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두교 : 왜곡된 아프리카의 정신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41
라에네크 위르봉 지음 / 시공사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부두교가 대체 뭔지도 모르면서 왠지 금기를 대하는 듯한 스릴에 이끌려 이 책부터 빼들었다.

부두교. 아프리카의 토속신앙 정도로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의식은 문명인의 눈으로 보기엔

수상쩍기 그지 없지만 그들의 풍습이자 문화인 걸 어찌하랴.

내가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부두교는 이중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첫째는 아프리카 노예들을 해방시킨 독립의 힘, 자유의 힘이었고

둘째는 오히려 부두교로 인해 핍박당한 억압의 힘이었다.

그리고 이는 주로 그 당시의 집권자의 이해관계에 얽혀 때로는 자유의 힘이 되기도

때로는 억압의 힘이 되기도 했다. 어딜 가나 종교와 정치권력은 함께 하는가보다.

그리고 부두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이어지는데 부두교에 대한 의식절차나 그 의식,

상징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알게되면 놀라우리만치 우리네 제사 의식이랄까, 조상에 대한

의식, 상징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우리의 장례 풍습과 그들의 장례 풍습의 유사성을 들 수 있는데 장례를 통해 죽음과

삶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죽은 이를 죽은 이로써 인정하며 그를 죽은 이로써 섬기는 것이나,

산 사람은 또 산 사람대로 삶에 대한 의미를 깨달으며 살아가게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부두교에서는 주로 르와(정령)를 모시는데 르와에는 주로 신화 속의 존재나 자연물,

그리고 죽은 조상 등이 있다. 장례를 통해 죽은 조상을 르와와 같은 위치에 놓고 그를 잘

섬기고 모시면 그가 산 사람들에게 복을 베푼다는 것이다. 때로는 꿈에 나타나 어떤 계시를

하기도 한다. 우리가 조상님을 섬기는 의미나 그리고 조상님 꿈을 꾼다는 것과 유사했다.

그리고 운강이나 망보는 이러한 의식, 주술 등을 행하는 자인데 이들은 인간과 르와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들이 운강이나 망보가 되는 과정이나 운강이나 망보가 되어

하는 역할을 보면 우리네의 무당이나 신내림 등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무척이나 놀랐다고나 할까. 부두교라고 해서 염소, 닭피 등을 뿌리면서 춤추고 하는

미친사람들의 집단 쯤으로 알았으나, 알고 보니 그들의 의식 형태는 다소 충격적일지라도

그 의미나 상징은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네 굿판도 춤추고 죽은

이의 혼이 무당의 몸 속에 들어와 말하고 심하면 칼 위에서 춤추고 하는 걸 보면 우린

부두교더러 손가락질 못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들의 풍습이고 그들의 정신인 걸

인정해야지. 기독교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우상숭배로 보인다고 해서, 기독교의 잣대로

서양인의, 문명인의 잣대로 아프리카의 정신을 단죄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베베라고 해서 상징적인 문양이 있는데 이걸 미술사 쪽으로 풀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클림트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클림트 그림 속 상징들을

풀어서 이야기 해 놓은 책이 있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부두교와 관련된 미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작품 속에 차용된 베베 문양이랄까, 그 베베 속에 깃든 상징이랄까,

이런 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부두교에 대해 설명해도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이런 책 있을 지도 몰라. ㅎ

 

참, 이 책 뒷쪽에는 이 책을 쓰면서 모았던 자료들이 첨부되어 있는데 기록과 증언이라고 해서

원문을 실어놓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그는 쥐고 있던 쌀을 무의식적으로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쌀을 씹는 것이나

죽을 먹는 것, 밥을 먹는 것이 모두 매한가지였다. 어쨌든 허기를 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p16

 

 이 구절을 보면서, 내가 이미 생쌀과 죽, 밥이 매한가지가 아닌, 그 속에 드러나는 생황방식의 차이를 당연한 듯 느끼는 시대와 계층 속에 살고 있음을 느꼈다. 이에 비춰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은 나와는 다른 세대, 다른 생활 방식 속에 살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도입부의 이 한 구절이 앞으로 이 소설이 어떻게 펼쳐져 나갈 것인지 암시하는 것임을 느꼈다.

