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생각해보면 대학시절 가장 잘 한 짓은 전국으로 여행을 다닌 일이었다.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여행의 가치를 논하거나, 여행의 목적을 밝히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나에게 여행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 자체로 찬란하기 때문이다. 여행은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여러 이유로 여행을 떠나지 못 한지 십 년이 넘었다. 어쩌면 여행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며칠 전 불면의 밤에 그동안 다녀왔던 곳과 미처 가보지 못 했던 곳들 중에서 12경을 선정해봤다. 제목을 붙이자면 '내 마음대로 고른 혼자 보기 좋은 12경'쯤 되겠다. 혼자 놀기 좋아하는 성격, 역사에 대한 작은 관심,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답사여행의 길잡이>라는 책 덕분에 나의 여행지는 주로 답사지가 선택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여행을 답사라고 부르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여행이든 답사든 다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3월 - 순천 조계산

나의 여행은 1월이 아니라 새봄 3월에 시작한다. 따로 봄꽃 구경을 갈 일은 없겠지만, 순천 조계산이라면 좋다. 조계산에 선암사와 송광사가 있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단연 선암사다. 선암사는 해우소뿐 아니라 볼거리가 많은데, 특히 진입로가 좋다. 마치 외부세계와 단절된 어떤 별천지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주차장을 지나면 키 큰 나무들이 있는데, 죽는다면 이곳에서 죽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을 해봤다. 그때는 어렸고, 지금은 나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간다면 조계산을 오르며 죽음보다는 봄을 생각하고 싶다. 조계산은 봄이 가장 먼저 오는 곳이라고 한다.


4월 - 창녕 관룡사

나의 12경에 창녕이라는 소도시가 포함된 것은 그곳에 관룡사가 있기 때문이고, 관룡사라는 작은 절이 포함된 것은 그곳에 용선대가 있기 때문이다. 관룡사에서 조금만 산을 오르면 부처님 한 분이 앉아계신데, 바로 용선대다. 이곳에 부처님을 모신 사람들의 불심이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겠지만, 부처님과 함께 바라보는 경치는 정말 일품이다. 근처에 숙소를 잡고 이곳에서 해맞이를 해도 좋을 것이다. 화왕산과 관룡산이 철쭉과 진달래로 유명하다기에 4월에 배치했다. 물론 해맞이가 아니어도 좋고, 꽃이 피지 않아도 좋다.


5월 - 고창

아직 가보지 못 했기에 어느 한 곳을 꼽지 못 한다. 고창을 여행하게 되면 바쁠 것 같다. 그 유명한 선운사 동백꽃은 운이 좋으면 5월 초까지 볼 수 있다고 하고, 신록의 계절과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고인돌이라는 무덤도 있다. 물론 고창읍성과 운곡습지도 들러야 한다. 그리고 고창에는 청보리밭이 있다. 고창이 5월의 여행지인 이유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고, 내가 여러 여행지들 중에서 가장 기대하는 곳이기도 하다. 넓고 푸른 보리밭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한 번 흘려보고 싶은데, 아직 보지 못 한 곳이라서 가능한 유치한 상상인 셈이다.


6월 - 부안 변산반도

변산반도에서는 먼저 내소사를 보아야 한다. 진입로의 전나무 숲길은 청량하고, 대웅전 꽃창살은 어여쁘다. 꽃창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세월이 쌓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된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주름 같기도 하고, 오래된 헌책 같기도 하다. 내소사를 보고나서 변산을 오르는 것도 좋다. 큰 힘 들이지 않고, 폭포와 호수와 숲과 기암을 모두 볼 수 있다. 코앞이 바다니 그야말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여행지라고 할 수 있다. 단체여행은 질색이지만, 이곳만큼은 누군가 함께 해도 좋다.



7월 - 단양 온달산성

어쩌다 보니 온달산성을 7월에 넣게 되었다. 여름에 산성을 오르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오르는 길이 아주 짧고, 일단 오르고 나면 가슴이 절로 시원해지는 풍광이 기다리고 있다. 유홍준 선생이 전쟁을 위해 쌓은 것인지 후대의 답사객을 위해 쌓은 것인지 모를 정도라고 극찬했던 답사지가 바로 이곳이다. 온달산성에 올라 남한강 물줄기와 소백산맥을 바라보면 과연 그런 평을 할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감동을 배가시키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산성 밑에 있는 온달동굴을 먼저 보고 올라가는 것이다. 역시 나와는 맞지 않는 곳이었다.


