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이정철 지음 / 너머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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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흥미롭지 않은 것을 다루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흥미로운 책이 되었다. 서두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동서분당에서 기축옥사에 이르는 시간 동안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추적하는 책이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결코 쉽지 않았을 작업이다. 흥미롭지 않다고 한 것은 저자의 작업이 선악의 이분법이 아닌 각 정파와 논객들이 저마다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성을 지르는 등장인물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는 사극의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목에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넣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당시의 정치 현안과 인물 사이의 관계가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비전문가로서 따라가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하나의 사건이 종결되었나 싶으면 비슷한 성격의 다른 사건이 꼬리를 물었고, 인물들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또 다른 인물들이 등장해 그 관계가 얽히고설켰다. 하지만 나는 당쟁을 이토록 건조하게 다룬 글을 처음 보기에 이 책을 흥미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관심을 끌었던 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사림의 분열을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이 주도했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그 과정에 국왕 선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책에 따르면 조선 정치의 두 축은 대신과 언관이다. 대신은 국정의 현안을 해결하는 것이 임무이고, 언관은 관리의 부패를 막는 것이 주 임무라고 되어있다. 사실 내게는 언관이 대신과 나란히 정치운영의 축으로 언급되는 것마저도 생경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르면 언관이 스스로의 권위를 대신의 그것보다 위에 두었다는 대목에서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의 권위가 추락했다는 것을 대신의 임무인 국정현안 해결이 불가능해졌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신하들이 분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분열을 이끈 담론은 국정현안이 아니라, 서로의 부패혐의에 대한 탄핵이다. 이것이 파국으로 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


거칠게 말해서 언관은 정책이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집단이다. 오늘날로 치면 민정수석실이나, 감사원, 검찰청의 임무 정도가 될 것이다. 조정의 인사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부패하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따라서 그들이 하는 일의 최후는 늘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언관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언관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그러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 책에 설명된 그들 집단의 의사결정 방법은 또 어떠한가? 사헌부와 사간원은 전원합의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했다. 당연히 전원합의에 이르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때마다 피혐과 처치라는 (내가 보기에) 극단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결국 언관이 누군가를 탄핵하면, 탄핵을 당한 관리, 그를 탄핵한 언관, 그 언관의 탄핵에 동조한 언관과 반대한 언관 중 누군가는 자리를 떠나야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상황이 악화될 경우 홍문관 관원까지도 옷을 벗어야 했다. 한마디로 누군가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끝나는 게임이다. 이 역시 개개인의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결정 시스템의 문제이다.


이렇듯 언관의 임무와 의사결정 방식은 언제나 'All or Nothing'이었다. 정책 현안이라면 토론을 통해 조정하고 양보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인사문제는 쓰지 않으면 버리는 것뿐이다. 거기에 언관들의 피혐과 처치는 심하게 말해서 함께 일할 수 없는 사람을 합법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언관의 지위가 대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넘어서 대신의 권위를 넘어섰다는 점이었고, 이런 상황을 통제해야할 국왕의 힘이 약했다는 점이었다. 대신의 권위의 부재는 국정공백의 다름 아니고, 왕권이 약하다는 말은 브레이크가 없다는 말과 같다. 이러니 선조 재임 초 사림이 분열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정책을 두고 싸우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으며, 그 싸움을 그만두고 싶어도 쉽게 그만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상대방의 비리혐의(그마저도 대개는 과거의 혐의)를 두고 싸우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부패한 구세력이 앞선 시대를 망쳐놓았다는 진단과 그들에 의해 선배 사림이 도륙을 당했던 뼈아픈 기억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시기 사림이 놓인 정치 지형 자체일 것이다.


