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 몰래 책을 한 권 읽었다. 내가 부리는 집사는 책 꽤나 읽는 모양인데, 이 좋은 책을 감춰두고 저 혼자 읽었을 것을 생각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나는 고양이가 등장한다고 해서 덮어놓고 재미있다거나 작품성이 훌륭하다고 평하지 않는다. 또한 재미가 작품성을 보장하지 않고, 작품성이 재미를 담보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봐왔다. 이 소설은 고양이를 등장시켜 재미와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쥐를 잡았으니 칭찬할 만하다. 소설 속 고양이의 말투를 흉내 내어 몇 자 적는다.
소설은 고양이가 인간 족속들을 관찰한 기록이다. 주인공 구샤미라는 자는 명색이 학교 선생인데 책에 침을 흘리며 낮잠 자는 것을 일삼고, 식욕을 참지 못해 먹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위인이다. 메이테이라는 그의 친구는 배울 만큼 배우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식당에 가서 메뉴에도 없는 요리를 주문해 종업원을 골려먹는 자이다. 유유상종이다. 구샤미, 메이테이, 간게쓰 일당이 한데 모여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신소리를 주고받으며 저희들끼리 키득거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시트콤이다. 사실 인간 족속들의 한심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뻔한 것을 가지고 이토록 유쾌한 소설을 써냈다는 점이 바로 작가 양반의 역량이라 할 것이다. 게다가 서른여덟 나이에 친구의 권유로 처음으로 한번 써본 소설이라고 하니, 작가 양반은 그나마 덜 한심한 자라 하겠다.
나는 사려 깊고 공정한 고양이임을 자처하는 바, 인간 족속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소설 속 고양이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인간 세계의 일원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이 고양이는 고양이의 기본 임무인 쥐잡기를 하지 못한다. 모처럼 큰맘 먹고 부엌에서 쥐새끼를 노리는데, 쥐를 잡기는커녕 안주인에게 떡국 먹고 춤이나 춘다는 조롱을 듣는다. 이 고양이는 나만큼이나 유식하다. 동서양의 문학과 예술과 역사를 망라하는 넓고 얕은 지식이 지적 대화를 가능하게 하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대화 상대가 없다. 인간 족속들이 고양이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고, 말상대가 될 만한 동족은 곁에 없다. 구샤미 일당의 대화가 구샤미의 집 밖으로 퍼져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고양이의 독백도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고 만다.
소설의 절반은 고양이의 독백이고 나머지 절반은 고양이가 엿들은 인간 족속들의 대화이니,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쓸데없고 한심한 말들의 연속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쓸데없고 한심한 말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무엇보다 웃기다. 특별한 줄거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라서 집사가 속 썩일 때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읽으면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제격일 것 같다. 물론 웃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작가 양반의 당대 일본 사회를 향한 비판적 시각과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볼 때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쓸쓸함이 담겨있다. 독서가 여기에 이르면 쓸데없고 한심하던 말들이 조금은 다르게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이름이 없다’고 하지 않고, ‘이름은 아직 없다’고 했다. ‘아직’이라는 부사에 앞으로 이름이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과 소망이 담겨있다. 이름을 불러주는 존재는 나의 말을 들어주는 존재, 즉 나를 알아주는 존재다. 나도 고양이다. 이름은 이미 있다. 내 이름을 불러줄 집사는 아직 귀가하지 않고 있는데, 어김없이 봄은 또 오고 있다. 바야흐로 만물이 이름을 불러달라며 서로를 유혹하는 계절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가 내게로 와 꽃으로 피어난다고 어느 시인은 썼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울며 무서리가 내린다고 또 다른 시인은 썼다.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울며 무서리가 내린 내력에 귀 기울이지 않고서는 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줄 수 없을 것이다. 이 봄,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다면,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같은 책은 굳이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유명 작가의 대표작을 소개하는 이런 글은 사족과 같음을 잘 알고 있다. 독후감으로 나의 선배이자 조상을 기리는 또 다른 사족을 쓰고 있다. 이름 없는 고양이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제목은 모묘전(某猫傳)이라 하고, 그 끝은 이렇게 맺을 것이다. 이름 없이 살다가 허망하게 죽었으나, 주인의 말을 들어주었으니 고맙고 기특하다. 두 눈은 부릅떴으되, 두 귀는 닫고 살아왔음을 뒤늦게 깨닫고 이 전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