 와장가에 막 도착했을 무렵의 우룽은 가로등 아래 누워 있는 사람을 보고 감기 걸린다며 일어나라고 한다. 그러다 그 남자가 이미 죽은 남자임을 눈치 챈 우룽은 죽은 사람이 쫓아 오는 것도 아닌데 놀라 도망을 간다. 하지만, 쌀집에서 일을 하는 동안 우룽은 남의 일에는 무관심한, 자기 일만 아니면 사람이 죽어도 상관없다 생각하는 와장가 사람이 되어 버렸다. 아바오의 눈을 보며 움찔했던 우룽이었지만 이젠 다른 이들이 우룽의 눈을 보고 움찔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보며 두려워했던 우룽은 자신을 두렵게 했던 이들에게 모두 복수하고, 자신이 바로 그 두려운 존재로 등극했다. 애초에 너무 배가 고파 악해졌다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악을 유지했다. 무엇을..위해서?

 쯔윈.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였고 그녀의 몰락에 가장 마음이 아팠다. 쯔윈은 어린 나이에 와장가의 부호인 뤼 대감의 수양딸이 된다. 하지만 말이 수양딸이지 이내 정부 노릇을 하게 되고 이는 허영심에 가득 찬 쯔윈이 원한 일이었다. 뤼 대감이 그녀에게 시들해지자, 그녀는 오매불망 뤼 대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내들과 어울리며 뤼 대감에게 앙큼한 반항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누구의 씨인지로 모를 아이를 임신한 그녀, 뤼 대감에게 버림 받고, 비참한 몰골이 되어 울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쯔윈은 이내 다른 사내를 유혹해 함께 영화를 봤던 것이다. 나쁜여자이다. 난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남자에게 버림 받았다고 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악녀가 되어 그 상처를 훌훌 털어버리고선 또 다른 남자를 만나는 그녀가 좋았다.

하지만 역시 쑤퉁이다. 이런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신에게 시들해진 뤼대감에게 앙큼한 반항을 할 수 있었던 그녀에게 결국엔 뤼대감의 첩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고, 실상 그 속에서 하녀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아들이 장성하면 자신의 처우도 달라질 것이라는 욕망또한 품게 했다. 쑤퉁은 그렇게 지나치리만큼 당당했던 그녀를 오매불망 남자만 바라보며 그가 자신의 위치를 끌어올려주기만을 바라는 그런 여자로 전락시켰다.

 이 작품에 나오는 거의 모든 여자는 화냥년으로 그려진다. 다시 한번 쑤퉁의 여성관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무작정 선악설적인 시각은 어찌할꼬. 이 작품은 정말이지 선악설이다. 악에 대한 동정도 없다. 원래는 선한 인간이었지만 환경이 악하게 만들었다,는 설정이 아니라 원래 악했지만 딱히 그 악을 드러낼 상황이 없었는데 그 상황을 맞게 되자 그의 악이 발현됐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선악설이다. 우룽의 아들 둘에게 시집 온 여자들도 애초부터 악이었다. 그 집안에 그냥 무작정 덮어두고 악한 여자들이 들어온 것이다. 지나친 시집살이에 지쳐 서서히 악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애초부터 그런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악에 대한 개연성이 떨어지는 만큼 확실하게 인간은 애초부터 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래서..이 소설을 읽으면 읽을 수록 거북했다. 쑤퉁 소설의 특징은 평범한 이야기인것 같은데 딱히 기교를 부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글이 정말 잘 읽힌다는 것이다. 이야기도 재미있고. 그래서 한창 재밌게 읽다가 점점 그 흥이 깨어져 버렸다고나 할까.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이 인간들의 말로가 어떻게 될지 궁금한 사람들은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겠지만 읽는 도중 이내 역겨움을 느껴버린 나로서는 마지막까지 읽어 나가는 게 거북스러웠다. 재밌지만, 한편으론 거북해서, 바로 그 거북함이 안타까운 그런 소설이었다.

