교육받은 사람답게 점잖았습니다.
"나는 정당하게 노력했어요."
"정당하게 노력하고도 소주도 못 마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거야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지요."
"그거야 정치가들의 소관이지요."
"우리는......똑같은 인간입니다."
"분명 똑같은 인간이지만 평등하진 못해요. 아니 평등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의 삶의 방법이 다양한 만큼 나는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한국 경제의 특징은 한마디로 빈부격차의 심화이며 지엔피만의 고도성장이다.라는 교수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교수는 미간의 주름을 펴면서 양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카카카 하고 유쾌한
듯 웃었는데 가장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대강 적당히 술판을 걷고 어서 이 맹랑한 중놈을 쫓아내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진지하게 경청하겠다는 자세로 상체를 기울였습니다. 교수는 또 카카카하고 웃었습니다.
"참선하는 대사께서 별 관심이 다 많으시오."
나는 웃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질 작정입니다. 특히 경제학을 공부해 볼 작정이에요."
교수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경제학이라......좋지요."
"지엔피가 성장되면 근로자들의 생활수준도 올라가는 것 아닌가요?
교수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언뜻 그렇게들 생각하시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통계숫자의 마술이며 일종의 대중조작입니다. 단적인 예로 72년부터 76년까지 오 년동안 근로자의 실질 임금은 매년 8.5%씩 늘어난 데 반하여 같은 기간에 지엔피는 11%씨 증가했습니다. 이것은 근로자들의 노동성과가 점차 더 낮게 평가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증거에요. 다시 말해서 근로자들은 더 오랜 시간을 노동하여 더 많은 양의 물자를 생산해 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떨어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8.5%와 11%의 간격, 그 이윤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말할 거도 없이 몇몇 특정 독점 자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거지요. 근로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여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음으로서 얻어진 이익으로 독점 자본가들은 중소기업을 병탄하고, 빌딩을 올리고 에스컬레이터 풀장이 달린 아방궁을 짓고, 탈렌트와의 하룻밤 정사에 아파트 한 채씩을 사주고 있다는 얘깁니다. 자기보다 잘사는 부자를 매도할 때 사람들은 신이나는 것일까요. 교수의 어조는 열을 띠고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 땅에서 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자들이 어떻게 재벌이 된 줄 아십니까? 근검절약, 자수성가는 요순시대 얘기예요 하기야 작은 부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지만 대부는 하늘이 낸다 했으니 재벌들은 하늘이 낸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교수는 끌끌 혀를 찼습니다.
" 하지만 한국의 경제구조에서 하늘이란 바로 은행이고 외국차관이란 데 문제가 있어요 융자나 차관은 결국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되는 것일진대, 하늘이란 바로 정부를 뜻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국민을 잘살게 해주겠다는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쥐어짜서 특정 재벌들을 살찌게 해준다는 아이러니가 성립되는 거예요."

"정말 심각한 얘기를 하는 교수의 얼굴은 그러나 조금도 심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심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절박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언어라는 것은, 그리고 문자라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 모릅니다. 관념은 행위의 어머니임이 분명하지만 행위가 수반되지 않은 관념이란 또 얼마나 감상적인 것인지......

소설가 김성동은 실재로 머리를 깎고 수도했던 사람이다. 가족은 6.25때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집단으로 죽음을 당하고..개인적 한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살아왔던 격동의 시대속에서 이데올로기, 이념이 그에게 의미하는 것은 다음 대목을 통해 드러난다.

마르크시즘을 포기하고 데모크라시즘을 옹호한다는 전향서에 서명만 하면 최소한 죽음만은 면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까지 거부하고 참혹한 처형쪽을 택한 한 사나이의 장부다운 기개와 신념을 나는 존경한다. 하지만 죽음을 걸 만큼 그 이즘이란 것이 그렇게 절대한 가치였는지를 나는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택한 신념과 사상을 죽음을 걸고 옹호하는 것도 좋겠지만 자기가 보호하고 행복하게 해줘야 할 사람들을 평생 불행케 만들 이즘이고 신념이라면 깨끗이 버리고 차라리 필부가 되어 한 세상 이름없이 사는 쪽이 더 인간적이고 또 장부다운 기개가 아닐까..

그 시대를 직접 살아온 사람의 이런 솔직한 고백에 감히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인연에 대한 표현

그 여자와 눈길이 마주친 건 극히 짧은 순간이었는데, 또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어 ...'인연이란, 특히 남녀간의 안연이란 참으로 묘한 거더군. 딱 한번 눈길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그 여자의 모습은 내 가슴 깊은 곳에 지울 수 없는 지문으로 자리잡아 버리는 거였으니... 그 한번의 눈길이 날 이렇듯 허무와 절망의 심연으로 추락시켜 버리게 될 줄이야......아아 관세음 보살......." - 어느 땡중 '지산'의 경험담..

