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가수 이소라가 노래를 하고 있다. 내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이 사태를 뭐라 표현할지 몰라 나는 며칠을 고민했다. 너도 알 것이다. 문제는 이소라의 가창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듣는 나의 마음인 것이다. 이소라의 (노래가 아닌) 가창에는 삶의 희로애락을 뛰어넘는 어떤 것이 있는 것이 분명한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환장할 노릇이다. 아름답다거나 슬프다거나 감동을 준다거나 하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그녀의 열성적인 팬을 자처하는 내가 그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반칙이라고, 언젠가 너는 말했다. 네 말이 옳다. 그러나 그녀의 가창을 보고 듣고서 어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비루한 언어일지언정 나는 기어이 한마디 하려 한다.


언젠가 너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녀의 가창은 김훈의 문장과 닮았다. 한마디로 완전하다. 완전하다 함은 만점의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스스로 족하다는 뜻이다. 더하거나 뺄 것 없이 그 자체로 족하다. 어느 한 군데 손을 대면 조금 넘치거나 모자라는 것을 넘어서 아예 망쳐버리게 된다. 이미 완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아도 좋다는 말을 감히 함부로 하기가 겁난다. 나의 좋다는 말이 오히려 맑고 깨끗한 구슬에 흠을 낼 것만 같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소라의 가창에 대한 대중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것으로 짐작한다. 이소라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 내가 응원하는 연예인이 아닌 것이다. 정지용의 시를 인용하자면 이소라의 가창과 그것을 보고 듣는 나 사이에는 유리창이 놓여 있다. 보고 들을 수는 있으나, 만질 수는 없다. 대학시절 너와 함께 공부했던 김춘수 작가론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이소라의 가창 앞에서 섭섭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나는 만질 수 없어도, 나를 섭섭하게 해도 이소라의 가창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만질 수 없기 때문에, 나를 섭섭하게 하기 때문에 그녀의 가창을 좋아한다. 그녀의 노래는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그녀의 가창은 나를 극도의 무력감과 허무감에 빠지게 한다. 내가 그 아름다움을 절대 흉내낼 수 없다는 무력감, 그 아름다움에 대한 어떤 말도 무의미하다는 허무감, 나는 그것이 좋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별난 구석이 좀 있다. 나는 나 없어도 자족한 그녀의 가창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을 가졌노라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가창을 보고 들을 때 일어나는 내 마음의 사태를 기술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이소라 말고도 가수가 많다. 네가 좋아하는 김광석은 어떤가. 끊었던 술 한 잔, 피울 줄 모르는 담배 한 모금이 생각나는 노래를 한다. 물론 나도 좋아한다. 박혜경의 목소리는 청량한 바람 같으면서도, 누군가의 눈물을 통과했는지 습해서 좋다.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얄밉게 부르는 심수봉의 가창도 좋고, 무심한 듯 뱉어놓는 양희은의 가창도 좋다.


그렇다면 나는 왜 많고 많은 가수 중에서 이소라를 편애하는가. 나는 고민 끝에 어쩌면 이것은 나의 비겁함 때문은 아닐까 하는 좀 우울한 결론에 이르렀다. 처음부터 나는 가까이 두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나는 곁에서 함께 호흡하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세하게 밝히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너는 잘 알 것이다. 요즘 외로움과 그리움이란 감정의 정체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감정을 배우는 데에도 때가 있다면 나는 많이 늦은 셈이다. 일종의 늦바람이다. 바야흐로 4월, 찬란한 봄이다. 철없을 적엔 가을이 좋았는데, 나이 들수록 봄이 좋아진다. 그녀의 이름을 검색하다 잊고 있던 그녀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마치 내게 하는 말 같다. 


피어라 피어

피는 게 네 일인걸 

지는 건 걱정일랑 말고 

피어라 피어


나는 여전히 두려운가 보다. 아직도 '저만치 혼자서' 핀 꽃이 좋으니 말이다. 너에게 만큼은 이 봄이 '이만치 함께' 피는 꽃이 되기를 바란다. 두려움 없이 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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