8월 - 안동 병산서원

안동 여행에서 가장 큰 실수는 병산서원을 찾지 않은 것이었다. 하회마을 입구에서 병산서원까지 걷는 길도 좋다던데, 당시에 하회마을을 찾았으면서도 왜 병산서원에 들를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 병산서원에 대해서는 서원으로서 갖는 역사적 의미나, 서애 류성룡의 업적과 생애, 건축학적 아름다움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진에 담긴 병산서원 주변 풍광에 반했을 뿐이다. 만대루에 오르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곳에서 하루 종일 병산을 바라보다 와야겠다. 배롱나무 꽃이 핀다고 해서 8월 여행지로 꼽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곳이다.


9월 - 합천 영암사터

나는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사진을 배우지 않은 것과,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던 곳이 바로 영암사터다. 한마디로 숨이 턱 막히는 경관이고, 이렇게 밖에 쓸 수 없는 나의 글이 비루하게 느껴지는 경관이다. 이름처럼 전각은 없고 터만 남은 곳이다. 그러나 황매산을 배경으로 서있는 쌍사자석등을 감상하기에는 그것이 오히려 더 좋을 지도 모르겠다. 황매산 철쭉이 유명하다기에 일부러 봄을 피해 배정했다. 폐사지는 혼자 조용히 다녀와야 제맛인 법이다. 발굴과 복원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찾았을 때 혹시 아쉬움이 생길까 걱정이다.


10월 - 청송 주왕산과 주산지

고창과 함께 꼭 가볼 곳으로 벼르고 있는 곳이 바로 청송이다. 청송에는 주왕산과 주산지가 있기 때문이다. 주왕산은 산행이 쉬우면서도 단풍과 기암절벽이 일품이라고 하고, 주산지는 그 빼어난 경치가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진 곳이다. 주산지의 새벽 물안개는 사진만으로도 반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무더위가 물러갔다 싶더니 어느덧 10월이 코앞이다. 이번 가을에는 주왕산의 단풍과 주산지의 물안개를 보고 싶다. 



11월 - 청도 운문사

11월은 마땅히 운문사의 몫이다. 내소사가 봄날의 따뜻한 햇살이고, 부석사가 가을 저녁의 장엄한 해넘이라면 운문사는 초겨울 새벽, 풀잎에 맺힌 이슬이다. 낙엽 떨어지는 늦가을도 아니고, 눈이 내리는 한겨울도 아니다. 반드시 초겨울이어야 한다. 운문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수도 도량이다. 편견 때문이었을까? '처연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곳이었다. 일정을 맞추지 못 해 어두워진 다음에 도착한 운문사 입구에서 들리던 법고 소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운문사 가는 길에 보이는 청도의 산 능선은 덤이다. 내가 보았던 것 중에서 제일 예쁜 능선이었다.


12월 - 괴산 화양구곡

12월과 1월의 여행지는 눈 속에 은신하기 좋은 곳을 골랐다. 화양구곡이 12월인 이유는 '중화의 볕'이라는 시대착오적 이름이 붙은 곳에서 새해를 시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전에 화양동을 한여름에 찾았을 때는 더위에 지치고, 피서객에 치였다. 그래서 화양구곡 산책로를 걸으면서 눈이 쌓인 화양동을 다시 찾으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화양구곡은 우암 송시열과 인연이 깊은 곳인데, 청천에서 우암 묘소를 먼저 보고 찾아도 좋다. 물론 그 경치만 보아도 좋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화양동은 설국이 되어 있을 것이다.


1월 - 담양 소쇄원

소쇄원은 인공정원이지만 그 어느 여행지보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다. 인공과 자연이 어울려서 정원의 경계를 분명치 않게 만든다고들 한다. 어디까지가 정원이고, 어디까지가 자연인지 모를 곳이니, 삶이 곧 여행이고, 여행이 곧 삶인 사람에게는 최고의 여행지가 될 것 같다. 소쇄원은 그 태생부터가 몸을 숨기기 위한 곳이다. 함박눈이 펄펄 쏟아지는 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소쇄원에 들어가 며칠 숨고 싶다.



2월 - 여주 고달사터

폐사지를 여행하기에는 2월만큼 좋은 때가 없을 듯하다. 때는 뒤숭숭하고, 날씨는 스산하다. 폐사지와 딱 맞아떨어지는 분위기다. 경주의 감은사터, 익산의 미륵사터, 보령의 성주사터, 그리고 원주의 여러 폐사지들도 좋지만 여주 고달사터를 선택했다. 2월의 그것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때문이다. 합천 영암사터는 강렬한 인상의 그림을 한 폭 보여주지만, 고달사터는 그렇지 않다. 분위기를 느낄 뿐이다. 그 분위기는 글로 쓰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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