갑자기 생각난 은희경의 '사랑'에 대한 표현

사랑은 마치 모래 벌판 위로 내리는 눈과 같다고 은희경은 말한다. 백색 설원의 일체감은 미혹일 뿐, 모래는 여전히 모래로서의 외로움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사랑은 타인이 나와 관계 맺기 위해 던져 놓은 영롱한 빛깔의 덫이며,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야수의 논리를 은폐하는 가면이라는 것이다. 이제 타인은 사랑의 이름으로 나에게 규격화된 삶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네가 느끼는 외로움과 무의미를 덜어 줄 여러 관계와 정체감을 부여 하였으니,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야 할 네모꼴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이 대목을 읽고 머리속에 그려진 그림이란 얼마나 이중적이었던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받아들이자..

다시 만다라에서..

"스님"
"응"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길일까요?
"결국 진실이야. 어떻게 살든 자기를 속이지 않고 진실하게 사는 것밖에 없어"
"그런 추상적인 것 말고요."
"결국 추상일 수밖에 없어. 예수도 석가도 마찬가지야. 사랑이지. 사랑하는 거지. 그리고 타인을 살아하기 위해선 우선 자신부터 사랑할 수 있어야지."
"사랑할 수 없을 때는요?"
"죽어야지. 미련없이 떠나야지. 발버둥친다는 건 추악해. 살아봐도 그건 이미 자기의 삶이 아니야."

그는 자기를 못 견디게 하는 것은 허무라고 했다. 허무는 자기에게 있어 바로 삶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들은 살아 숨쉬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숨쉬고 있는 이 삶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불타에게도 불가사의한 존재가 바로 삶이요 허무라고 했다.

밤이 깊다.

깊은 밤의 적요를 가르며 보리수 잎이 떨어진다. 짙게 깔린 어둠을 뚫고 생성과 소멸과 환생의 어머니인 대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는 릴케의 표현은 잘못이다. 체념이 아니다. 순응. 죽음이 아니고 시작이며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무한한 가능의 문이다. 죽음이 두려워 회피하고 타협하고, 저항하고, 몸부림치다 결국 죽고 마는 인간보다 나뭇잎은 얼마나 지혜로운가. 불티 같은 수유에서 나는 의식이 없는 초목에까지 불성을 부여한 불타의 혜안과 자비에 합장한다.
또 하나의 보리수 잎이 떨어진다. 순응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질서라고 해도 좋다. 어떤 보이지 않는 절대한 힘에 의한 섭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토록 정연한 질서와 섭리에 저항하고 싶은 게 중생 아닌가. 그것이 중생의 중생스러움이 아닌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 없는 물체에 점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어두운 마음의 눈에 점을 찍어 밝은 등불을 켜야 하는 것입니다. 복달라고 비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마음 깨쳐 스스로 부처 되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관세음보살."

종교가 인간을 순응시킨다.. 투쟁, 변화시키라고 하지 않고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때로 변화하자고 가끔 들고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 가시적인 행동들은 가끔..이라고 느껴진다. 어쩌면 그 가끔이 핵심인지도 모른다. 원인은 마음에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 한을 삭히라고 강요한다.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 변화시키자고 하는 것은 아직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일진데..
역사는 변화하자고..모토를 걸고 배우는 것이지 않았던가. 어쩌면 순응을 위해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모름. 개인으로 원인을 돌리고 삭히며 도닦는 인간들은 얼굴이 맑다. 맑디맑디 못해 광채도 난다. 집단으로 연대하여 투쟁하여 변화시키는 것. 보다 나은 세계로!!! 투쟁하는 자들의 얼굴은 어둡다. 찌들었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의 아이러니. 변화하자는 인간들은 어둡고 순응하는 인간들의 얼굴은 밝다. 현재의 어두움은 나중의 밝음을 기약하는 것일진데.. 아무튼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니깐.
허무의 만연화...라는 것도...새벽의 안개와 같은 옅게 깔린 존재인 이것은. 맑게 갠 아침을 기약하는 것인가.

격동의 변화. 발전 재조합..순응의 열망 등도 결국 자연 속에서의 인간일 뿐이지 않던가
갑자기 수업시간에 배운..브로델이 생각나면서.. 지중해와..뭐라고 하든데..글쩍--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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