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대에는 사람들을 청해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설이나 명절을 맞아 친척 집을 찾아가 식사를 할 때도 하는 수 없이 양표를 내야 했다. 식사가 끝나면 사람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손가락을 꼽아가며 꼼꼼하게 계산을 한 다음 각자 주머니에서 양표를 꺼냈다. 이는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에게는 몹시 민망한 일이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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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부분의 애호가들에게는 낚시란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체육활동이다. 체력의 소모량은 기본적으로 거의 없고, 운동의 주요 형식은 명상이며, 최종 목적은 몸과 마음을 닦고 수양을 쌓는 것이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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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선택적이고 모호하고 배타적이다. 게다가 장기적인 동면 상태에 빠져 있다. 글쓰기란 이런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이다. 기억의 미궁에서는 하나의 길이 또 다른 길을 인도하고, 하나의 문이 또 다른 문으로 열려 연결된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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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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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극단적으로 억압된 시대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반드시 극단적으로 방종하는 시대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그네를 타는 것처럼 한쪽 끝이 높이 올라가면 반대쪽 끝도 높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 P194

우리는 강자를 두려워하고 약자를 능욕하면서 이를 커다란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매일 이 사회에 정의를 늘려가고 있다고생각했다. - P197

이리하여 중국은 정치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마오쩌둥의 흑백 시대에서 덩샤오핑의 경제지상주의 컬러 시대로 접어들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우리는 항상 "사회주의의 풀을 뜯어 먹을지언정 자본주의의 싹은 먹지 않겠다" 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중국에서 우리는 이미 어떤 것이 사회주의이고 어떤 것이 자본주의인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풀과 싹 둘 다 똑같은 식물일 뿐이다. - P203

2009년 2월, 내가 밴쿠버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UBC에서 강연을 하며 2006년 중국에서 연간 수입이 800 위안밖에 안 되는 빈민 인구가 1억명에 달한다고 얘기하자 한 중국 유학생이 빌떡 일어나 말했다. "돈은 행복을 가름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이 중국 유학생의 한마디를 듣자 나는 몸이 떨려왔다. 이는 한 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오늘날 일부 중국인 집단이 내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날이 발전하는 중국의 이미지에 푹 빠져 아직도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가난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나는 중국인의 진정한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빈곤과 기아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빈곤과 기아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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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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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남몰래 속으로 노르웨이에서 ‘입센‘이라는 이름은 그저 불후의명작 몇 권을 써낸 작가의 이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단어, 즉 문학과 인물의 범주를 뛰어넘는 중요한 단어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는 내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루쉰‘ 이라는 단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루쉰‘ 으로서, 그 시기의 루쉰은 더이상 한 작가의 이름이 아니라 모든 중국인이 다 아는 단어, 정치와 혁명의 의미를 내포한 중요한 단어였다. - P165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획득한 뒤로 신사회가 시작되었고, 동시에 이전의 구사회에 대한 무자비한 채찍질이 시작되었다. 사회 비판적 의미가 강했던 루쉰의 작품은 공산당의 손에서 마음대로 춤을 추는 채찍이 되었다. - P165

물론 루쉰의 작품에 대한 마오쩌둥의 감상과 해석이 가장 중요했다. 그 뒤로 전개된 신사회에서 루쉰의 명성을 최고 지위로 부상시키면서 위대한 문학가이자 위대한 사상가이며 위대한 혁명가라는 이른바 ‘세 위대함‘을 누리게 한 것이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1936년에 세상을 떠난 이 작가는 그 영향력이 1966년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최고봉에 이르기 시작하여 마오쩌둥에 바로 뒤이어 거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누렸다. - P166

이것이 문화대혁명 시기의 특징이었다. 조반파 사이의 논쟁이건 홍위병 사이의 논쟁이건, 아니면 부녀자들 사이의 말다툼이건 간에 최종적인 승리는 마오쩌둥의 말을 들고 나오는 사람의 차지였다. 마오쩌둥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결론이 나고 쟁론과 말다툼도 즉시 끝이 났다. - P170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위대한 독자를 필요로 한다. 루쉰에게는 누구보다도 강대한 독자 마오쩌둥이 있었다. 이는 루쉰의 행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불행이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루쉰‘이 한 작가의 이름에서 시대의 흐름을 타는 정치적 어휘로 변질된 뒤로 그의 깊이 있고 뛰어난 정취를 지닌 작품들마저 교조주의적 독서에 매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 P177

중국에서 ‘루쉰‘의 운명은 일개 작가의 운명에서 한 단어의 운명으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단어의 운명에서 작가의 운명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는 중국의 운명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뭇잎을 보면 가을이 온 것을 알 수 있듯이 중국 역사의 온갖 변천과 사회의 격동을 ‘루쉰‘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 P179

쿵이지를 다 읽고 나서 나는 곧장 그 영화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가 루쉰의 소설을 영화화하지 말기를 바랐다. 전화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루쉰을 망가뜨리지 맙시다. 루쉰은 정말 위대한 작가거든요." - P181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믜 그날 저녁 나에게 루쉰은 마침내 하나의 단어에서 하나의 작가로 돌아왔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그 긴 세월 동안 억지로 루쉰의 작품을 읽어야 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나는 루쉰이 아이들의 작가가 아니라 성숙하고 민감한 독자들의 작가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때때로 한 독자와 한 작가의진정한 만남에는 어떤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중략)
나는 노르웨이의 청중에게 한 작가가 하나의 단어가 된다는 것은 사실 그 작가 본인에게 커다란 손해라고 말했다.
나의 강연이 끝나자 오슬로 대학 역사학과의 하랄 뵈크만 교수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위화 선생이 어렸을 때 루쉰을 싫어했던 것이 내가 어렸을 때 입센을 싫어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군요."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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