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와타나베 씨의 수중에는 3000만 원 정도의 예금이 남아 있다. 생활보호를 받지 못한 채 언젠가 예금이 다 떨어질 것이라는 공포와 싸우며 살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예금이 바닥을 드러내면 생활보호를 받게 되어 의료와 돌봄 서비스를 안심하고 받을 수 있게 된다. 바꿔 말하면 생활보호를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보고자 애쓰는 고령자들은 노후를 안심하고 살 수가 없는 것이다. - P199

구명 구급 현장에서는 어떤 사정이 있든 생명을 구하는 것이최우선 과제다. 그렇기에 눈앞에 있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진 환자를 바라보며 심정이 복잡해질 때가 있다고 한다. 한 명의 의사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목숨을 구한 것이 진정으로 이 사람에게 행복한 일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 P209

이것은 결코 뉴스에서나 보고 들을 수 있는 남의 일이 아니다. 다케다 씨는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이었으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노후파산의 위기에 몰려 있다. - P218

흔히 노후파산을 도시 지역의 독거 고령자들 사이에서만 확산되고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지방에서도 도시와 마찬가지로 독거 고령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데이터가 있다. - P225

생활보호비를 받는 것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 같은 정신적인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런 경향은 도시보다 지방이 더 강하지 않을까?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로 가득한 마을이기에 체면 문제도 있고, ‘가족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라고 가족까지 비난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기타미 씨도 생활보호에 강한 저항감을 느끼는 듯했다. - P239

주위가 모두 아는 사람들이기에 느낄 수 있는 안도감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위가 모두 아는 사람이기에 ‘한심한 꼴은 보이고 싶지 않다‘든가 ‘친척에게 창피를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강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때때로 복지 제도를 이용하기 어렵도록 방해하기도 한다. - P240

"솔직히 말씀드리면 의지할 상대가 한 명도 없는 사람을 지원하기가 더 수월하다고 느낄 때도 많습니다. 어중간하게 친족 관계가 있으면 동의를 얻으려 해도 의견 차이로 진전이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 P265

성년후견인 제도를 가로막는 ‘벽‘은 만연한 이기주의와 후견인 제도에 대한 몰이해만이 아니다. 판단 능력을 잃기 전에 자신의 노후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믿을 수 있는 친족이 없다면 자신의 노후를 누구에게 맡길지 결정해놓을 필요가 있는 시대인 것이다. - P271

애초에 돌봄 서비스 보험 제도의 창설 목적 중 하나는 가족을 돌봄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돌봄=가족이 해야 할 일‘이라는 인식이 아직도 남아있다. 홀로 생활하는 데 불편이나 부자유를 느꼈을 때 적극적으로 돌봄 서비스를 이용토록 유도하려면 이런 사회의 인식을 바꿔나가는 일도 중요하지 않을까?
돌봄 서비스는 우리 모두가 노후에 당연하게 이용할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 P273

도쿄 도내의 지역 포괄 지원 센터에는 노후파산에 처해 생활보호 등을 신청하는 고령자의 수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노후파산이 확대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고령자를 지탱해야 할 ‘일하는 세대‘에서도 장래에 노후파산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심각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노후파산 예비군‘이다. - P275

가족이 있어도 노후파산을 피할 수 없다는 가혹한 현실... 그중에서도 부모를 돌보기 위해 자녀가 일을 그만두고 부모와 함께 살다가 공멸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 P283

이와 같이 부모와 자식이 공멸하는 새로운 노후파산이 잇따르는 데는 어떤 배경이 있을까? 그중 하나는 ‘고용‘이라는 사회를 지탱하는 토대가 흔들리면서 미래에 대비할 여력이 없는 노동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구조적인 요인이다. 또한 ‘가족‘의 형태가 변하면서 서로를 지탱하는 힘(유대)이 약해지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리라. 사회 보장 제도가 이런 ‘초고령 사회‘의 실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이런 현상을 가속시키고 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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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부터 특히 조선족 여성들 상당수가 한국바람을 타고 연변을 떠났는데, 이들은 대체로 한국어와 중국어 모두에 능통한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한국인 남성과 결혼했다. 이러한 여성 인구의 감소는 조선족 민족 공동체 내에서 저출생 문제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이들은 귀환하여 가정을 꾸리는 대신 돈을 좇아 떠난 이들로 간주되어 도덕적인 면에서도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중반 북한의 식량 위기 시기에 두만강을 건너온 탈북 여성들이 그 빈자리를 점차 채워 나갔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많은 북한 여성들이 연변의 변경 소도시나 농촌에 정착해 조선족 또는 한족 남성과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 - P271

