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 희랍어 원전 번역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단국대학교출판부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이 이야기는 테티스가 제우스의 무릎을 잡으면서 시작된다.
테티스가 무슨 연유에서 제우스의 무릎을 잡았는가 하니, 그녀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위해서였다.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를 모욕하고 그의 볼이 예쁜 브뤼세이스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분노했고 이 분노에 답하고자 테티스는 제우스의 무릎을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들의 시비에 신이 개입하여 어느 한 쪽의 명예를 드높여 주고자 하니, 이제 판이 제대로 벌어질 참이다.

 

 여기서 잠깐, 흔히 말하기를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남자이지만 그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은 여자라고, 일리아스에서는 그 원칙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우선 이 이야기의 큰 배경이 되고 있는 아카이아인들과 트로이아인들의 전쟁은 그 유명한 헬레나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드높여 주기 위한, 이 책 속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전쟁의 발단이 된 크뤼세이스 처녀. 이 처녀의 아버지가 아가멤논에게 재물을 받고 자신의 딸을 돌려 달라 간청했으나 아가멤논은 그를 모욕하며 이 소녀를 돌려주지 않았고, 이에 노인이 아폴론에게 기도하니 아카이아인들에게 화살이 빗발치게 된다. 아카이아인들은 아가멤논이 눈매가 고운 그 소녀를 돌려주기를 바라니, 아가멤논은 크뤼세이스를 돌려 보내고 그 대신 아킬레우스의 명예의 선물인 볼이 예븐 브뤼세이스를 데려 간 것이다.  이 브뤼세이스 소녀를 빼앗긴 아킬레우스는 분노하게 되고 이에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테티스가 제우스의 무릎을 잡으니, 오직 한 인간의 명예를 드높여 주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자, 테티스의 부탁에 제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제우스는 테티스와의 약속을 지킬 터.

그런데 이게 또 묘하다. 그냥 당장 아킬레우스에게 그럴 듯한 영광을 내려주면 될 것 같았지만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아카이아인들과 트로이아인들은 헬레네를 두고 메넬라오스와 파리스의 1:1 대결로 끝을 보고자 했다. 결과는 메넬라오스의 승리. 하지만 제우스의 계략에 의해, 트로이아인들은 맹약을 파기하게 된다. 이에 두 진영은 극력히 싸우게 되니, 아아, 이게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드높히는 방법이었던가. 각각의 신들이 각 진영에 자리해 각자의 아들 또는 친애하는 자의 편을 들며 엎치락 뒤치락하는 설전을 만들어가니, 이건 흡사 신들의 체스판에 인간들이 일개 말로 싸우고 있는 것만 같다. 트로이아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트로이아 인들에게 판세가 유리하도록 만들고서는 뒤돌아서서 아카이아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아카이아인들에게도 용기를 불어 넣어 둘이 극력히 맞붙에 한다. 그리고 그들끼리 회의 또는 몇몇의 의견일치, 자신의 의지 등에 의해 시나리오를 짜기도 한다. 자아, 누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누구를 죽이게 하라, 하지만 그 자는 바로 그 자리에도 누구에게 목숨을 읽게 되리라, 하는 식으로. 인간은 고작 체스말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여기서 인간들은 마냥 신의 체스말로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명예욕을 위해 신에게 기도한다. 그리고 그 기도에 신들은 응답을 해 주기도 하고 해 주지 않기도 한다. 어찌보면 인간들이 자신의 명예욕을 채우고자 신들을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인간들의 싸움으로 인하여 신들끼리도 서로 싸우곤 하지 않는가. 절대 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에 비해 본다면 확실히 그리스로마신화는 인간중심적인 시각인 것이다. 신의 우위를 인정하고는 있지만 신들의 행태를 봤을 때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까. 여하튼 이 전쟁은 신의 전쟁이자 인간의 전쟁으로, 신들의 체스판이자 인간들의 명예의전당으로 치닫고 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이 책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오직 한 사람의 명예를 드높히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걸 보면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것일까? 시나리오까지 짜 가며 인간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을 보았을 때, 인간의 존엄성, 인간존중은 없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존중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다. 어찌해서 그런가 하니, 흔히 엑스트라라고 불릴 법한 사람들, 즉, 시의 한 구절에 등장은 하는데 하필이면 등장하자마자 누구에게 죽었다, 이렇게 끝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어느 지역에서 온 누구인지, 아버지는 누구이며 어머니는 누구인지, 그의 가계는 어떻게 꾸려가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요즘 드라마처럼 회상씬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잠깐 스쳐가는 단역에 대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일일이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단역이 몇이나 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어쩌면 이 때문에 이 시의 분량이 더 늘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한가지, 수식어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이 책에서 아카이아 인들은 훌륭한 정강받이를 댄 아카이아 인들이고, 트로이아인들은 말을 길들이는 트로이아인들이다. 그리고 함성이 큰 누구, 고귀한 누구, 영광스런 누구 이런 식으로 칭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불린다는 것이다. 서로 상대편이라 해서, 적이라 해서 적을 폄하하는 수식을 붙이지 않는다. 아카이아인들에게나 트로이아인들에게나 아카이아인들은 훌륭한 정강받이를 댄 아카이아인이다. 그리고 아카이아인의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트로이아인조차 상대편 장수를 부를 때 고귀한 누구, 영광스런 누구, 하는 식으로 부른다. 적이라 해서 결코 나쁜 말을 붙여서 부르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적이지만 서로서로를 존중해 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수식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면, 이 글의 첫 부분에 무릎을 잡는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무릎을 잡는다는 간청한다는 뜻인데 이 정도는 지금에도 통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빰이 이쁜 누구, 볼이 예쁜 누구라고 한다면 여기서 빰이 이쁘다는 것은 어떤 것이고 볼이 예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빰이 예쁜 것은 혈색이 좋다, 피부가 좋다는 의미일까? 볼이 예쁘다는 것은 볼이 사과처럼 통통하고 귀엽다는 뜻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이 책 속에 종종 나오는 이런 수식들이 참 재밌게 느껴졌다. 그 옛날 이건 어떤 뜻이었을까?하는 생각도 해 보고 좋았다. 그리고 수식이 좀 투박하지만 귀엽다고나 할까. 참, 마냥 귀엽지만은 않다. 확실히 투박한 건 사실이지만. 특히 전장에서 죽음을 이야기 할 때 이게 만약 영화 속의 한 장면이었다면 공포라기 보단 좀 기괴한 느낌? 창이 입으로 들어가 이가 다 박살나고 머리통이 터지고 하여간 창이 박혀도 꼭 이상한 곳에 박혀서 상상하자면 너무 기괴한 모습이 되는 거. 하하, 참 묘사가 투박하구나 싶었다.

 

 여하튼, 대체 이게 몇천년 전인지 감도 안 잡힌다만, 그 시대의 이야기를 그 시대의 표현방식을 보고 있자니, 재밌고, 귀엽고, 궁금하고, 상상되고, 신선해서 좋았다. 표현방식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도, 현 시대에도 통용되는 지혜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으로서의 상식이랄까, 도리랄까 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교과서에서 보던 그 일리아드 맞는데 교과서에서 볼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서사시라고 해서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 같지만 조금 눈에 익으면 이내 재미를 느끼게 되니 한번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참, 그래서 아킬레우스는 어떻게 자신의 명예를 드높히게 됐을까?

답은,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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