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라는 말이 굉장히 거슬리고 짜증나는데... 니들이 보기에나 평화지...
˝일본이 주변 지역을 억압하며 형성한 질서˝라고 해야 맞는 거 아닌가?

‘극동 1905년 체제‘ 아래서 일본과 주변 지역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질서는 1920년대까지 큰 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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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정부의 원로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총리는 아오키 슈조 외무대신에게 제출한 건의서 외교정책론 (1890년3월)에서 "국가 독립 자위"를 위해 국토인 "주권선"과 "주권선의 안위와 긴밀하게 상관관계를 갖는 구역"인 "이익선"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익선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가? 야마가타는 조선이라고 논했다. [이 기준을 놓고 볼 때] 한반도가 일본의 적대 세력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근대 일본의 국가안전보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 P50

조선의 전략적 ·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한 것이 야마가타였다고 한다면, 대만이 갖는 비슷한 가치를 꿰뚫어 본 이는 이노우에 고와시였다. 청일전쟁 개전 직후인 1984년 10월 11일 그 직전까지 문부대신을 맡고 있던 이노우에는 원로 이토 히로부미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대만을 점유하게되면 "서해 ·조선해 [남해를 이르는 것으로 보임] · 동해의 항행권을 손에 넣게 돼 동양의 문호를 여닫을 수 있고, 나아가 오키나와와 야에야마 군도와 서로 연락하게 되고,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의 출입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고 썼다. 실제 대만을 획득하자고 요구한 것은 주로 일본 해군 쪽이었다.
나아가 이노우에는 만약 대만이 다른 나라의 손에 떨어진다면 "오키나와 제도의 안녕이 방해를 받는다"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 1884년 발생한 청불전쟁 때 프랑스가 대만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 P52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매개로 ‘한미 · 미일 양 동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안전보장 체제 안에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이 안전보장 체제를 기능하게 하는 것이 일본, 그중에서도 오키나와에 존재하는 미군기지이다. - P72

미국은 [일본과] 오키나와 반환 교섭을 진행하는 시점에 이미 중국과 화해를 해야겠다는 뜻을 굳히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이 패전한 뒤 재개된 중국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을 지지했다. 또 미중은 한국전쟁에서 실제 맞붙어 싸운 숙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이 중국과 화해를 추진했던 것은 북베트남에 영향력을 가진 중국에 접근해 베트남전쟁이라는 늪에서 빠져나오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국은 정식 수교국을 대만에서 중국으로 바꾸면서 1979년 1월 미중 국교 정상화를 단행했다. 그와 동시에 앞서 언급한 대로 미대동맹도 끝을 맺게 된다. - P77

미국은 1972년 2월 27일 미중 공동성명(상하이 코뮤니케)을 통해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중국 쪽의 주장에 대해 "인식한다acknowledge"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도 그해 9월 29일 나온 중일 공동성명에서 이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밝혔다. 양쪽 모두 "승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게다가 미일 두 나라는 대만해협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을전제로 삼고 있어 ‘대만을 무력으로 합병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는내정 문제일 뿐‘이라는 중국의 주장까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미일과 중국이 화해를 한 뒤에도 미일안전보장조약상의 ‘극동‘의 범위에서 대만이 제외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확인해 두려 한다. - P79

미일동맹은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매개로 비로소 극동 지역의 안전보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미일동맹을] ‘일본적 시점‘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제3자적 시점‘을 섞어 이해하는 것이 유익하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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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일동맹은 ‘기지 동맹‘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동맹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 P33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미군은 일본이 제공하는 기지를 일본을 방위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극동‘ 유사사태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극동유사사태는 일본에 대한 무력공격, 즉 일본 유사사태가 발생하진 않았지만 극동, 이를테면 한반도에서 북한이 한국을 무력공격하는 상황 등이 발생했을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이에 대해 정하고 있는 것이 미일안전보장조약의 ‘극동 조항‘이다. - P34

우리가 극동유사사태와 관련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일본적 시점‘이다.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활용하는 것은 ‘불합리한‘ 특권이다. 이들이 이런 권리를 활용해 우리를 일본과 관계없는 미국의 전쟁에 끌어들일 수 있다. 이를 못하게 하기 위해 미군의 행동에 여러 제약을 가해야 한다." 이런 ‘일본적 시점‘과 미일동맹은 ‘극동 1905년 체제‘를 지탱하는 ‘한미·미일 양 동맹‘ 내의 하나의 기능이라는 제3자적 시점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현실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괴리가 가로놓여 있다. - P37

미화동맹은 미국과 중국의 국교 정상화(1979년 1월 1일)이후인 1980년 1월 1일 종료됐다. 하지만 미국은 이후에도 대만관계법(1979년 4월 10일 제정)에 따라 "대만에 대한 무기 공급을 실시하고, 대만에 대한 위협에 대항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중국이 무력을 동원해 통일을 시도할 경우] 대만을 방위할지 여부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 정책을 취하고 있다. 대만과 모호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동맹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P46

