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뽀해 주는 사람한테 옮은 거 아냐?" 작년 11월이었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사서 집에 가는 길에 마침 전화를 건 친구가 입술 주위와 접촉성 피부염이라는 말을 듣고 나를 놀렸다. 누군가와 '접촉'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서 나는 좀 억울했다. 뽀뽀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한테 옮은 거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6개월 만에 피부과에 다시 방문했다. 예약을 하지 않아서 오래 기다려야 한단다. 그럴 줄 알고 책을 한 권 들고 갔다. 교수처럼 문학 읽기. 옆에 대기 환자도 많은데 하필이면 '문학에서의 섹스'라는 장을 읽을 차례다. 다행히 내 책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 계단이 성교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남들 다 아는 비밀을 뒤늦게 알게 되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6개월 전처럼 이번에도 좀 억울했다. 그러고 보니 20대 중반까지 나는 계단에서 많이 헤맸다. 꿈 얘기다. 배경은 대개 학교나 친척 집이었다. 계단이 중간에 끊어져 오도가도 못 하거나, 문을 열면 끝도 보이지 않는 좁은 계단이 나타나 어리둥절하거나, 익숙한 계단을 기껏 올랐더니 전혀 엉뚱한 곳에 도착하거나.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많이 꾸었던 '꿈의 해석'이 그렇다는 말이지, 제기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프로이트 이론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건 너무 정확하지 않은가? 젠장.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악몽에서 깬 듯 놀라서 창구로 갔더니 안에서 앉아 기다리란다. 그래 기다린다. 어디 도망 안 간다. 뛰어봤자 프로이트 선생의 손바닥이겠지. 의사를 만나는 데 한 시간 가량 걸렸다. 입술 주위는 많이 좋아졌는데, 이번에는 양쪽 볼이 말썽이다. 전에 처방받은 연고를 발라도 별 효과가 없다. 의사는 쓱 보더니 뭐라고 병명을 말한다.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책이나 컴퓨터만 들여다보지 말고,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야 낫는데요. 의사는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고 알려주는 것처럼 말한다. 그 말이 자꾸 걸려서 진단명을 제대로 듣지도 못 했다. 잠을 푹 자라는 말도, 스트레스가 좋지 않다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라니, 뭔가 들킨 기분이었다. 약국으로 향하면서 연애하라는 처방을 의사가 완곡하게 말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그나저나 언젠가부터 계단에서 헤매는 꿈을 왜 꾸지 않는지 모르겠다. 집에 와서 처방받은 연고의 설명서를 훑어보니 이번에는 지루성 피부염인 것 같았다. 접촉 다음에 지루. 어째 얘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얼굴에 연고를 바르고 나는 의사를 비웃으며 다시 책을 펼쳤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책이 나를 비웃는다. 다음 장의 제목은 '섹스만 빼고···' 이런 제기랄. 왠지 더 이상 읽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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