법률상의 복잡성과 보안상의 우려로 북한 출신 여성들의 삶은 감춰져 있지만, 이들이 변경지역 공동체에서 사회적 구성원임은 암암리에 묵인되었다. 대체로 이들은 조선족및 한족과 잘 융합되는 것으로 보였지만 중국인 남편으로부터 신체적·성적 학대나 노동력 착취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일부는 이를 피해 난민 자격으로 한국에 정착하기도 했다. - P272

일부 북한 사람들은 연변과 북한 정부 간 계약에 따라 식당일을 하러 연변에 오기도 한다. 특히 연변의 북한 식당에서 이들은 북한식 한복을 입고 북한 노래를 부르며 악기를 연주하는 이국적 타자로 소비되지만, 동시에 조선족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맡았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한국어에 능통한 노동자이기도 하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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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이주자들은 더는 10년 전처럼 한국 꿈을 예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해온‘ 일들과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일들, 그리고 지금부터 또는 앞으로 ‘하게 될‘ 일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재평가하고 성찰하기 시작했다. - P226

이러한 재평가와 함께 코리안 드림, 그리고 한국바람에 대한 새로운 서사가 등장했다. 한국에 가지 않은 이들, 즉 연변에 머무른 채 한국바람이 몰고 온 경기 호황의 수혜를 입은 공무원, 지식인, 사업가 등이 오히려 한국에 다녀온 이들보다 더 풍족하게 산다는 것이다. 이는 이동과 떠남을 결핍의 징후로 간주하는 반면 비이동(머묾)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을 나타내는 근거로 인식하는데, 이렇듯 새롭게 부상한 담론은 조선족에게 해외로 떠나기보다는 중국 내에 정착할 것을 말하는 사회적 권유를 담고 있다. - P228

이렇듯 ‘사장님 자아‘를 지향하도록 하는 사회적 권유는 내가 ‘포스트 한국바람‘이라 부르는 국면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포스트 한국바람‘은 한국바람 시대와 명확히 분리되는 일직선적 발전 단계라기보다는, 일종의 복합지대적 사회 풍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229

 중국의 경제개혁 이후로 대다수 조선족은 끊임없는 이동을 불가피한 삶의 조건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중국이 글로벌 경제 강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연변에서는 비이동이 점차 ‘풍요‘와 ‘안정‘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이동에 대한 논쟁도 점점 더 다각화되고 있다. - P230

지난 30여 년간 한국에서 일하며 노동자로 살아온 조선족 이주자들은 ‘생산 수단이라고는 몸 하나뿐인 육체노동‘ (3장 참조)이 중국보다 한국에서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 P230

 2000년대 후반 들어 중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귀환자들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해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선족 귀환자 대부분은 한국에서 단순 육체노동에 종사했기 때문에 연변으로 돌아와서도 시장성 있는 기술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중국 내 신규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웠고, 취업이나 창업 역시 쉽지 않았다.(중략) 한국과 연변을 오가는 반복적 이주는 연변에서 일반화된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유동 인구는 상대적으로 경제 형편이 좋은 조선족들에게서 무시를 받곤 했다. 이들은 단순 육체노동을 하는 조선족 이주자들을 낮춰 보았고, 신문이나 조선족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한국행이 "근시안적 판단"에 불과하다는 사회적 경고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 P231

 한국에 다녀온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은, 훌륭한 ‘수준‘이나 ‘인격적 자질‘을갖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경향을 보인다. 전자는 국제 이주노동을 세련된 매너를 습득하게 하는 세계시민적 또는 대도시적 경험으로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그것을 하층 계급의 지위와 매너를 견고하게 하는 일생일대의 선택으로서 이해한다. - P234

중국의 고위 공산당 간부들이나 자국 경제의 부흥과 함께 성공한 이들 중에는 코리안 드림을 좇았던 이들을 비판하거나 무시하는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 P245

이러한 변화 속에서 연변의 지식인과 정부 관료들은 이제 한국에 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한국을 ‘일밖에 모르는‘ 삶에 종속된 곳으로 보며, 조선족 이주자들은 한국 사람들 ‘밑에서‘ 일하는 사회 계층에 속한다고 본다. - P246

‘한국식 말투‘ 또는 ‘서울말 흉내‘는 귀환자들이 소위 ‘한국물‘, 즉 한국적 생활 방식을 얼마나 체화했는지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예컨대 연변 사람들은 서울 말투를 흉내 내는 조선족 이주자들이 ‘어색하게‘ 연변 말투와 섞어 말한다고 조롱하곤 했다. 나는 이러한 귀환자들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연변의 조선족들을 자주 만났다.(중략) 한국이 여전히 송금, 세련된 생활 방식, 패션, 근대 문화의 원천으로서 강력한 매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가기‘는 이제 연변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지 못한다. 오히려 한국식 말투와 옷차림은 결핍의 표시, 즉 중국의 새로운 시장경제에서 자리 잡지 못하는 사람의 증거로서 해석되고 있다. - P248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머리를 쓰지 않아요. 그저 ‘몸‘만 쓰죠. 그거 아세요? 나는 한국에서 돌아온 친구들이랑 대화가 안 통해요. 다들 한국에서 10년씩 일하다가 머저리가 되어버렸어요. 하지만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하면 사업을 계속 키울지 고민하지요. - P254

