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저놈에게 기억시켜 놓은 거라곤 그저 쫓고 사냥하고 죽이는 일뿐이지요. 저놈이 아는 게 그것뿐이라면 우리가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

사냥개, 로봇 사냥개,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닌 로봇 사냥개. 이를 두고 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키워드는 '부끄러움'과 '책임'이다.

옛 성현은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귀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부자들은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하라고 자식들을 가르쳤다. 시인은 살기 어려운 인생에서 시가 쉽게 씌어지는 것이 부끄럽다고 썼다.

제 앞가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부끄럽기로는 내가 최고다. 대체 나는 왜 읽는걸까? 이 소설은 책을 불태우는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호리는 죽는다. 개죽음이다. 이 개죽음을 개죽음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전호리의 육체가 아니라 전호리의 자아다. 그 자아가 바로 원숭이 왕이다. 전호리는 죽지만 원숭이 왕은 살아남는다. 육체는 죽어도 자아는 죽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죽고 그가 만든 괴물은 살아남았다.) 의미와 가치는 육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아를 위한 것이다. 육체는 의미와 가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아다. 육체의 개죽음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보려는 자아의 가련한 시도, 이것이 이 단편의 주제다. 개죽음은 전호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서 양주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 개죽음을 기록한 왕수초도 죽었다. 그리고 왕수초의 기록을 지키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 이소정과 그의 누이가 있다. 두 사람이 잘 살고 있다는 원숭이 왕의 말은 거짓말이다. 그래야 개죽음을 견딜 수 있다.


원숭이 왕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금서의 내용도 이야기로 되어 있을 것이다. 왕수초는 <양주십일기>를 쓰면서 그 수많은 죽음이 개죽음이 아닌 이유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의미와 가치는 이야기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 이야기는 물론 허구다. 모두 거짓이라서 허구가 아니라, 모두 사실일 수 없어서 허구다. 어떤 기록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을 수는 없다. 허구라서 의미 없고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허구일 때에만 의미와 가치가 발생한다. 아니, 의미와 가치는 허구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허구인 이야기를 만들고, 전파하고, 듣고, 믿는 이유다.


세상에 왕수초의 이야기나 원숭이 왕의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편의 이야기가 있다. 반대편은 바로 불의다. 불의는 상대에게 개죽음을 강요하기도 한다. 양편의 이야기들이 서로 경쟁한다. 시간이 흘러 왕수초의 이야기가 승리해 진실임을 인정받았듯이 전호리와 같은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도 승리해 진실로 승격할 것임을 작가 켄 리우는 믿는 듯하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사실 이 믿음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다. 우리는 이 믿음이 실현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특별히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란 이야기다.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다.


따라서 진실이 드러나기까지 걸리는 역사의 시간을 인간의 수명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것은 난센스다. 처음부터 역사는 인간의 죽음을 뛰어넘기 위한 이야기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이 소설집에서 펼쳐지는 진화라는 이야기도, 우주라는 이야기에도 해당한다. 역사와 진화와 우주의 시간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무의미할 만큼 작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무의미해 보이는 인간이 역사와 진화와 우주라는 이야기를 발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영원의 시간 동안 계속된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우리는 의미와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 물론 나의 이런 믿음도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는 지극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지만, 허무주의에는 빠질 수 없어서 이렇게 믿기로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사 몰래 책을 한 권 읽었다. 내가 부리는 집사는 책 꽤나 읽는 모양인데, 이 좋은 책을 감춰두고 저 혼자 읽었을 것을 생각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나는 고양이가 등장한다고 해서 덮어놓고 재미있다거나 작품성이 훌륭하다고 평하지 않는다. 또한 재미가 작품성을 보장하지 않고, 작품성이 재미를 담보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봐왔다. 이 소설은 고양이를 등장시켜 재미와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쥐를 잡았으니 칭찬할 만하다. 소설 속 고양이의 말투를 흉내 내어 몇 자 적는다.


소설은 고양이가 인간 족속들을 관찰한 기록이다. 주인공 구샤미라는 자는 명색이 학교 선생인데 책에 침을 흘리며 낮잠 자는 것을 일삼고, 식욕을 참지 못해 먹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위인이다. 메이테이라는 그의 친구는 배울 만큼 배우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식당에 가서 메뉴에도 없는 요리를 주문해 종업원을 골려먹는 자이다. 유유상종이다. 구샤미, 메이테이, 간게쓰 일당이 한데 모여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신소리를 주고받으며 저희들끼리 키득거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시트콤이다. 사실 인간 족속들의 한심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뻔한 것을 가지고 이토록 유쾌한 소설을 써냈다는 점이 바로 작가 양반의 역량이라 할 것이다. 게다가 서른여덟 나이에 친구의 권유로 처음으로 한번 써본 소설이라고 하니, 작가 양반은 그나마 덜 한심한 자라 하겠다.


