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의 배신 - 불편해도 알아야 할 채식주의의 두 얼굴
리어 키스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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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주장들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하다 못해 내가 생각하는 내용도 그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런 많은 주장들 중에 우리 몸, 즉 건강에 관련된 주장들은 많은데 가장 많은 내용 중에는 다이어트에 관련된 내용이다. 무슨 무슨 다이어트라는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어 자신이 주장하는 다이어트 방법이 최고의 효과를 발휘한다고 한다. 이런 다이어트에 관련된 내용은 보통사람들의 주된 관심사항이다. 허나 이런 와중에 상대적으로 몸이 마르고 왜소해서 다이어트가 아닌 살을 찌우기 위한 방법으로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모습들은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이고, 다른 한편은 너무 적게 먹어서 문제가 된다. 이 책의 저자가 얘기하는 내용은 이 중에 전체적으로 숫자가 적은 왜소하고 마른 사람들이 다이어트 방법이라고 주장되는 일반적인 통념을 깨기 위한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고 생각된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못 먹어서 고통 받기 보다는 많이 먹어서 생기는 문제로 바뀌어 왔다. 거기에 미의 기준이 왜소하고 마른 체형의 몸을 선호하는 것으로 바뀌어졌다. 그런데 생존을 위한 단계를 넘어서 먹는 입의 즐거움이 다종다양한 삶의 형태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해소로, 활동량 대비 고칼로리의 음식의 섭취로, 잘못된 식습관으로, 인스턴트 음식에 가미된 각종 약물의 영향으로 등등의 원인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원인에 의해 비만이 확대되었고, 이런 비만을 해결하며 몸은 날씬한 마른 체형이 되고자 다이어트라는 것을 누구나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다이어트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관심사가 되었고, 미를 위한 내용을 포함하여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라고 인식되게 되었다. 수 많은 다이어트 방법 중에 권장되는 많은 내용은 채식 위주로 식단을 바꾸라는 내용일 것이다. 몸이 필요로 하는 영양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지만 그 중에 특히 강하게 얘기하는 것이 육식위주의 식단은 다이어트에 적이라는 것을 강조해 왔다. 그러다 보니 육식은 좋지 않다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반대로 채식은 좋다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이런 선입견은 우리 몸의 상태에 맞는 호불호의 문제가 아닌 뭐는 뭐다라는 식의 단정적인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가 얘기하는 『채식의 배반』도 우리의 인식의 틀을 깨기 위한 하나의 주장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우리들의 선입견을 저자는 3가지 논지에서 접근하고 있다. 하나는 도덕적 측면, 정치적 측면, 영양학적 측면에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식물성이든 동물성이든 우리가 먹고 살아가는 본질은 동일하다고 생각되는데 이 두 가지 먹거리 유형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런 선입견은 교육과 주변에서 끈임 없이 들어 왔던 주장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 농업이든 축산업이든 어업이든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한 자연 파괴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적으로 농업은 상대적으로 먹거리에 대한 대안으로 자리잡아 왔고, 이런 와중에 ‘녹색혁명’이라고 얘기하는 신기술을 통해 단기간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단기간에 대량으로 넘쳐나는 식량은 동물사육으로 확대되면서 우리들의 문제인 비만을 만들어 냈다. 이런 내용은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이며, 왜곡된 우리의 인식을 바로 잡아야 할 내용이다. 또한 식물성 음식만을 섭취하려고 하는 비건(=vegan ; 엄격한 채식주의자(고기는 물론 우유, 달걀도 먹지 않음. 어떤 이들은 실크나 가죽같이 동물에게서 원료를 얻는 제품도 사용하지 않음))에 대한 얘기는 획기적이다. 식물성 음식을 먹는 행위도 생명을 먹는 것으로 자연계의 순환 과정에서 상호 먹고 먹히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새로운 시각에서 우리를 바라보게 한다. 다른 측면으로 정치적인 면의 얘기는 조금은 대안이 없는 얘기를 하고 있다. 육질이 종은 소를 사육하기 위해 옥수수를 먹인다는 얘기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고, 육식을 줄여서 파괴되는 자연을 살려 보자는 취지의 애기는 많이 하지만 정작 옥수수 재배 면적을 줄이자는 얘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결론은 인간의 탐욕을 꺾을 수 있는 방법이 나와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누구도 대안을 찾기가 쉬워 보이지 안는다. 마지막으로 영양학적인 얘기를 하는데 초두에 얘기한 다이어트와 관련이 있는 내용이다. 저자가 자신의 과거 채식주의적인 식단에서 오는 문제를 얘기하고 있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육식을 해야 한다는 것은 맞는 주장으로 보이나 영양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채식주의자가 전체적으로 많은 수의 인구를 차지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결국 빼빼 마른 사람들에게 맞는 얘기인 것 같고, 비만으로 고생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역시나 육식 보다는 채식이 위주로 된 균형 잡힌 식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육식위주의 현재 식단의 구성은 결국 파괴적이고 무차별적인 산업화한 식량생산 방법의 문제라 본다. “채식이 좋다, 육식을 줄여라”하는 문제가 아닌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산업화된 식량생산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고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어려우리라 생각 된다.


