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재검토
아마티아 센 지음, 이상호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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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Amartya Sen의 대표작,

『Inequality reexamined』의 번역본.


1) 평등에 대한 올바른 질문 방식은 ‘왜 평등인가'가 아니라, ‘무엇에 대한 평등인가'이다. 인간의 다양성에 따라 평등을 평가하는 기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불평등에 대한 판단과 측정은 비교되는 중심변수(공간)의 선택에 철저하게 의존한다. 한 변수의 평등이 다른 변수와 관련해서는 심각한 불평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균등한 기회는 아주 불균등한 소득을 초래할 수 있다.


  오히려, 모든 이론들은 어떤 의미에서 ‘평등주의’이다. 이론들의 기본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좀 더 중요성을 부여하는 특정 영역(공간)에 대한 평등을 요구하는 대가로 다른 부차적인 영역(공간)에서의 불평등을 용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反평등주의’로 알려지고 저자 자신들조차 그렇게 표현하는 이론들도 다른 기준에서 보면 평등주의가 된다. 예컨대 재화의 분배 상태를 문제 삼지 않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효용 극대화)’만을 지상목표로 삼는 것처럼 보이는 고전적 공리주의는 기실 목적함수에서 모든 사람의 효용에 ‘평등한’ 가중치를 부여하는 이론이다. 이렇게 어떤 변수에 대한 평등의 거부 이면에 모종의(다른 변수에 대한 어느 정도 적절하고 실질적인 수준의) 평등주의를 내포하지 않고서는 (표준)이론으로서 지지받는 데 필요한 객관성, 신뢰성 내지 사회적 개연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얘기지만, 따라서 모든 평등론은 ‘불평등 옹호론’이기도 하다. ‘기본’으로 여겨지는 것의 평등이 하찮은 ‘주변부’의 불평등을 논리적으로 옹호할 뿐 아니라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이론이 설득력을 갖추는 기본적인 전략에 속한다.


  따라서 평등에 대한 논쟁을 평등‘옹호’론 대 ‘반대’론의 구도로 파악한다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어떤 평등인지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는 결코 평등을 옹호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 평등 그 자체는 독자적으로 어떤 실질적 내용도 갖추지 못한 공허한 개념일 수 있다. 우리는 불평등을 검토해야 한다.


  이는 결국 ‘자유와 평등의 관계’ 논제와 다르지 않은데, 결론부터 말해 그것은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다. 이 둘을 대당항으로 놓는 것은 ‘범주상의 오류’이다. 자유는 평등의 가능한 적용분야에 속하고 평등은 자유의 가능한 분배유형에 속한다. 센의 이러한 언설에서 나아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등을 억압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억압하거나 처벌하는 조건들의 예는 역사상 없었고, 그 역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자유를 제한하지 않기 위해 평등이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외연은 필연적으로 동일한 것이기에 양자가 현존하거나 부재하는 상황 역시 필연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제한된 평등은 더 많은 자유로 피어나지 않으며, 억압된 자유가 더 많은 평등으로 분배되지도 않는다고. 그래서 우리는 불평등을 재검토해야 한다.



2) “이제 정치철학자들은 롤즈의 이론틀 내부에서 연구하든지,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Robert Nozick(동의 여부를 떠나서 Nozick의 자유지상주의는 롤즈의 정의론에 대한 하나의 유력한 비판론이다)의 말처럼 롤즈의 관점은 우리가 정의나 평등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그의 이론은 오로지 결과와 성취의 불평등에만 머물렀던 우리의 관심 방향을 기회와 수단-자유(롤즈에 있어서는 특히 ‘기초재’)-의 불평등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센에 따르면 이는 부족할 뿐 아니라(평등성취의 수단으로서 자유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해주었지만) 적절한 관점이 될 수 없다. 자원이나 기초재를 평등하게 보유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실제로 누리는 실질적 자유의 평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수준의 자원과 기초재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목표하는 바의 자유(성취)로 전환시키는 ‘능력’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소득, 부, 자유와 같은 기초재를 많이 갖고서도 노령, 장애, 질병으로 인해 실제로 향유하는 능력이 제한받을 수 있다. 따라서 평등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선택하고 누리는 자유에 따라 평가되어야 하고, 이런 현실적인 자유는 바로 개인들이 다양하고 대안적인 기능조합들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된다. 요컨대, 불평등의 문제는 평등하지 못한 ‘자유’의 문제이다!



