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단순한 거래와 업무마저-표를 구입하고, 쿠폰을 교환하고, 건물에 들어가는 것-깐깐하게 규칙을 따지는 사람과 만나면 악몽과도 같은 경험이 될 수 있었다. - P295
가장 단순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도 개인적 인맥과 사회적 연줄이 필요했다. 힘 있는 친구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행정 절차의 세부사항을 철저히 준수하여, 낯선 사람에게 딱히 혜택을 줘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할 수도 있는 일면식 없는 관료에게 접근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쉬웠다. - P296
그러나 당에 속한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보다 개인적 이익을 위해 시스템을 이용하기 더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국가를 속이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데 사업가적 지략을 끝없이 발휘했다. - P296
국유 은행으로부터 끝없이 돈을 꾸는 것도 흔한 수법이었다. 1961년 여름에 리푸춘이 30억 위안의 적자에 주목하며 지적한 대로 많은 단체들이 흥청망청 먹고 마시려고 은행으로부터 돈을 꿨다. 그리고 도시나 현이 적자 상태가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세금을 납부하려 들지 않았다. 이런 관행은 1960년에 여러 성들이 모든 수익을 성 안에서 보유해야 한다고 명시한 규정을 통과시키면서 시작되었다. - P299
국가를 속이는 또 다른 길은 배급 명단을 부풀리는 것이었다. 섬뜩하기 짝이 없는 죽은 사람 장사가 나라 전역에서 성행했다. 식량을 더 많이 배급받기 위해 가족의 죽음을 감추는 것처럼 간부들은 수시로 농민들의 숫자를 부풀려서 잉여분을 전용했다. - P300
쑤저우에서 현지 조사관들은 쌀 1킬로그램 가운데 절반만이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추산했다. 쌀은 곡창에서 빼돌려지고 수송 중에 절취되고 회계원들이 착복하고, 간부들이 몰수해 가고, 밥 한 공기가 공동 식당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요리사가 슬쩍 훔쳐갔다. - P316
기근 시기에는 한 사람이 뭔가를 얻으면 누군가는 잃었다. 심지어 좀도둑질이 얼굴 없는 국가를 상대로 한 것처럼 보일 때도 분배 체계 저 아래 누군가가 대가를 치러야 했다. - P319
모두가 병사가 되어야 한다고 한 것처럼 마오쩌둥은 모든 남녀는 시인이 될 것을 선언했다. 축제가 조직되고 풍년이나 제철소, 치수 조치를 노래한 최고의 노래에 상이 주어지는 가운데 중국인들은 1958년 가을에 수백만 수의 시를 지어야 했다. 사회주의 미래에 대한 열광적 비전이 100만 편씩 쏟아져 나온, 운율을 맞춘 절구(絶句)로 그려졌다. 상하이에서만 고작 20만 명의 노동자가 500만 수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후원된 시 다수는 다소 진부했지만, 집산화에 대한 반응으로 마을 주민들이 즉석에서 읊은 단가에는 진정으로 창조적인 정신이 드러나기도 했다. - P325
일부는 최고 지도자들 앞으로 직접 편지를 보냈다. 그들은 황제 앞에 직접 탄원하는 중국 제국의 유서 깊은 전통을 재연하고 있는 셈이었지만 또한 권력의 오남용은 마오쩌둥이 시작한 집산화 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국지적 현상이라는 믿음을 드러내는 셈이기도 했다. <마오 주석이 알기만 한다면> 정의는 수도에서 분명히 살아남았으리라. 편지들은 그러한 희망을 제시했다. - P331
냉전이 끝난 1991년경, 미국은 어떤 나라가 최대의 위협이라고 생각했을까? 소련은 붕괴 직전이었고, 중국 경제는 아직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미국이 생각하는 최대 위협은 일본이었다. - P317
1990년대 들어 미국은 "동맹국과 미국의 공동 번영을 더는 기대할 수 없었다. 미국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강요했고, 이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상대방이 필요해졌다. 미국에겐 지적인 일본 수상이 더는 필요 없어졌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는 수상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 P330
비록 정론이라 해도 나 홀로 주장하면 따돌림을 당하는 법이고, 아무리 틀린 말이라도 다수가 주장하면 항상 주류에 남는다. 무리 속에만 있다면 아무리 틀린 말을 해도 훗날 검증당할 위험은 없다. 이것이일본 언론계의 실상이다. - P343
일본의 보수 세력이 신줏단지처럼 받들고 있는 미일 동맹은 언제나 그렇듯 위기 때마다 항상 회귀본능을 자극하는 안식처이자 방파제가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자민당 장기 집권기에 자주 나타났다. - P377
미국은 7년간 인내심을 가지고 기시를 전범에서 수상으로 변신시켰다. 기시는 <뉴스위크> 도쿄지국장 파케남의 영어레슨을 받으면서 외신부장인 해리 칸을 통해서 미국 정치가와 만나게 된다. 해리 칸은 안보투쟁 시 CIA장관이던 알렌 덜레스와 친구로 나중에 CIA 중개역을 맡았다. 기시는 미국대사관 당국자와의 관계를, 마치 난초를 키우는 일처럼 소중히 생각했다. - P205
국제정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이 유명 대학의 학생운동이나 인권단체, NGO 등에 자금이나 노하우를 제공함으로써 반미 정권을 무너뜨리는 계기를 만드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이렇게 대규모 시위의 경우, 먼저 CIA가 개입했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 P219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은 전후 진보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6월 17일, 매우 이례적인 7개사 공동선언을 경계로 이 두 신문사는 성격이 완전히바뀌었다. 더 유감스런 일은 그것이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이 변하면서, 소위 지식인층에도 큰 변화가 찾아와 지식인 사이에 우경화 흐름이 강해진다. - P225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고 갔던 시절의 각료이면서, 도쿄 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였던 기시 수상에게 정국을 맡기다가는 자칫 일본은 다시 전전 체제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우려가 컸다. 경찰 권력으로 국민을 억압하거나 의회민주주의를 붕괴시킬 수도 있고, 아니면 미국과 하나가 되어 해외에 군대를 파병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국민들 사이에 있었던 것 같다. 1960년 안보투쟁의 시작은 미국 혹은 미국의 뜻을 반영한 재계의 정치공작에서 비롯되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일본사에 전례 없는 대중투쟁으로 발전했다. - P227