     저자가 독백과 같이 섞어서 자신의 얘기를 보다 보면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많은 면에서 “뭐는 좋고, 뭐는 안 된다”는 얘기로 선입견이 강하게 내포된 이야기로 들린다. 책에서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는데 처음에 우리가 생각해 보지 않았던 각도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신선했다. 즉, 생물학 시간에 먹이사슬을 그릴 때 항상 인간이 최고점에 위치하게 그려지고 있다. 식물이 동물보다 하등하고, 동물들도 초식동물이 육식동물 보다 하등 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림 자체의 의미는 그런 것은 아닌데 그림 속에서 위 아래라는 사람의 인식의 틀에 맞추다 보니 이런 선입견이 고착화 되어가고 있다고 본다. 흔히 삼각형에서 꼭대기 점이 인간 아니면 육식동물들로 채워지고 있다. 이는 반대의 개념으로도 볼 수 있는데 너무 인간 중심으로 바라 본 내용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런 내용에 대해 저자의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 본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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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 종암에서 힐탑까지, 1세대 아파트 탐사의 기록
장림종.박진희 지음 / 효형출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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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라고 되어 있어 이 책은 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아파트에 대한 얘긴데 처음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가 한국에서 시작한 때부터 대단위의 단지형태로 넘어가기까지의 모습에 대한 얘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책을 보면서 알게 된다. 간혹 영화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아파트의 모습이다. 최근 영화로는 『숨바꼭질(2013년, 허정 감독, 손현주,문정희 출연)』의 주 배경이 이 책에 등장하는 옛 아파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다른 영화 『도둑들(2012년, 최동훈 감독, 김윤석,김혜수 출연)』에서도 한 장면 나오긴 하지만… 이런 영화들에 보여지는 아파트의 모습은 중정(中庭)—마당의 한가운데, 집안의 안채와 바깥채 사이에 있는 뜰—이라고 하는 형태의 아파트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아파트는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서대문구 충정로3가에 있는 충정아파트일 것이다. 이런 아파트에 대해 보면서 중정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다. 조금은 낮 선 명칭이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전국 어디를 가도 대부분의 주거 형태가 아파트로 바뀐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보편화된 주거 형태가 되어 버렸다. 허나 현재의 고층 아파트 형태로 변화되기 전에는 책에 소개된 내용과 같이 몇 가지 유형의 아파트 모양을 찾아 볼 수 있고, 봐 오면서 성장했던 기억이 난다. 정작 소개된 형태의 아파트에서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다 낡아 빠진 아파트로 “저런 건물은 재개발도 안 하나???”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낡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직간접으로 이런 옛 아파트의 내부를 둘러 봤던 기억을 되새기면 같은 면적으로도 너무도 불편했던, 불편해 보이는 모양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난다. 지금의 아파트와는 비교도 하기 어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의 연구와 개발이 된 결과라 하겠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잊어 먹었던 옛 아파트에서의 정취는 사라져 갔다는 것을 책을 보면서 새삼 느껴져 온다.


