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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읽었다, 일식.
힘들었다, 일식.
처음엔 활자가 읽기 힘들었더랬다. 글을 읽으면 대충 무슨 상황인지 머릿속에 그려져야 하는데
그걸 그려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이 고비 넘기고 나니 읽기가 좀 수월해 지더라.
사전이야 애초부터 내 손에 들려 있었고. 이 스토리에 맞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맞는
문체를 선택해서 썼다는 일식은 그래서인지 단어가 참 어렵다. 원서가 워낙 어려운 문체이니
이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생전 처음 보는
단어도 있고 들어본 적은 있는데 정확한 뜻을 모르겠는 단어도 있었다. 이 책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일부러라도 미심쩍은 단어는 찾아가면서 읽었더랬다.
작가가 밝히는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참으로 흥미롭다. 20세기 이전에 단 한번 존재했던 시기,
육과 영이, 신과 세계가 공존할 수 있었던 시기이다. 이후, 플라톤주의와 종교개혁에 다시 신과
세계가 갈라지고 육에 대한 영의 우위가 확립됐다. 과도기, 라는 건 모든 게 공존하면서
그 모든 게 용서받을 수도 있고, 그 과도기 적 성격 때문에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핍박받고
매장당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수도사 니콜라는 이 과도기의 긍정적인 측면을,
또다른 수도사인 이단 심문관 자크는 이 과도기의 부정적은 측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연금술사는 자신의 페이스 대로 묵묵히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수행한다.
이 소설의 장중함과 현학적인 면은 마지막 장면을 위해 준비된 듯 한데, 마녀로 지목당한
안드로규노스(어지자지, 양성구유)를 화형시키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화형장으로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신비로운 장면을 목도하기도, 신비로운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니콜라는 안드로규노스와의 합일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안드로규노스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책에서 연금술사가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는 건 단 한번 있었는데 마녀사냥으로 인해
안드로규노스(어지자지, 양성구유)가 화형 당한 후, 안드로규노스의 육체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현자의 돌로 추정되는 황금덩어리 하나가 남아 있다. 바로 이 황금 덩어리를
줍는 장면인데 이로 인해 그는 그 자리에서 마녀로 지목되고 체포된다.(물론, 그 전에 누군가의
고발이 있었더랬다.) 그리고 그가 그리도 갖고 싶어 하던 그 돌을 자크가 빼앗게 되고 그가 잡아
쥔 돌은 황금 가루가 되어 흘러 내린다. 연금술사가 집어 들었던 돌은 자크의 손아귀에서
가루가 되어 흘러 내렸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좀 더 읽어가면 이 장면에 대한
수도사의 회상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는 데 그건 각자가 읽어보시라.
처음엔 이 책을 읽어 내리는 데 어려움이 있어서, 내가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한번 더 읽어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엔, 내가 굳이
찾아 읽으려 하지 않아도 삶의 어느 한 순간엔 다시 읽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가 어느 한 친구과 종교(기독교 내지는 하나님 내지는 이와 비슷한 종류의)이야기를 하던 끝에
'성자가 된 청소부'라는 책이 무작정 떠오르면서 이 책을 한번 더 읽어야겠다는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훗날, 일식을 한번 더 읽게 되면 난 또 어떤 걸 느끼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