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또 남몰래 속으로 노르웨이에서 ‘입센‘이라는 이름은 그저 불후의명작 몇 권을 써낸 작가의 이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단어, 즉 문학과 인물의 범주를 뛰어넘는 중요한 단어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는 내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루쉰‘ 이라는 단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루쉰‘ 으로서, 그 시기의 루쉰은 더이상 한 작가의 이름이 아니라 모든 중국인이 다 아는 단어, 정치와 혁명의 의미를 내포한 중요한 단어였다. - P165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획득한 뒤로 신사회가 시작되었고, 동시에 이전의 구사회에 대한 무자비한 채찍질이 시작되었다. 사회 비판적 의미가 강했던 루쉰의 작품은 공산당의 손에서 마음대로 춤을 추는 채찍이 되었다. - P165
물론 루쉰의 작품에 대한 마오쩌둥의 감상과 해석이 가장 중요했다. 그 뒤로 전개된 신사회에서 루쉰의 명성을 최고 지위로 부상시키면서 위대한 문학가이자 위대한 사상가이며 위대한 혁명가라는 이른바 ‘세 위대함‘을 누리게 한 것이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1936년에 세상을 떠난 이 작가는 그 영향력이 1966년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최고봉에 이르기 시작하여 마오쩌둥에 바로 뒤이어 거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누렸다. - P166
이것이 문화대혁명 시기의 특징이었다. 조반파 사이의 논쟁이건 홍위병 사이의 논쟁이건, 아니면 부녀자들 사이의 말다툼이건 간에 최종적인 승리는 마오쩌둥의 말을 들고 나오는 사람의 차지였다. 마오쩌둥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결론이 나고 쟁론과 말다툼도 즉시 끝이 났다. - P170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위대한 독자를 필요로 한다. 루쉰에게는 누구보다도 강대한 독자 마오쩌둥이 있었다. 이는 루쉰의 행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불행이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루쉰‘이 한 작가의 이름에서 시대의 흐름을 타는 정치적 어휘로 변질된 뒤로 그의 깊이 있고 뛰어난 정취를 지닌 작품들마저 교조주의적 독서에 매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 P177
중국에서 ‘루쉰‘의 운명은 일개 작가의 운명에서 한 단어의 운명으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단어의 운명에서 작가의 운명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는 중국의 운명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뭇잎을 보면 가을이 온 것을 알 수 있듯이 중국 역사의 온갖 변천과 사회의 격동을 ‘루쉰‘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 P179
쿵이지를 다 읽고 나서 나는 곧장 그 영화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가 루쉰의 소설을 영화화하지 말기를 바랐다. 전화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루쉰을 망가뜨리지 맙시다. 루쉰은 정말 위대한 작가거든요." - P181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믜 그날 저녁 나에게 루쉰은 마침내 하나의 단어에서 하나의 작가로 돌아왔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그 긴 세월 동안 억지로 루쉰의 작품을 읽어야 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나는 루쉰이 아이들의 작가가 아니라 성숙하고 민감한 독자들의 작가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때때로 한 독자와 한 작가의진정한 만남에는 어떤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중략) 나는 노르웨이의 청중에게 한 작가가 하나의 단어가 된다는 것은 사실 그 작가 본인에게 커다란 손해라고 말했다. 나의 강연이 끝나자 오슬로 대학 역사학과의 하랄 뵈크만 교수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위화 선생이 어렸을 때 루쉰을 싫어했던 것이 내가 어렸을 때 입센을 싫어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군요."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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