     내가 본격적으로 아파트에서 살아 가면서 체감 했던 곳은 잠실의 대단지 아파트에서의 생활인데 이도 지금은 새롭게 개발되어 옛 모습은 없어 지고 고층의 아파트로 바뀌어 천정부지로 상승한 아파트 가격만이 체감되어져 온다. 물론 책에서 소개 된 1세대 아파트도 개발 당시에는 서민을 위한 고가의 주택의 형태이며, 신개념을 처음 접하는 주거모습일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모습으로 바뀌어졌지만…, 인터넷을 찾아 보니 일부는 허물고 새로운 건물로 지어진 곳도 있고,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역사의 유물과 같이 버티고 있기도 한데 지금은 돈의 가치로 바라다 보니 이런 아파트는 돈이 안 되는 퇴물로만 느껴진다. 이렇게 바뀌진 상황에서 지금도 저자가 얘기하는 아파트에서 오가는 정서가 그대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아파트 변천사를 보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아파트의 변화 때문인지 아니면 아파트에 딸린 환경, 예를 들면 난방시스템이나 주거 단위(가족 수나 맞벌이, 수요자계층 등)의 요구에 의해 바뀌어져 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의 난방을 위한 연료는 나무에서 석탄, 특히 연탄을 때는 연탄보일러가 있었고, 그 다음으로 석유를 이용한 석유보일러, 지금은 가스보일러로 대체되어 왔다. 대단지의 경우 중앙집중식의 난방에서 개별보일러로 변화 되었고, 이에 맞게 요즘의 보일러 광고는 다종다양의 고기능 가스보일러 선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책에 소개된 시기의 아파트는 주로 연탄보일러세대라 볼 수 있고, 엘리베이터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대라 높아야 5층의 저층아파트에 연탄을 때서 사용하는 풍경을 연상할 수 있다. 점차 기름(석유)보일러로 교체되었고, 플라스틱 통에 석유를 담아 개별 배달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LPG라고 하여 개별 가스통을 1층의 뒤 담벽에 놓고 길게 가스호스를 통해 난방과 조리용으로 사용했던 기억도 난다. 이제는 가스관을 통한 도시가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변두리나 시골이라고 하는 시외지역에 가면 간혹 접하는 과거의 난방연료의 공급방법을 찾아 볼 수 있다. 


     편리한 생활과 경제적 활용도를 통한 재산의 축적 수단으로 바뀌어 왔고, 이런 모습이 이제는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가 포화상태로 다다르면서 새로운 개념의 주거 환경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과거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아파트 변천사를 접하면서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옛 향수만을 느끼는 낭만적인 감성보다는 이런 아파트를 보면서 한국의 아파트 주거형태의 변화되어 가는 모습과 앞으로의 아파트 모습을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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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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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산」이 흑산도를 가리키나 보다. 그래서 흑산도 자료를 찾아 보고, 지도 상의 위치를 찾아 본다.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있는 섬이라고 나온다. 흑산도, 홍도, 상태도, 가거도 등의 도서로 이루어 진 중에 제일 큰 섬인 흑산도가 이 소설의 주 무대로 등장한다. 이곳으로 유배가 된 정약전의 신유박해에 연루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당시 천주교 박해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다.


     신유박해의 정치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왜 정부에서 천주교인을 죽여야 했는지에 대한 내용 보다는 이 박해에서 무고하게 죽어간 일반 서민들의 삶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그들이 왜 천주교를 믿게 되었고, 그런 그들이 죽어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소설 속에 그려지는 서민의 삶은 무척이나 척박하다. 천주교인과 연관이 되어 불려가거나 잡혀가면 감옥에서, 형장에서, 아니면 감옥을 벗어난 이들 또한 모두 죽음에 이르는 내용은 너무도 참혹하다. 이런 내용에 대한 작가의 시각을 따라 가다 보면 뭔가 울분이 밀려 올라 온다. 이런 시각에서 신유박해에 대한 인터넷 자료를 찾아 보면 맨 보여지는 내용은 정치적인 원인, 배경, 결과이고 그 결과도 주요 인물에 대한 몇몇 사항만 간단하게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많이 보여 주는 내용 또한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만 눈에 띈다. 신유박해에서 희생당한 사람이 비단 순교자 만의 내용은 아닌데 무고하게 죽어간 그들의 모습은 찾아 보기 어렵다. 


