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정부의 원로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총리는 아오키 슈조 외무대신에게 제출한 건의서 외교정책론 (1890년3월)에서 "국가 독립 자위"를 위해 국토인 "주권선"과 "주권선의 안위와 긴밀하게 상관관계를 갖는 구역"인 "이익선"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익선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가? 야마가타는 조선이라고 논했다. [이 기준을 놓고 볼 때] 한반도가 일본의 적대 세력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근대 일본의 국가안전보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 P50

조선의 전략적 ·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한 것이 야마가타였다고 한다면, 대만이 갖는 비슷한 가치를 꿰뚫어 본 이는 이노우에 고와시였다. 청일전쟁 개전 직후인 1984년 10월 11일 그 직전까지 문부대신을 맡고 있던 이노우에는 원로 이토 히로부미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대만을 점유하게되면 "서해 ·조선해 [남해를 이르는 것으로 보임] · 동해의 항행권을 손에 넣게 돼 동양의 문호를 여닫을 수 있고, 나아가 오키나와와 야에야마 군도와 서로 연락하게 되고,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의 출입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고 썼다. 실제 대만을 획득하자고 요구한 것은 주로 일본 해군 쪽이었다.
나아가 이노우에는 만약 대만이 다른 나라의 손에 떨어진다면 "오키나와 제도의 안녕이 방해를 받는다"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 1884년 발생한 청불전쟁 때 프랑스가 대만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 P52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매개로 ‘한미 · 미일 양 동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안전보장 체제 안에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이 안전보장 체제를 기능하게 하는 것이 일본, 그중에서도 오키나와에 존재하는 미군기지이다. - P72

미국은 [일본과] 오키나와 반환 교섭을 진행하는 시점에 이미 중국과 화해를 해야겠다는 뜻을 굳히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이 패전한 뒤 재개된 중국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을 지지했다. 또 미중은 한국전쟁에서 실제 맞붙어 싸운 숙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이 중국과 화해를 추진했던 것은 북베트남에 영향력을 가진 중국에 접근해 베트남전쟁이라는 늪에서 빠져나오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국은 정식 수교국을 대만에서 중국으로 바꾸면서 1979년 1월 미중 국교 정상화를 단행했다. 그와 동시에 앞서 언급한 대로 미대동맹도 끝을 맺게 된다. - P77

미국은 1972년 2월 27일 미중 공동성명(상하이 코뮤니케)을 통해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중국 쪽의 주장에 대해 "인식한다acknowledge"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도 그해 9월 29일 나온 중일 공동성명에서 이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밝혔다. 양쪽 모두 "승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게다가 미일 두 나라는 대만해협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을전제로 삼고 있어 ‘대만을 무력으로 합병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는내정 문제일 뿐‘이라는 중국의 주장까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미일과 중국이 화해를 한 뒤에도 미일안전보장조약상의 ‘극동‘의 범위에서 대만이 제외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확인해 두려 한다. - P79

미일동맹은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매개로 비로소 극동 지역의 안전보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미일동맹을] ‘일본적 시점‘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제3자적 시점‘을 섞어 이해하는 것이 유익하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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