미국은 애초 냉전 초기엔 아시아·태평양에서도 유럽의 나토와 비슷한 다국간형동맹망을 결성하려 했다. 한국은 다국간형동맹망 자체에 대해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강한 반일 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이 틀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또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과 교전했던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는 전후에도 일본을 여전히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가입을 전제로 구상되는 다국간형동맹망 자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중략)
이렇게 [참가 대상국 사이에] 보조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선 [유럽과 같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간형 동맹망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허브 앤드 스포크형 동맹망이 정착되기에 이른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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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동맹은 [따로 떨어진 양자 동맹이 아닌] ‘한미·미일 양 동맹‘이라는 안전보장 시스템 내 하나의 기능이라고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안전보장 시스템의 배경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필자가 ‘극동 1905년 체제‘라고 부르는 지역 질서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전통적 패권국인 중국이 약체화 혹은 자제적이 됐다는 것을 전제로, 일본과 일본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한반도(적어도 그 남부)와 대만이 힘의 뒷받침에 의해 같은 진영에 묶이게 된 지역 질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질서는 1905년 미국·영국·러시아의 국제적인 승인을 얻으며 처음 만들어졌다(단, 필자에게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1945년 일본 제국이 붕괴한 뒤에도 ‘극동 1905년 체제‘는 지속됐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패전 이후]이 체제를 힘으로 뒷받침하게 된 것은 ‘한미·미일 양 동맹‘이라는 안전보장 시스템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동아시아 내] 안전보장 환경의 악화에 따라 한미일 안전보장 협력이 강화된 것은 전략적·지정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 P7

중국은 ‘극동 1905년 체제‘와 같은 지역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동아시아 지역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과제는 지역의 모든 당사국이 합의할 수 있는 지역 질서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에 따라 현재 상황을 평화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외교뿐 아니라 억지력 구축이 불가결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 P10

포츠담 선언이 누구 이름으로 발표됐는지에 대해 왜 신경을 쓰게 됐는가 하면, 이 회담의 참가자와 서명자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츠담 회담에 참가한 연합군 정상이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시험에 나온다면,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영국 총리와 회담 중에 그와 교체된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후임 총리, 그리고 소련의 최고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 Joseph Stalin 이라고 답해야 한다. 이렇게 쓴다면, 동그라미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포츠담 선언이 누구 이름으로 발표됐느냐라는 문제에는 트루먼, 처칠(애틀리가 아니다)에 더해 중국(당시는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라고 답해야 한다. 심지어 장제스는 포츠담에 오지 않았는데도, 트루먼 대통령이 그의 동의를 얻어 대신 서명했다. - P12

이런 일본 쪽의 희망이나 사정에 기초한 생각을 이 책에선 ‘일본적 시점‘이라 부르겠다. 일본적 시점이 생겨나는 데엔 주로 두 가지 배경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일국평화주의‘이다. 일국평화주의라는 것은 일본과 일본 바깥 사이에 선을 그을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일본의 책임과 관여는 전자(즉, 일본 내부)에 한정해야 한다고 보는 전후 일본 특유의 안전보장 관념이다. 예를 들어 "일본이 전쟁에 말려들지 않으면 그것으로 됐다"는 생각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필요최소한론‘이라고 부르는 헌법 해석이다. 잘 알려진 대로 헌법 9조는 일본은 ‘전력‘을 갖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전제 위에서 일본이 자위대와 같은 ‘실력‘을 갖기 위해선 자위대가 ‘전력‘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자위대는 "자위를 위한 필요최소한의 실력"일 뿐 ‘전력‘이 아니기 때문에, [자위대를 유지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 아니라는 공식적인 [헌법] 해석이 나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필요최소한론이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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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음식, 특히 태국과 베트남 음식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아요. 특히 서구 사회 어디에서도 베트남 음식점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이는 안타깝게도 베트남 전쟁과 관련 있어요. 베트남 전쟁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이 새로 정착한 낯선 나라에서 먹고살기 위해 음식점을 열면서 베트남 음식이 널리 알려진 거예요. 우리에게도 이제는 꽤 익숙한 베트남 음식은 참 맛있는데, 널리 알려진 이유는 엄청 슬프지요. - P75

그런데 태국 음식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유명해졌다는 사실, 아나요?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미국 군인들이 가까운 태국으로 종종 휴가를 떠났거든요. 태국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미국 군인들을위해 맵지 않은 볶음 국수를 만들어 팔았지요. 그 맵지 않은 볶음 국수가 팟타이예요. 팟타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태국의 대표 음식이 되었답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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