 그리고 작가의 치기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언젠가는 끝이 난다. 이런 사회 고발적인, 이런 자학적인, 이런 치열한 글 말이다. 물론, 이런 글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글을 쓰던 사람이 좀 순한 글을 쓰면 변절했다느니, 스타일이 변해서 싫다느니,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작가의 후작을 더 기다린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을 때 나오게 될 그의 글들을 기다린다. 어찌 됐건 그는 재밌는 이야기를 쓰는 이야기꾼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혼 지침서 (양장)
쑤퉁 지음, 김택규 옮김 / 아고라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중국소설은 처음일까? 뭔가 나도 모르게 읽은 작품이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중국소설임을

인식하고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이혼지침서라는 책은 소설집으로

'처첩성군', '이혼지침서', '등불 세 개' 이렇게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첩성군은 '첩' 이라는 걸 다룬 소설이었는데 나는 조선시대 후궁들을 생각하면서 읽었다.

실제로 본처는 본처라는 위엄만 남은 채 세 첩들을 대하고 있었고 둘째 부인은 그야말로

조선시대 후궁들 생각이 절로 날 만큼 간교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셋째 부인은 권력이니,

총애니 하는 것보다 자유를 갈구하는 듯 보였고, 이 작품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넷째 부인은 나머지 세 부인들처럼 무서운 여자이진 않았지만 결국엔 또 다른 의미의

무서운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우물. 이 시대엔 남자에겐 다른 여자가 허용되었지만,

여자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우물은 때로는 자살의 장소가 되었고, 때로는 타살의 장소가

되었다. 그렇게 우물의 존재로 인해, 자유롭고자 한 여자는 끝내 자신의 자유를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혼지침서는?

이번에는 반대이다. 남자가 자유롭고자 이혼을 하고자 하지만 결국 남자 또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처첩성군에서는 남자가 강자였고 여자가 약자였지만 이혼지침서에서는

여자가 강자가 되고 남자가 약자가 된다.

 

그렇다면 두 작품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여자를 혐오스럽고 지긋지긋하고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그리고 있다.

처첩성군에서 네 여자를 거느리고 사는 남자는 네 여자에게 강자로 존재하지만 그는 내심

그 여자들을 지겨워하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또한 이 여자들을 무서워 한다.

이혼지침서의 남자는 여자를 혐오스러워 한다. 자신의 아내임에도 혐오스러워 하고 그래서

이혼하고자 했지만 결국 이혼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아내에 대한 두려움보다

자신의 재혼 상대인 여자로부터 앞으로의 혐오를 엿봤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 혐오를 아내 대한 무서움으로 합리화하고 그렇게 이혼에 실패한 채로 살아가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두 작품 모두에서 여자는 그렇게 그려진다는 거다. 그것도 남자가 본 여자가 말이다.

의문이 아니 생길 수 없다. 중국남자들의 여성관은 이러한가? 아니면 쑤퉁이라는 작가의

여성관이 이러한가? 아니면 단지, 이 두 작품에서만 이렇게 그려진 것일 뿐인가?

앞으로 쑤퉁의 소설들이 속속 출간된다고 하니, 이 참에 쑤퉁의 여성관이든, 쑤퉁 작품

속의 여성관이든, 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이 책 말미에 쑤퉁을 두고 그는 누군가를 계몽하려는 자가 아니라 신랄한

이야기꾼일 뿐이라고 말한다. 공감한다. 그는 진정 이야기꾼이다. 이 책은 잡으면서부터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가고, 이야기 또한 매끄럽게 잘 넘어간다.그가 진짜 이야기꾼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는 그런 글이었다. 재밌고, 잘 읽히는. 진짜 이야기꾼의 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야기 속의 논리학
김득순 지음 / 새날 / 1993년 2월
평점 :
절판


논리학 공부를 하라는 충격적이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를 받은 후,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나..하고서 학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논리학 관련 책을

둘러본 후 선택한 책이다. 입문서로는 괜찮겠다, 싶었고, 역시나 괜찮았다.

옛날 우화 같은 이야기를 먼저 내세우고 그 후에 그 이야기 속에 적용된 논리를

집어내어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수식도 나오고 그림도 나오고

수학책 속의 명제 파트처럼 P는 Q이다 해 가면서 나오고 있지만 이런 부분이 조금

어렵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앞에 제시한 이야기에 비춰보아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입문서로서 꽤 괜찮았다는 것이다. 다른 논리학 책은 그 논리에 대한 내용설명에 있어

좀 더 깊이는 있겠지만 논리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좀 더 쉽게 다가서기엔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이 도움이 됐다.