3) 불평등을 취급하는 후생경제학 이론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지금껏 인간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을 정확히 비슷한 존재로 취급했다. 사회후생을 개인효용의 총합으로 측정했으며 개인효용은 ‘소득’의 함수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주어진 총소득을 균등하게 분배하면 사회후생이 틀림없이 극대화된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불평등에 대한 관점을 제한한다. 이는 개인의 소득을 복지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개인별로 실질적인 (능력의) 차이가 난다는 점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으며 나아가 좋은 사회의 구성요소이자 사회후생을 결정짓는 한 가지 요인인 ‘자유’의 중요성을 담아내지 못한다.


  불평등의 한 표징인 ‘빈곤’을 정의함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관점은 소득공간에만 의탁했고, 그것은 손쉽게 ‘저소득’과 등치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빈곤은 개인별 특성과 무관한 소득결핍의 문제가 아나라, 어떤 최소 수용수준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기본‘능력’의 ‘부적합성’-불충분성을 포함한-으로 봄이 타당하다.


  소득크기만을 기준으로 평가할 경우 부유한 사회에서 굶주림이 지속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나라의 중산층보다 소득이 높지만 전자는 굶주리는 반면 후자는 특별히 굶주림 때문에 고통 받지는 않는다. 한 연구에 따르면, 번창한 도시인 뉴욕의 할렘가 거주 남성들은 방글라데시의 남성들보다 40세가 넘게 살 확률이 낮다. 그것은 물가 탓에 부유한 나라의 화폐로는 더 적은 상품만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식량이 상대적으로 싼 품목이 아니기도 하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옷을 차려입고 전화를 사용하는 등)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들고, 이러한 사회적 기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원 분배의 왜곡이 건강 등 최소의 생존에 이용 가능한 금융수단을 고갈시키기도 한다.


  요컨대 빈곤문제에 있어서도 소득에 대한 정보를 넘어 사회적 상황과 특성의 다양성으로 나아가야 하며, 소득과 다른 자원들을 복지로 전환시키는 다양한 능력에 주목해야 한다. 올바른 공간에 주목함으로서 우리는 정확한 빈곤구제책도 도출할 수 있다. Kerala 주(州)는 인도에서도 1인당 실질소득이 낮은 편에 속하는 지역이지만, 장기 평균 수명은 가장 높고, 유아사망률은 인도 평균보다 훨씬 낮으며, 그밖에 문자해독율과 여성권 등 수많은 핵심 기능에서 다른 주보다 훨씬 높은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의 관심을 국민소득과 소득분배 향상을 넘어 폭넓은 개발 노력으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를테면, ‘건강상태’를 측정함에 있어서 공중위생이나 의료시설, 이웃 등 공동체 생활, 사회적 호혜평등, 자연환경과의 지속가능한 상호작용, 문화 인프라 등을 도외시한 채 ‘수명’의 척도로만 환원해볼 수는 없지 않은가.



4) 아마르티야 센은 개념을 워낙에 꼼꼼하고 엄밀하게 구사하는데, 번역의 과정에서 의미전달력이 떨어지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책을 읽는 내내 많이 들었다. 언젠가는 다시 읽어야 할 책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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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존 파이어 레임디어.리처드 얼도즈 지음, 정도윤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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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고방식대로 하면 인디언들의 상징은 둥근 원이야. 자연은 사물이 둥글기를 원하거든. 사람이나 짐승 몸에는 모서리가 없어. 우리에게 원은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사람들, 담뱃대가 손에서 손으로 넘겨지는 동안 평화로 연결되는 친척과 친구들의 연대를 뜻하지. 각각의 티피가 나름의 자리에 앉은 캠프 형태도 둥글었어. 티피 자체도 사람들이 둘러앉게 되어 있는 둥근 모양이어서, 마을의 모든 가족들이 더 큰 원 안에서 원을 그리지. 그리고 그건 하나의 나라를 나타내는 수우족의 일곱 ‘모닥불 모임’(부족)이라는 그보다 더 큰 원의 일부였고, 그리고 한 나라는, 둥근 지구와 둥근 태양과 둥근 별들로 이루어진 그 자체로 둥글게 순환하는 우주의 일부일 뿐이고 말일세. 달과 지평선과 무지개도 시작도 끝도 없는 원 안의 원들이지.


이건 우리에게 아름다움인 동시에 타당함이고 상징인 동시에 현실이라네. 생명과 자연의 조화를 표현하는 거지. 우리의 원은 영원한 흐름을 뜻한다네. 이건 죽음에서 새로운 삶이 솟아나고, 생명이 죽음을 이기고 나온다는 뜻이지.


