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로 이주했지만,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과는 차별되는 법적, 문화적 위상을 갖고 자리 잡아가고 있다. - P14

한국어가 모국어인 내가 영어로 쓴 책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이 책은 ‘중층적인 번역의 과정‘과 ‘시차의 글쓰기‘ 그 자체다. 번역은 단지 언어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시간의 문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배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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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인민의 초상 - 개혁개방에서 시진핑 시대까지 중국의 두 세대가 건너온 강 걸작 논픽션 29
피터 헤슬러 지음, 박경환.윤영수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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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저자의 전작 <갑골문자>에 비해 번역이 최소한 백만 배쯤 좋다. 잘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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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따르면 수감 생활에서 가장 끔찍한 부분은 잦은 매질이나 중노동, 심지어 끝없이 계속된 굶주림도 아니었다. 바로 사상 개조였다. 한 희생자는 노동 수용소를 세심하게 구축된 정신적 아우슈비츠라고 묘사할 정도였다. 영국인 무선 통신사 로버트 포드는 4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친 뒤 이렇게 말했다. <매질을 당한 뒤에는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뿐더러 마음 한구석에서 고통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사상 개조를 통해 정신적으로 고문을 당하면 돌아갈 곳이 아무 데도 없다. 사상 개조는 그 사람의 가장 심오하고 깊은 내면에 영향을 끼치고 정체성 자체를 공격한다.>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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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마오쩌둥에게 다가갈 때면 뒤꿈치를 들고 걷거나, 아부를 통해 자존심을 세워 주거나, 의심이나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을 피하면서 주석의 예측 불가능한 감정기복에 대처해야 했다. 또한 자신의 의도를 추측하도록 만들려는 의도에서 기인한 주석의 잦은 모호한 발언에서 진의도 파악해야 했다. 마오주석 본인은 특히 경제 분야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의도적으로 모호한 단어들을 사용했다. 실제로 그는 경제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 P355

고급 합작사는 농부들에게서 땅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농부들을 당 간부의 지휘 아래 일한 만큼 노동 점수를 받는 농업 노동자로 만들었다. 집산화의 최종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농부들은 이제 국가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채무 노동자로 전락했다. - P368

소상인들은 파산을 면치 못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가게를 그들과 가족의 거처로 사용하면서 가게의 돈 통에서 생활비를 충당하던 터였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개인 소지품까지, 때로는 그들이 사용하던 솥과 프라이팬, 심지어 아기 침대까지 국가에 귀속되었다. 보상금은 담뱃값으로 쓰기에도 빠듯할 정도였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국가에 고용되어 한달에 20위안씩 받으면서 계속 가게를 운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제 굶주림에 직면했다.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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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공산당은 우리에게 최고의 스승이며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산업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농업이 집산화되었다. 중국도 다르지 않을 참이었다. <농업이 사회주의화되지 않고는 사회주의가 완성되거나 견고해질 수 없다. 소비에트 연방의 경험을 참고해서 마오쩌둥은 이렇게덧붙였다. 이 과업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든 일이 될 것이다>. - P323

집산화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농민들은 <비애국적>이라거나 <장제스 노선>, <낙오자>라는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독립적으로 남길 선호한 농부들이 그들을 <자본주의자>나 <독불장군>이라며 비난하는 내용이 적힌 종이를 등에 붙이고 다닌 경우도 있었다.(중략)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공동으로 농사짓길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대출이 막혀 버렸다. - P325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가치 있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분배할 것을 요구했다. <음식이 있으면 모든 사람이 나누어 먹고 돈이 있으면 모든 사람이 써야 한다.> 결국 두려움과 시샘 때문에 가난이 표준이 되었다. - P326

여러 성(省)을 담당하던 권력의 상층부에서 나온 한 대략적인 추산에 따르면 지방 간부 중 약 절반이 비리와 연루되어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새로운 권력 집단이 등장했다. 요컨대 당 간부들은 열 가구중 하나꼴로 집에 하인을 두고 높은 소작료를 받고 땅 투기를 하면서 부농처럼 살았다. - P328

당에는 이 모든 문제에 관한 해법이 있었다. 집산화로 가는 길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모든 문제는 투기꾼과 사재기꾼, 부농과 자본가의 탓이었다. 앞서는 수년에 걸쳐 반혁명주의자들과 그 밖의 사회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적들을 겨냥해서 조직적인 공포정치를 실시했던 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해법이었다. - P332

가축을 도살하고, 재산을 숨기거나 파괴하고, 일에서 손을 놓는 등의 방식으로 표출된 대중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농촌이 집산화되어 간 속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치적인 목적도 한몫을 차지했다. 요컨대 서열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당 관리들이 주석의 칭찬 한마디를 기대하며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열띤 경쟁을 벌인 결과였다.(중략) 당 관리들은 곳곳에서 농민들을 합작사에 강제로 편입시켰다. 1953년에 약 10만 개에 불과했던 합작사는 1955년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60만 개가 넘었으며 전체 농민의 40퍼센트가 합작사에 소속되었다. - P334

수확물을 통제한다는 것은 농촌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지도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 P338

대규모 국영 사업체가 개인이나 가족이 운영하던 소규모 시설을 대체하면서 곡물 저장과 관련된 고질적인 문제들 대부분이 통제 불능 상태에 놓였다. 일례로 1954년 1월에 중국 동부의 모든 성(省)에서 곡물이 변질되면서 열이 발생하고 눅눅해지는 문제가 급증한다는 보고서가 올라왔다. 상하이 한 곳에서만 4만 톤의 곡식에 곰팡이가 슬었다. 질보다 양을 더 중시하는 지방 간부들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들의 목표는 윗사람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많이 거두어들였는지 보여주는 것일 뿐 맡은 바 임무를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는 전체적인 무게를 늘릴 요량으로 곡물을 의도적으로 습기에 노출시켰다. 몇몇은 심지어 물을 부어서 부피를 늘리기도 했다. - P344

이런 보고서들 대부분은 인재가 기근의 원인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 지적했다. 하지만 8월에 들어 중앙 위원회는 1949년 이래로 발생한 최악의 기근을 <자연재해> 탓으로 돌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농촌 사람들을 돕는 대신 곡물과 기름, 면화 등의 물품에 대해 정부에서 정한 물량을 확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이런 물품들은 하나같이 <도시를 산업화하고 상공업을 사회주의 방식으로 개혁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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