 

그리고 지혜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는데...

다른 책에서는 지혜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 있을 법한 이야기도

이 책에 인용되고 있다. 지혜라는 큰 범위 속에 논리적이라는 것도 들어가는

것이겠지. 논리적 사고가 익숙해지고 숙달된다면 좀 더 지혜로운 방안을 짜 낼

수도 있는 걸까? 지혜의 종류 중에 논리에 의한 것도 있으니 그러하리라는 생각.

이렇게 생각하면 지식적인 측면에서도 논리는 도움이 되겠지만 좀 더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논리학을 공부하는 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처음엔 좀 충격받아서 시작한 논리공부지만, 이 책을 통해,

이젠 마음 좀 비우고 선한 마음으로 논리학을 바라보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논리학 입문서로는 참 괜찮은 책이라는 결론.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hopin 2007-01-0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골고루 읽으시는군효~
논리학책은 예전의 '논리야 놀자'가 쵝오~~~

skyceti 2007-01-05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딩 때 읽어서 기억도 안 난다는...ㅎㅎ
그때 유행이었죠~^^
 
달란트 이야기
이종선 지음 / 토네이도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덮으며...

두가지 상반된 생각을 했다.

 

이 책이 과연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책인가 하는 것과

진정으로 감동스럽고 해 볼만한 일이다 하는 생각.

 

과연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은 주인공의 설정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이미 이 책 속의 주인공은 너무 잘났다. 이미 많은 걸 가지고 있었고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앞만 보고 달리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이 과연 열패감만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등불이 되어 줄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그런 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그래, 이런 주인공이니 가능한

이야기이겠지, 하고서 자신의 자괴감만을 더 키워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감동적이라 함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그저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삶에 있어 가치가 있는 진리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 생활에 적용시킬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한 발작 물러서서 생각하면 그래, 그래야지, 하고 수긍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들인 것이다. 열가지 달란트를 종이에 적어다가 책상 앞에 붙여두고

그 열가지 달란트를 가슴에 새기어 잊지 않고 살아갈 때, 우리는 좀 더 우리가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긍정적인 기여를 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책은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와도 비교가 되는데, 폰더씨는 시간여행을 통해

위인이라 불리는 이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주인공의 가까운 인물, 즉, 곁에서 지켜 보았던 이들, 그리하여

이 주인공에게 내가 본 너의 달란트는 이것이다, 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이들과의 여행을

그리고 있다. 어머니, 연인, 은사, 직장 동료, 그리고 바로 자기 자신.

이들과의 여행을 통해서 주인공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달란트를 하나씩 깨달아 간다.

그렇게 볼 때, 이 책은 각 개인에 비춰 갖가지 스펙트럼을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정형화 된, 용서, 믿음, 책임, 등등..이런 것들을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지니고 있는 나만의 달란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이를 바탕으로 한 충고이기에

각 개인에 비춰서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주인공에게 내려진 열가지 달란트보다 주인공이 자신의 달란트를 깨달아가는 그 여정이

더 뜻깊은 것이라 할 수 있겠고, 그 과정이 독자들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것들이 먹혀 드는 사회였으면 한다.

어찌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나는 점점 그러한 희망들을 잃어가고 있다.

예전엔 나만 열심히 하면, 아무리 나 가진 것 없어도 진지한 열정으로 무엇이든

해 나간다면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이제는 중,고생들이 꿈을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괜히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온다. 아, 젠장, 나도 이제 끝난거야??

젠장, 젠장, 이전엔 내가 가진 것 없음을 정당화 했었다. 내가 가진 게 없어 내 힘이 부족하여

이루어내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내 부족함을 채워가고 있는 지금,

나는 그 후에도 과연 나의 설 자리가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아직은 두가지 마음이다. 이런 의구심에 시달리면서도 누가 이기나 해 보자는

심산. 모르겠다. 어쩌면 안될거라는 걸 이미 알면서도 해 보았다는 과정 없이는 내가 그 어떤

것도 인정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런 삽질을 하고 있는 건지도.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hopin 2006-12-31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삽질~~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