자주노선과 추종선의 경쟁 속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일미군 문제이고, 그 다음은 중국과의 관계이다. 일본은 중국의 이웃국가다. 당연히, 일본 국내에는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을 잠재적인 라이벌로 간주하고 있어서, 중국이 공산주의 색채가 강할 때에는 봉쇄정책을 쓰고 군사력이 강해지면 대항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중국을 둘러싸고 항상 미일 간 갈등이 발생한다. - P229
독립국 지위를 회복한 뒤 일본은 외교 감각을 회복하려고 해도 오랜 타성 때문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전히 점령군의 중추세력인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자주독립의 정신은 한번 상실하면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 P144
지금까지 자신이 검열관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사람은 겨우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은 나중에 대학교수나 주요 신문 기자가 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점령 후 공무원이 되었을 것이고, 아니면 언론계나 학계, 혹은 경제계에서 나름 한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중략) 미국 첩보기관에 이용되었던 당시 지식인 계층들은 전후 일본에 무려 5천 명이나 머물러 있었다. 미국의 방침에 거스르면 추방되고, 잘 보이면 경제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그때의 구도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 P146
가리오아 자금이 중요했던 것은 일본의 엘리트들이 그 돈으로 유학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수나 공무원 등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유학했고, 그중에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 후 일본 사회에서 미일 관계 강화를 위해서 움직였다는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 P152
2009년 9월부터 2010년 5월까지 하토야마 유키오 수상이 오키나와 후텐마기지를 최소한 오키나와 현 밖으로 이전한다는 내용을 암시한 적이 있다. 일본 수상으로는 매우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일본 측에서 미군 기지 축소 계획을 제시한 사례는 과거 반세기 동안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하토야마 유키오 수상의 주장은 미군이나 일본이 볼 때 반세기 이상에 걸친 기본 노선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그러나 하토야마 내각을 붕괴시키려는 움직임이 보기 좋게 성공했다. - P161
결국, 미국은 요시다 - 오카자키 콤비가 교섭하여 "미국이 원하는 만큼의 군대를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기간만큼 주둔시킬 권리를 법적으로 확보하고," 미군 관계자 전원에게 사실상 치외법권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수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오키나와 미군 기지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 때문이다. - P169
일본 전후사를 살펴보면, 한때 미국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 정세가 바뀌면서 이용가치가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새로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정치인은 미국에 의해 퇴진당한다. - P172
북방영토 가운데 에토로후와 구나시리라는 2개 섬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미국이 소련에 준 영토이다. 미국은 냉전 이후 소련이구나시리와 에토로후를 일본에 양도하려고 하자 양자 관계에 간섭을 해왔다. 일본과 소련 간 분쟁의 여지를 남겨서 우호관계를 훼방하려는 미국의 속셈인 것이다. - P184
영국 등은 식민지에서 철수할 때, 대부분 분쟁의 여지를 남겨두고 물러난다. 식민지가 단결하여 영국의 반대 세력이 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영국은 인도에서 철수할 때 인도-파키스탄 간에 캐시미르 분쟁을 남겨두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철수할 때는 부족 갈등을 일으키도록 국경을 얼키설키 설정한다.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고 방글라데시까지 만든 것 또한 영국의 전통적인 분할통치 방식이다. - P187
이게 니들이 한국에 한 짓이잖아... 최소한 니들은 강제 징용을 당하거나 노역에 끌려가거나 위안부로 끌려가진 않았네.
강화조약 체결 시 외무성조약국장이던 니시무라 구마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점령통치 6년간의 고통은 지금 30, 40대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결사의 자유 그 어느 것도 없었다.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그저 지시만 내려올 뿐이었다. 언제 어디서 처벌당할지 아무도 몰랐다. - P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