백인의 상징은 네모야. 백인들의 집도 그렇고, 사람들을 서로 떼어놓는 벽이 있는 사무실 건물들도 그래. 낯선 사람들을 들이지 않는 문도, 달러도, 감옥도 모두 네모야. 가전제품들, 텔레비전 세트와 라디오와 세탁기와 컴퓨터와 자동차들도 모두 상자, 상자, 또 상자들이지. 이것들에는 모서리와 예리한 날이 있지. 정시(定時)라든가 약속시간에 딱 맞추기, 타임워치와 러시아워, 이런 게 내가 말하는 모서리야. 자네들은 이런 상자들에 갇힌 죄수가 되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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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서경식 지음, 김석희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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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일정한 한도를 넘으면 표현할 수 없다. 어떤 표정의일그러짐도, 어떤 아비규환도, 어떤 호소도, 어떤 눈물도, 어떤 미친듯한웃음도 그 고통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고통의 이런 불가능한 영역, 즉 감각이나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 펼쳐져 있는 고통, 그것이 바로 `게르니카`의 고요함이다(사까자끼 오쯔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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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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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 맞닥뜨리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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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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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렇네. <진리란 오직 일면적일 때에만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말이라는 겉껍질로 덮어씌울 수가 있다.> 생각으로써 생각될 수 있고 말로써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모두 다 일면적이지. 모두 다 일면적이며, 모두 다 반쪽에 불과하며, 모두 다 전체성이나 완전성,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지. (...) 그러나 이 세계 자체, 우리 주위에 있으며 우리 내면에도 현존하는 것 그 자체는 결코 일면적인 것이 아니네. 한 인간이나 한 행위가 전적인 윤회나 전적인 열반인 경우란 결코 없으며, 한 인간이 온통 신성하거나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란 결코 없네. 그런데도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가 시간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네.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현세와 영원 사이에, 번뇌와 행복 사이에, 선과 악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간격이라는 것도 하나의 착각인 셈이지.


(...) <언젠가>라는 것은 착각이고 다만 비유에 불과[하네!] 죄인의 내면에는 지금 그리고 오늘 이미 미래의 부처가 깃들여 있다, 바로 그런 이야기야. 자네는 죄인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자네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아니 모든 중생 개개인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바로 그 생성되고 있는 부처를, 바로 그 부처가 될 가능성을 지닌 부처를, 바로 그 숨어 있는 부처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네. 고빈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며, 완성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네. 이 세계는 매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 깊은 명상에 잠긴 상태에서는 시간을 지양할 수가 있으며, 과거에 존재하였던, 현재 존재하고 있는,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생명을 동시적인 것으로 볼 수가 있어. 그러면 모든 것이 선하고, 모든 것이 완전하고, 모든 것이 바라문이야. 따라서 나에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선하게 보이며, 나에게는 죽음이나 삶이 다 같게 보이며, 죄악이나 신성함이 똑같이, 지혜로움이나 어리석음이 똑같이 보여. 세상만사의 이치가 틀림없이 그러하며, 세상만사는 오로지 나의 동의, 오로지 나의 흔쾌한 응낙, 그리고 나의 선선한 양해만을 필요로 할 뿐이네. 이것은 나에게는 좋은 일이지. 나를 후원해 줄 뿐, 나에게 결코 해를 입힐 수는 없으니 말이야. 나는 나 자신의 육신과 경험과 나 자신의 영혼의 경험을 통하여 이 세상을 혐오하는 일을 그만두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이제 더 이상 내가 소망하는 그 어떤 세상,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어떤 세상,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해 낸 일종의 완벽한 상태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놔둔 채 그 세상 자체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꺼이 그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내가 관능적 쾌락, 재물에 대한 욕심, 허영심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 여기 있는 이것은 한 개의 돌멩이네. 이 돌멩이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아마도 흙이 될 것이며, 그 흙에서는 식물, 아니면 짐승이나 사람이 생겨나게 될 거야. 예전 같았으면 이럴 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겠지. <이 돌멩이는 단지 한 개의 돌멩이일 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며, 그것은 마야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순환적인 변화를 거치는 가운데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정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그것에도 가치를 부여해 주는 바이다.> (...)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이 돌멩이는 돌멩이다. 그것은 또한 짐승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신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젠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 그 사물들이 가상이든 아니든 그것은 별 문제가 안 돼. 만약 그 사물들이 가상이라면, 그렇다면 나 역시 사실 가상적 존재인 셈이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사물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나와 똑같은 종류인 셈이지. 그 사물들이 나와 동류의 존재라는 사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나는 그 사물들을 그토록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고 그토록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거야. (...)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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