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2002/10/18 18:29

예전에 읽다가 인상에 남는 부분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그때는 이 대목이 어찌나 충격적이었던지..

"이렇게 살아도......되는 겁니까?"
교수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나는 새겨 말했습니다.
"이 술 말씀인데요......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교수는 안경테를 밀어올렸습니다. 미간에 주름이 모아지는 것으로 봐서 기분을 상한 듯했습니다. 그러나 말만은 교육받은 사람답게 점잖았습니다.
"나는 정당하게 노력했어요."
"정당하게 노력하고도 소주도 못 마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거야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지요."
"그거야 정치가들의 소관이지요."
"우리는......똑같은 인간입니다."
"분명 똑같은 인간이지만 평등하진 못해요. 아니 평등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의 삶의 방법이 다양한 만큼 나는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한국 경제의 특징은 한마디로 빈부격차의 심화이며 지엔피만의 고도성장이다.라는 교수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교수는 미간의 주름을 펴면서 양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카카카 하고 유쾌한
듯 웃었는데 가장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대강 적당히 술판을 걷고 어서 이 맹랑한 중놈을 쫓아내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진지하게 경청하겠다는 자세로 상체를 기울였습니다. 교수는 또 카카카하고 웃었습니다.
"참선하는 대사께서 별 관심이 다 많으시오."
나는 웃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질 작정입니다. 특히 경제학을 공부해 볼 작정이에요."
교수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경제학이라......좋지요."
"지엔피가 성장되면 근로자들의 생활수준도 올라가는 것 아닌가요?
교수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언뜻 그렇게들 생각하시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통계숫자의 마술이며 일종의 대중조작입니다. 단적인 예로 72년부터 76년까지 오 년동안 근로자의 실질 임금은 매년 8.5%씩 늘어난 데 반하여 같은 기간에 지엔피는 11%씨 증가했습니다. 이것은 근로자들의 노동성과가 점차 더 낮게 평가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증거에요. 다시 말해서 근로자들은 더 오랜 시간을 노동하여 더 많은 양의 물자를 생산해 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떨어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8.5%와 11%의 간격, 그 이윤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말할 거도 없이 몇몇 특정 독점 자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거지요. 근로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여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음으로서 얻어진 이익으로 독점 자본가들은 중소기업을 병탄하고, 빌딩을 올리고 에스컬레이터 풀장이 달린 아방궁을 짓고, 탈렌트와의 하룻밤 정사에 아파트 한 채씩을 사주고 있다는 얘깁니다. 자기보다 잘사는 부자를 매도할 때 사람들은 신이나는 것일까요. 교수의 어조는 열을 띠고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 땅에서 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자들이 어떻게 재벌이 된 줄 아십니까? 근검절약, 자수성가는 요순시대 얘기예요 하기야 작은 부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지만 대부는 하늘이 낸다 했으니 재벌들은 하늘이 낸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교수는 끌끌 혀를 찼습니다.
" 하지만 한국의 경제구조에서 하늘이란 바로 은행이고 외국차관이란 데 문제가 있어요 융자나 차관은 결국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되는 것일진대, 하늘이란 바로 정부를 뜻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국민을 잘살게 해주겠다는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쥐어짜서 특정 재벌들을 살찌게 해준다는 아이러니가 성립되는 거예요."

"정말 심각한 얘기를 하는 교수의 얼굴은 그러나 조금도 심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심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절박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언어라는 것은, 그리고 문자라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 모릅니다. 관념은 행위의 어머니임이 분명하지만 행위가 수반되지 않은 관념이란 또 얼마나 감상적인 것인지......

소설가 김성동은 실재로 머리를 깎고 수도했던 사람이다. 가족은 6.25때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집단으로 죽음을 당하고..개인적 한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살아왔던 격동의 시대속에서 이데올로기, 이념이 그에게 의미하는 것은 다음 대목을 통해 드러난다.

마르크시즘을 포기하고 데모크라시즘을 옹호한다는 전향서에 서명만 하면 최소한 죽음만은 면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까지 거부하고 참혹한 처형쪽을 택한 한 사나이의 장부다운 기개와 신념을 나는 존경한다. 하지만 죽음을 걸 만큼 그 이즘이란 것이 그렇게 절대한 가치였는지를 나는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택한 신념과 사상을 죽음을 걸고 옹호하는 것도 좋겠지만 자기가 보호하고 행복하게 해줘야 할 사람들을 평생 불행케 만들 이즘이고 신념이라면 깨끗이 버리고 차라리 필부가 되어 한 세상 이름없이 사는 쪽이 더 인간적이고 또 장부다운 기개가 아닐까..