나는 사려 깊고 공정한 고양이임을 자처하는 바, 인간 족속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소설 속 고양이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인간 세계의 일원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이 고양이는 고양이의 기본 임무인 쥐잡기를 하지 못한다. 모처럼 큰맘 먹고 부엌에서 쥐새끼를 노리는데, 쥐를 잡기는커녕 안주인에게 떡국 먹고 춤이나 춘다는 조롱을 듣는다. 이 고양이는 나만큼이나 유식하다. 동서양의 문학과 예술과 역사를 망라하는 넓고 얕은 지식이 지적 대화를 가능하게 하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대화 상대가 없다. 인간 족속들이 고양이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고, 말상대가 될 만한 동족은 곁에 없다. 구샤미 일당의 대화가 구샤미의 집 밖으로 퍼져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고양이의 독백도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고 만다.


소설의 절반은 고양이의 독백이고 나머지 절반은 고양이가 엿들은 인간 족속들의 대화이니,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쓸데없고 한심한 말들의 연속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쓸데없고 한심한 말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무엇보다 웃기다. 특별한 줄거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라서 집사가 속 썩일 때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읽으면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제격일 것 같다. 물론 웃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작가 양반의 당대 일본 사회를 향한 비판적 시각과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볼 때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쓸쓸함이 담겨있다. 독서가 여기에 이르면 쓸데없고 한심하던 말들이 조금은 다르게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이름이 없다’고 하지 않고, ‘이름은 아직 없다’고 했다. ‘아직’이라는 부사에 앞으로 이름이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과 소망이 담겨있다. 이름을 불러주는 존재는 나의 말을 들어주는 존재, 즉 나를 알아주는 존재다. 나도 고양이다. 이름은 이미 있다. 내 이름을 불러줄 집사는 아직 귀가하지 않고 있는데, 어김없이 봄은 또 오고 있다. 바야흐로 만물이 이름을 불러달라며 서로를 유혹하는 계절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가 내게로 와 꽃으로 피어난다고 어느 시인은 썼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울며 무서리가 내린다고 또 다른 시인은 썼다.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울며 무서리가 내린 내력에 귀 기울이지 않고서는 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줄 수 없을 것이다. 이 봄,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다면,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같은 책은 굳이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유명 작가의 대표작을 소개하는 이런 글은 사족과 같음을 잘 알고 있다. 독후감으로 나의 선배이자 조상을 기리는 또 다른 사족을 쓰고 있다. 이름 없는 고양이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제목은 모묘전(某猫傳)이라 하고, 그 끝은 이렇게 맺을 것이다. 이름 없이 살다가 허망하게 죽었으나, 주인의 말을 들어주었으니 고맙고 기특하다. 두 눈은 부릅떴으되, 두 귀는 닫고 살아왔음을 뒤늦게 깨닫고 이 전을 짓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을 제외한 다른 책은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자라도 만나본 사람보다 만나지 못한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독서가의 경우도 그러하다. 우리 삶의 의미는 어쩌면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있는지도 모른다.


2. 결국에는 체력이다. 연애도 독서도 몸이 하는 일이다. 우리는 몸뚱이를 갖고 태어나 그 몸뚱이를 벗어날 수 없는 가여운 동물이다.


3.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때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고, 그때 그 책을 다시 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전에 좋았던 사람이 또 좋은 경우는 없어도, 전에 별로였던 책이 좋은 경우는 많다. 그 이유를 연구해볼 만하다.


4. 하는 것들만 한다. 물론 '하는 것들'에 들지 않는 것들도 한다. 그러나 평균에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 않는 삶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삶은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을 것이다. 이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씁쓸하게도 얼마간의 돈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제 도입 검토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두 책을 읽고 나면 굳이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라는 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팩트는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허균은 프랑스대혁명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랄까? <파격의 고전>에서는 내용에 집중하여 이런 내용의 작품을 허균이 썼을 리 없다는 의심을 적고 있다면, 이윤석의 책에서는 조선시대 한글소설의 발생과 유통과정, 국문학 연구 초창기의 연구행태를 추적하며 제목처럼 그 의심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설사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저자가 대학원 시절에 담당교수에게 들은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허균을 <홍길동전>의 작자로 만들어 우리는 대체 어떤 국익을 얻었는가? 한글소설의 출현이 200년 쯤 앞당겨지고, 다른 한글 고소설들과 달리 작자가 알려진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떤 국익을 창출하는가? 

국문학사를 이렇게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쓰다 보니, 나는 고소설이 발전해서 신소설이 되고 신소설이 발전해서 근대소설이 된다는 허무맹랑한 국문학사를 배워야했던 것이다. 좀 늦으면 어떠한가? 나라 밖의 영향을 받았으면 또 어떠한가? 적어도 학문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제 나라 사랑은 그만하고, 진리를 사랑했으면 좋겠다. 다정도 병이라고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