     허나 이 소설을 보면 그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그래서 슬프다. 천주교를 받아 들이고 순교라는 모습으로 죽어간 그들의 모습 속에 왜 그들이 죽음의 이유가 종교적인 면 이외에 그들의 삶 자체가 당시 더 이상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없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양반, 쌍놈 하는 명백한 신분제 속에서 자유를 준다고 해도 엄연히 존재하는 신분사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천주교인들 사이에도 변형된 엄연한 신분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천주교의 전파가 사회변화의 흐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당시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도피처 정도였고, 이런 이들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희생양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작가의 소설을 보면 일반서민의 모습이 특히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척박하다. 과연 그들의 삶이 내가 느끼는 정도 인지 아닌지는 절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지만 필체에서 느껴지는 감성적인 고유의 느낌은 독특하다. 『남한산성』이나 『칼의 노래』에서 본 내용은 이 소설 『흑산』에서 보는 내용과 같이 무능한 정치권력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을 쥐어 짜는 모습을 실감한다. 작가가 이런 주제만을 소설로 그려서 그런지 몰라도 당시의 상황을 역사에서 배웠던 건조한 사건 사고의 내용이 아닌 당시를 살았던 우리 조상의 얘기를 눈 앞에서 보는 듯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간결하게 끝나는 필체와 꾸미지 않으면서 직설적이고, 인간 삶의 원초적인 내용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 일례로 박차돌의 여동생이 고문을 받고 감옥에서 죽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감옥의 상황—끌려온 죄인의 모습이나 당시 감옥의 환경적인 상황, 고문을 받고 죽을 수 밖에 없는 모습 등—을 간결한 설명으로 실감나게 그려 내는 모습은 너무도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그 밖에도 정약전이 흑산에서 살아가는 모습 또한 일상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모여 그가 그곳을 받아들이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의 삶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런 내용도 작가 특유의 필치를 느끼게 한다.


     후반부에 나오는 순교성지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성당에서 들었던 순교성지에 대한 내용이나 의미와 막상 그곳에 가서 본 느낌, 그곳들에 대한 자료를 찾았을 때의 모습은 하나같이 같은 방향의 의미와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순교자의 모습에 국한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허나 이 소설을 보면서 다른 시각 다른 모습을 접하는 느낌이다. 앞에서 얘기한 순교성지의 의미와 내용을 글로, 현재의 모습을 보다 보니 당시의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허나 이런 느낌이 아니라 소설 속에 드려지는 내용을 통해 보다 실체적인 느낌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내용과 소설에서 다루는 내용의 시각은 분명 다르겠지만 지금 당시를 생각해 볼 때 또 다른 순교성지에 대한 의미를 느끼게 한다. 순교자를 포함한 무고한 백성의 죽음의 현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다 보니 전에 가 봤던 절두산성지가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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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수은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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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를 보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소가 어딜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구글이나 네이버를 뒤져서 찾아 보니 스페인과 프랑스를 있는 지역으로 파악 된다. 스페인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지명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의 여행 경로를 보면서 이야기를 뺀 단순한 여행만으로도 낭만과 정취를 느끼게 한다. 덧붙여 자료를 찾으면서 프랑스의 쌩사뱅(Saint Savin)의 마을 모습의 사진이나 작가가 마을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마지막의 피에트라 강(Rio Piedra)은 여기 저기를 찾아 보니 한역된 피에트라가 Piedra의 스펠링을 찾아 보니 사라고사 근처의 강으로 소설 속에 그려지는 협곡으로 폭포와 호수, 그리고 동굴이 있고, 옛 수도원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런 모습을 보니 소설 속의 묘사가 상상의 모습이 아닌 실재 그곳을 가본 작가가 묘사하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아 왔던 강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좁은 협곡의 계곡물 같은 그런 강이지 않을까?


   이야기는 두 여인인 남녀의 사랑 얘기이데 여느 소설에서 봐 왔던 남녀의 애닳는 그런 얘기도아니고 그렇다고 남녀상열지사류의 얘기도 아니다. 소꿉친구와의 사랑 얘기인데 각자의 이상을 찾아 성장한 후 성인이 되어 서로의 속내를 모르고 알 듯 모를 듯한 사랑의 이야기를 코엘료 특유의 환상적인 정취를 느끼게 하면서 그려내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지금까지 봐 왔던 연애소설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서 들려 주는 작가의 의도가 뭘까 하는 의구심이 마지막에 들어 다시금 소설의 내용을 되새김하면서 마지막에 해설과 비슷하게 역자 후기가 한마디로 정리하는 느낌이다.