그 시대를 직접 살아온 사람의 이런 솔직한 고백에 감히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인연에 대한 표현

그 여자와 눈길이 마주친 건 극히 짧은 순간이었는데, 또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어 ...'인연이란, 특히 남녀간의 안연이란 참으로 묘한 거더군. 딱 한번 눈길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그 여자의 모습은 내 가슴 깊은 곳에 지울 수 없는 지문으로 자리잡아 버리는 거였으니... 그 한번의 눈길이 날 이렇듯 허무와 절망의 심연으로 추락시켜 버리게 될 줄이야......아아 관세음 보살......." - 어느 땡중 '지산'의 경험담..

갑자기 생각난 은희경의 '사랑'에 대한 표현

사랑은 마치 모래 벌판 위로 내리는 눈과 같다고 은희경은 말한다. 백색 설원의 일체감은 미혹일 뿐, 모래는 여전히 모래로서의 외로움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사랑은 타인이 나와 관계 맺기 위해 던져 놓은 영롱한 빛깔의 덫이며,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야수의 논리를 은폐하는 가면이라는 것이다. 이제 타인은 사랑의 이름으로 나에게 규격화된 삶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네가 느끼는 외로움과 무의미를 덜어 줄 여러 관계와 정체감을 부여 하였으니,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야 할 네모꼴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이 대목을 읽고 머리속에 그려진 그림이란 얼마나 이중적이었던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받아들이자..

다시 만다라에서..

"스님"
"응"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길일까요?
"결국 진실이야. 어떻게 살든 자기를 속이지 않고 진실하게 사는 것밖에 없어"
"그런 추상적인 것 말고요."
"결국 추상일 수밖에 없어. 예수도 석가도 마찬가지야. 사랑이지. 사랑하는 거지. 그리고 타인을 살아하기 위해선 우선 자신부터 사랑할 수 있어야지."
"사랑할 수 없을 때는요?"
"죽어야지. 미련없이 떠나야지. 발버둥친다는 건 추악해. 살아봐도 그건 이미 자기의 삶이 아니야."

그는 자기를 못 견디게 하는 것은 허무라고 했다. 허무는 자기에게 있어 바로 삶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들은 살아 숨쉬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숨쉬고 있는 이 삶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불타에게도 불가사의한 존재가 바로 삶이요 허무라고 했다.

밤이 깊다.

깊은 밤의 적요를 가르며 보리수 잎이 떨어진다. 짙게 깔린 어둠을 뚫고 생성과 소멸과 환생의 어머니인 대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는 릴케의 표현은 잘못이다. 체념이 아니다. 순응. 죽음이 아니고 시작이며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무한한 가능의 문이다. 죽음이 두려워 회피하고 타협하고, 저항하고, 몸부림치다 결국 죽고 마는 인간보다 나뭇잎은 얼마나 지혜로운가. 불티 같은 수유에서 나는 의식이 없는 초목에까지 불성을 부여한 불타의 혜안과 자비에 합장한다.
또 하나의 보리수 잎이 떨어진다. 순응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질서라고 해도 좋다. 어떤 보이지 않는 절대한 힘에 의한 섭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토록 정연한 질서와 섭리에 저항하고 싶은 게 중생 아닌가. 그것이 중생의 중생스러움이 아닌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 없는 물체에 점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어두운 마음의 눈에 점을 찍어 밝은 등불을 켜야 하는 것입니다. 복달라고 비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마음 깨쳐 스스로 부처 되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관세음보살."

종교가 인간을 순응시킨다.. 투쟁, 변화시키라고 하지 않고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때로 변화하자고 가끔 들고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 가시적인 행동들은 가끔..이라고 느껴진다. 어쩌면 그 가끔이 핵심인지도 모른다. 원인은 마음에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 한을 삭히라고 강요한다.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 변화시키자고 하는 것은 아직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일진데..
역사는 변화하자고..모토를 걸고 배우는 것이지 않았던가. 어쩌면 순응을 위해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모름. 개인으로 원인을 돌리고 삭히며 도닦는 인간들은 얼굴이 맑다. 맑디맑디 못해 광채도 난다. 집단으로 연대하여 투쟁하여 변화시키는 것. 보다 나은 세계로!!! 투쟁하는 자들의 얼굴은 어둡다. 찌들었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의 아이러니. 변화하자는 인간들은 어둡고 순응하는 인간들의 얼굴은 밝다. 현재의 어두움은 나중의 밝음을 기약하는 것일진데.. 아무튼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니깐.
허무의 만연화...라는 것도...새벽의 안개와 같은 옅게 깔린 존재인 이것은. 맑게 갠 아침을 기약하는 것인가.

격동의 변화. 발전 재조합..순응의 열망 등도 결국 자연 속에서의 인간일 뿐이지 않던가
갑자기 수업시간에 배운..브로델이 생각나면서.. 지중해와..뭐라고 하든데..글쩍--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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