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후, 일 년 후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이 책을 딱 5줄 읽고 반했다.
 

"베르나르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네온 불빛 때문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보이는 몇몇 손님의 눈길을 받으며 잠시 망설이다가, 계산 담당 여직원에게 다가갔다. 그는 호사스럽고, 당당하고, 몽상에 빠져 있다가 돈과 성냥갑들이 오고 갈 때 간간이 그 몽상에서 빠져나오는, 바의 계산 담당 여직원들을 좋아했다."

 

 딱 이 5줄만 읽고도 나는 이 작가가 좋았다.

 

 이 책은 통속적인 사랑이야기이다. 젊은이들에게 상냥한 노부부 역할을 하고 있는 알랭부부와 이들 부부의 조카 에두아르, 그의 맹목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아름다운 동시에 난폭한 베아트리스, 베아트리스의 욕망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의 양면을 간파한 졸리오, 사랑이 한달후, 일년후 시간이 흐를수록 변해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현재의 열정에 마주할 줄 아는 아름다운 조제, 그 조제를 사랑하는 조제의 닮은꼴인 베르나르, 그리고 조제의 연인인 젊은 의학도 자크, 그리고 베르나르의 아내 니콜.

 

 이 아홉남녀의 얽히고 섥힌 사랑이야기이지만 그렇게 질척거리진 않으니 보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아홉명이나 등장하는데 그 감정들이 너무나 질철거린다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의 감정이 정말 질척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통속적인 사랑이 질척거리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사강의 명확한 표현들 덕분이었다.

 

 예를들면, 사강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그들이 저지른 실수는 너무나 부조리했고 이상하리만큼 정직했다."

 

"그때 그는 베아트리스를 향한 자신의 열정이 그녀의 등에 붙박인 눈길로 요약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상징, 사람들은 그것을 스스로 만든다, 그것도 일이 잘 안돌아갈 때, 시기가 나쁠 때에."

 

 참으로 매력적인 문장이지만 동시에 작가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고서 짠~하고 내보이는 느낌이기도 하다. 두번째 문장의 상황에서 에두아르가 베아트리스의 등을 바라보는 모습만 묘사해 두었다면 독자들은 이 장면에서 앞으로 에두아르의 처지가 그 눈길로 요약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강은 친절하게도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바로 그렇게 요약된다고. 그래서 이 점이 아쉬웠냐고? 아니, 나는 독자의 상상력을 약간 제한했다 할지라도 이런 명확한, 그리고 당당한 그녀의 문장이 좋았다. 5줄 읽고 무작정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계속해서 읽은 그녀의 문장들은 내 직감이 맞았다고 확인해 주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상상력을 자극한다던지, 어떤건지는 알겠는데 모호한 무언가를 표현해 내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의 열정이 대도시의 한가운데에 만들어내는 이런 조그마한 구역들을 알고 있다."

 

 "젊음이 맹목에 자리를 내줄 때, 행복감은 그 사람을 뒤흔들고 그 사람의 삶을 정당화하며, 그 사람은 나중에 그 사실을 틀림없이 시인한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토록 명확하게 표현해 내고 있는 그녀의 당당한 표현력에 감탄할 것이다.

 

 이 책은 아홉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맨 마지막 장이지 싶다.

 

 "다음 월요일, 말리그라스 부부는 봄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평소에 열던 그들의 저녁 모임을 다시 열었다. 베르나르와 니콜, 당당하면서도 겸손한 태도를 하고 있는 베아트리스, 에두아르, 자크, 조제 등이 참석했다. 무척 즐거운 저녁이었다. 알랭 말리그라스는 조금 비틀거렸지만, 아무도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순간 베르나르가 조제 옆에 있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베르나르가 조제에게 뭐라고 질문하자 조제가 턱짓으로 파니의 후원을 받고 있는 젊은 음악가를 가리켰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그 음악가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조제가 속삭였다.

 "나 저 음악 알아요. 아주 아름답죠."

 베르나르가 말했다.

 "작년에 연주했던 것과 똑같군요. 당신 기억나요? 우리는 저기에 있었죠. 똑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저 음악가도 같은 곡을 연주하고 있었어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보죠. 하기야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조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실 다른 쪽 끄트머리에 있는 자크를 바라보았다.

 베르나르가 그녀의 시선을 뒤쫓았다.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해가 또 지나가겠죠......"

 "나도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잠시 힘을 주었다.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조제, 이건 말이 안 돼요. 우리 모두 무슨 짓을 한 거죠?......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조제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처버리게 돼요."

 

 

 이 책은 이렇게 끝난다.

베르나르와 조제는 한 때 데이트를 즐겼고 어쩌면 연인이 될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베르나르가 아닌 자크에게로 갔고 아내가 있는 베르나르는 그럼에도 조제를 사랑한다 말한다.

이런 베르나르와 조제. 일년이 지난 후, 조제는 베르나르와 함께 듣던 음악은 기억했으나 그 음악이 그와 함께 듣던 음악이라는 것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조제에게 베르나르는 의미를 잃어갔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크 또한 그녀에게 의미를 잃을 것이며 베르나르 또한 조제를 사랑하지 않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이 모든 상황 앞에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베르나르에게 조제는 상냥하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처버리게 돼요."

 

 나는 이런 조제가 좋다. 이미 사랑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퇴색되어갈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상황 앞에 혼란스러워 하지 않고 그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어차피 그러할 것이기에 사랑 앞에 냉소를 띠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 앞에 "당신이 필요해요"라며 당당하게 말한다. 미래에 퇴색될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임과 동시에 현재의 열정에 마주할 줄 아는 조제. 난 그런 조제가 좋았다. 그리고 또 한명의 매력적인 여자 베아트리스. 그녀에게는 '아름다운 동시에 난폭한'이라는 수식이 붙었다. 남자에게 더 인기가 있을 듯한 수식이지만 난 그녀의 악마적인 매력 또한 좋았다. 음..그러니까 난 조제와 같이 사랑의 무의미함 앞에 담담할 수 있음과 동시에 현재의 열정에 마주할 수 있음과 동시에 '아름다운 동시에 난폭'했으면 좋겠다. 조제가 수채화라면 베아트리스는 유화일 것이다. 이 둘을 융합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개선문이라는 책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개선문의 주인공은 라빅이라는 남자와 조앙이라는 여자인데 개선문을 읽으면서도 여러 구절들에 공감했던 것 같다. 그런데 개선문을 읽으면서는 조앙이라는 여자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내가 남자라면 조앙이라는 여자와 연애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캐릭터였던 반면, 남자의 캐릭터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한달후, 일년후'에서는 반대였다고 할까. 조제는 너무나 사랑스럽지만 베르나르와는 연애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두 책이 머릿속에 동시에 존재했던 이유는 아마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파리는 사랑하기에 적당한 도시인 것 같다.'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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