언관이 속한 사헌부, 사간원에 홍문관을 더해 삼사라고 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라면 중앙정치에 사림이 진출하고 삼사의 기능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대부터다. 동서분당의 시점에서 볼 때 이미 오래 진행되어 온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사림이 스스로 만든 시스템의 함정에 빠지는 일종의 자승자박을 본다. 삼사를 장악한 사림이 부패한 구세력과 한판 겨룬다. 물론 많은 피를 흘렸지만 사림은 승자가 된다. 이제 삼사의 사림이 그 칼을 내부로 향할 수밖에 없게 된 형국, 그 형국에서 분당과 당쟁은 필연이지 않았을까? 구세력이 몰락했다고 해서 삼사의 관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더구나 스스로 그 권위가 대신을 능가한다고 여기는 그들이 말이다. 이 대목에서 국정현안을 주도할 대신의 권위의 부재와 약한 왕권이 아쉬움(이것은 추후의 비극을 알고 있는 나의 현재적 평가이자 감정이다.)으로 남는다. 물론 이 역시 사림의 업보라고 할 수 있다. 사림은 부패한 선배 대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사림을 포함한) 사대부들 전체는 국왕을 조선의 단독 주권자로 여기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선조의 경우 방계라는 콤플렉스와 인순왕후의 그늘, 세자 수업을 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점 등을 생각하면, 동서분당이 이루어진 재임 초반에 이렇다 할 정치를 하지 못한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선조가 재임 초부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개혁이든 수구든) 국정운영에 임했다면 사림이 분열하고 비정상적인 당쟁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을까? 이것은 아마도 어리석은 가정일 것이다. 선조 이후의 군주들은 모두 붕당을 혁파하지 못했고, 결국 그것에 휘둘리거나 이용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중국이라는 거대 문명의 지척에서 좋든 싫든 그 영향을 피할 수 없었던 한반도처럼, 성리학적 명분론으로 똘똘 뭉친 사림이라는 신세력을 받아들인 조선의 중앙정치가 분열과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어쩌면 같은 운명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과정에서 민생이라는 현안이 외면된 것이 아쉽고, (먼 훗날의 일이지만) 인조반정이나 세도정치처럼 왕권이 어이없이 추락한 것이 놀라울 뿐이다.


여기서 저자의 결론인 '도덕적 확신'에 대해 반론 아닌 반론을 제기해야겠다. '도덕적 확신'이 사림의 분열과 대립을 증폭했다는 저자의 진단에 나는 동의한다. 저자는 선조 초의 사림을 '시비와 원칙에 민감한 젊고 비타협적인 지식인들'이라고 평했다. 이 역시 동의한다. 그런데 이런 인간형이 과연 조선의 선조 대에만 존재했는가? 이러한 인간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선조 대에 동서분당이 되었고, 그 이후의 당쟁이 기형적인 모습으로 전개되었을까? 다른 인간형의 무리가 집권했다면 선조 대에 분당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집권했다 하더라도 정치의 중심은 이미 대신이 아니라 언관이었고, 언관이 만들어내는 담론은 국정현안이 아니라 부패한 상대에 대한 탄핵이었다. 탄핵안 처리 역시 피혐과 처치라는 의사결정 방법이 고착화되어 있었으며, 국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에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는 것뿐이었다.


힘들게 이 문제를 파고든 저자가 '도덕적 확신'이라는 개인적 신념의 차원에서 한걸음 더 들어가지 않은 것이 아쉽기만 하다. 아니, 저자의 작업으로 당시의 구조적 문제가 낱낱이 드러났음에도 결론에서 명확하게 언급해주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말해야겠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도덕적 확신'이라는 답은 왠지 문제의 성격 자체를 개인 차원으로 변질시키는 것 같아 수긍하기 어렵다. 나는 역사와 정치를 모르기에 조심스럽지만, 역사적 사건은 대개 인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믿기에 그러하다. 사림의 '도덕적 확신'이 어떤 정치 구조를 만들었다면, 반대로 그 구조가 사림의 정치 행위를 어떤 식으로든 구속했을 터이다. 그것이 규명되지 않았기에 나는 저자의 물음을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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