         “그녀는 부정했다. 자신에게 아직도 사랑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든 것을 버리는, 혹은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사랑에 전부를 맡길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부정했다.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계속해서 구도자의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사랑이 충분히 깊어지면 삶은 양자택일이 아닌 제3의 기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이 내용을 보면서 마지막 부분에 들었던 주인공이 왜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라고 얘기하는 지를.... 어찌 보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 요즘의 남녀의 모습은 아니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은 조금은 속물적(?)이라고 할까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이기적인 생각에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을 잊고 살아왔기에 소설 속에 그려지는 주인공과 같은 사랑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가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자신에게 내려온 은혜를 거둬 달라는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고백을 하고 나서 그녀가 울며 피에트라 강가에서 울었던 이유를 쉽게 이해 할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 내려온 은혜를 가지고 그와 같이 살기를 희망했는데 이를 모르는 그에게 실망해서 뛰쳐나간 거고 그에 잠시 정신을 잃고 그와 헤어져 피에트라 강가에서 울었던 것은 아닐까? 너무 세속적인 나의 해석은 아닌지…… 요즘의 「사랑과 전쟁」과 같은 TV드라마를 자주 접하기에 코에료 소설도 그런 부류라 지레짐작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에서 그녀가 들려 주는 사랑 얘기에 대한 여러 생각들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녀의 생각과 그와 같이 지나오는 여행의 여정은 단지 1주일 상간의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먼 인생을 살아가는 기간과 같고, 생각의 단편이 시간 별로 이어지는 소설의 형식이 새롭게 느껴진다. 내용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현대의 내용인데 그녀가 생각하는 모습이나 주변의 풍과의 묘사는 마치 중세와 같은 느낌이 든다.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가톨릭을 중심으로 수도원과 사제가 등장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옛날이라는 느낌보다는 몽환적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이런 느낌이 ‘코엘료식 느낌(?)’이라고 할까?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머리 속의 생각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뭔가 정형화되지 않지만 느껴지는 뭔가에 대한 표현을 소설을 통해 느낀다고 하겠다. 남녀의 사랑이야기이지만 주로 그녀의 생각을 중심을 그려내는 소설의 느낌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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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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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책을 봤을 때 ‘11이 뭘까 하는 생각을 했고, 책의 등에는 제목과 그 사이에 그려져 있는 여자의 그림이 뭔가 야함을 암시하는 느낌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소니아 로시의 『퍼킹 베를린(Fucking Berlin)』을 연상하게 한다. 적나라한 성적 표현을 하면서 이야기 하는 이탈리아 여인의 베를린에서 성을 파는 경험담을 소설의 형식으로 써내려 간 내용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코엘료가 이런 류의 소설을 썼다는 데에 느낌이 새롭다.


     11분은 인간이 성적 결합을 하는데 있어 충분한 시간이라고 한다. 여느 포르노물을 보면 몇 시간이고 이어지는 장면들을 접하는데 이런 내용은 보는 사람에게 자극을 주기 위한 내용인지는 몰라도 11분이면 족하다는 얘기를 한다. 정말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포르노물은 성적자극을 극대화 하기 위해 설정한 과장된 내용이고, 성적 기교가 뛰어나지 않은 보통사람들은 소설의 제목과 같이 11분이면 족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소는 스위스다. 스위스의 제네바역 근처의 베른가(구글 지도에는 배흐느가(Rue de Berne)로 나온다)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이 주인공인 마리아가 활동하는 영역이라고 하겠다. 즉 코파카바나 나이트클럽브라질의 지명과 나이트클럽의 이름이 동일하다을 통해 매춘을 할 수 있는 장소다. 소설의 시작은 브라질의 시골처녀가 어릴 적 성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소녀시절의 남자에 대한 느낌(?)과 기억을 간직하고, 22살의 나이에 리우데자네이루의 동남쪽 해변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만난 스위스의 해외 취업알선업자(?)를 만남으로 이어진다. 큰 결심과 이어지는 스위스로의 댄서 취업은 그녀에게는 큰 전환점이 되고, 이어지는 댄서생활의 따분함을 넘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매춘부로의 전환, 그리고 스위스의 언어 습득의 총명함이 맞물려 스위스 매춘업계로 뛰어 든다. 그러면서도 도서관을 다니면서 부단한 교양을 쌓는 모습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나의 선입견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이어지면서 성을 본격적인 사업수단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면서 고향에 돌아가 나름의 꿈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성적인 매력을 부각시키고 특별손님을 맞는 과정에서 SM이라고 하는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내용도 나오고, 일찍이 어린 나이에 성공한 남자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이어가는 얘기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을 보면서 여성의 성에 대한 내용을 남자가 써나가는데 대해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리고 이런 솔직한 이야기가 과연 실재 여성들이 가지는 성에 대한 내용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의 말미에 작가가 실재 소설의 모델을 인터뷰했다는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성장해 온 배경에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가상의 내용이라는 느낌이 짙게 느껴진다.


     소설의 내용은 여느 뉴스 내용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3류 영화의 소재나 신분을 속이고 취재하는 다큐멘터리 내용과 같은 인신 매매단의 얘기가 연상된다. 해외 취업알선업자에 속아 몸 버리고, 돈 버리고, 그리고 나라망신 시키는 불쌍한 여성의 뉴스 내용과는 다르게 취업보장이 확실히 되어 있고, 자유의사에 의해 자유롭게 성매매를 할 수 있는 스위스의 얘기는 새롭게 느껴진다. 진짜 스위스에서는 이런 성매매가 가능하지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성매매 특별법이란 것이 있어서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2004 9 23일부터 본격 시행되었다는 자료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스위스에서는 이와는 다르게 성매매가 자유롭다는 것에 또 다른 충격(?)아닌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베를린에서도 성매매가 불법이 아니라고 하지만…. 과거 한국에서 성매매의 대명사로 서울의 청량리 588, 미아리 텍사스, 영등포역 이나 용산역 부근, 인천의 옐로 하우스, 부산의 완월동 등 많은 집창촌이 있지만 대부분 기차역 부근에 있는데 이곳 스위스에도 제네바역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세계적인 공통점(?)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여행객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이니까 그런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매매춘의 주체는 대부분 사업가, 회사 고위직 등 외관상으로 봐서는 매춘을 할 것 같지 않는 부류가 주 고객으로 등장한다. 이는 한국사회에서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서의 성에 대한 불만족이 경제력을 배경으로 고급 나이트클럽을 통해 매춘을 하는데, 한번에 350프랑이라고 하면 한화로 371,175(2013-10-22일자 환율 기준)이니까 나이트클럽에서 음료와 숙박장소 비용까지 합하면 대략 50만원 남짓 하는 비용이 드는데 많은 비용이 드는 매춘이라고 하겠다. 미국의 어느 포르노에는 고급 콜걸과의 매춘에 2,000(211만원)을 지불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에 비해서는 저렴(?)하다고 할 수 있겠나?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매춘부도 하나의 직업으로 강제적인 강압은 없다는 것과 직업에 대한 사회적인 확실한 보장이 되어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준다. 나이트클럽의 사장이 자신의 사업에 대해 철저한 직업의식(?)을 발휘하는 만큼 그 속에서 매춘 일하는 여성 또한 철저한 직업의식을 그리고 있다. 하다 못해 유부녀가 매춘업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터부시 하지 않는 내용은 놀랍기만 하다. 과연 이런 내용이 사실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매춘과 매춘부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소설의 내용에 담고 있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사랑에 무게가 실려 있기는 하지만 다분히 자극적인 소재라서 그런지 그 사랑에 대한 주제가 쉽게 와 닿지는 않는다. 성매매를 하는 상대와 정상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고, 어린 나이에 성공한 젊은 부자가 매춘부를 연인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내용이지 않겠나 생각된다. 물론 동양의 한국사회에서와 다른 사고방식의 유럽이나 남미의 성에 대해 개방적인 사회적 분위기의 반영인지는 모르겠다. 소설을 보면서 아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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