이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삶은 더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력 부졸, 다시 말해 결핍을 드러내는 표시로 간주된다. - P255

이제 한국바람은 1990년대 초만큼 조선족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연변을 오래 비움으로써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데 필수적인 사회적 관계망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이들이 느끼는 이질감과 상실감은 정서적 차원을 넘어, 문화적이고 실제적인 것이 되었다. 성철 씨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알아야 할 무언가를 놓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 ‘무언가‘는 경제적·사회적 성공을 위한 암묵적인 행동의 문법으로써 성철 씨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열쇠가 될지도 모르지만, 이미 성공 궤도에 오른 사람들과 최근 귀국한 이들 사이의 격차는 점점 더 넓어져 갈 뿐이다. - P260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교차점이자 두 개의 꿈이 경합하는 변경지역인 연변을 지난 30년간 지배해온 욕망, 즉 ‘머무르기 위한 떠남‘과 ‘떠나기 위한 머묾‘은이제 재검토와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기에 이주노동자가 아닌 사장이 되어 "악순환을 끊어내라"는 사회적 호소가 더해지면서, 코리안 드림은 현재 위기에 직면해 있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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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원의 연급 수입이 있으면 건강한 동안에는 독신 생활을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수술이 필요한 병에 걸리거나 부상으로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언젠가 노후파산에 처하게 된다. 설령 저축해놓은 돈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 시기를 어느 정도 늦출 수는 있지만 노후파산을 피할 수는 없다. - P17

아직은 건강한 고령자도 언젠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질지 모른다. 지금의 현역 세대도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고령자가 된다. 그리고 노후를 맞이했을 때 비로소(아마도 모두가) ‘주위에 기대지 않고 살고 싶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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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도시는 24시간 내내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마사지를 받으며 돈을 쓰는 환경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연길에서는 최근 성행 중인 새로운 소비 산업에 종사하고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혜택을 누리기 위해, 연변의 농촌은 물론 중국 각지로부터 한족과 조선족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다. 현지인들 사이에는 ‘한국 돈이 없었다면 이처럼 왕성한 소비와 도시화는 불가능했으리라‘는 믿음이 강하게 존재한다. - P187

조선족 이주자들은 농촌과 도시, 소도시와 대도시, 나아가 중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복잡한 이주 서사를 펼치면서, 송금주도형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 P189

점심을 먹으며 왕 사장은 연변 지역의 ‘3대 산업‘에 대해 통찰 섞인 농담을 던졌다. 즉, 연변에서의 ‘중공업‘은 연기가 나는 불고기 식당이고, ‘경공업‘은 서비스 및 여가 산업인 노래방이며, ‘수공업‘은 수작업을 요하는 마사지 업소라는 것이었다. 농담을 들은 이들 모두 웃으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물론 이는 연길에서 핵심 산업이 된 쾌락 위주의 소비 산업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를 담고 있었다. 왕 사장이 언급한 주요 업종인 불고기 식당, 노래방, 마사지 업소는 도시의 네온사인을 밤낮으로 밝히며 도시 경제를 견인하는 주요 엔진이다. - P191

그와 동시에 이 농담은, 변방 지역인 연길에는 전도 유망한 산업이나 벌이가 좋은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은근한 무시를 담고 있었다. 연변, 특히 그 수도인 연길이 생산 활동을 위한 노동의 공간이 아니라 즉각적인 만족을 위해 돈을 흥청망청 쓰기만 하는 공간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족이 ‘한국 돈‘에 의존하게 된 상황에 대한 우려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 한국 돈은 두 가지 함의를 지닌다. 우선 한국 돈을 벌기 위해 조선족은 한국으로 떠나기를 꿈꾸면서 중국에서는 열심히 일하지 않고 게으르게 지내며 돈을 낭비한다는 비판을 포함한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 돈은 연변에 거주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이 변경 지역의 더 높은 경제 수준과 소득을 보장하기 때문에 연변 경제의 ‘심장‘으로도 이해된다. - P192

조선족은 대부분 연변과 한국을 오가며 국제 이주의 양상을 보이는 데 반해, 한족은 연변 외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오거나, 연변 내 여러 지역을 오가는 국내 이주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즉, 한족 역시 이동하고 있으나 조선족과는 다른 이동성을 보인다. - P193

 ‘조선족 고객‘과 한족 노동자‘라는 식의 구분이 존재하더라도 두 집단 모두 한국바람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민족적 특성과 광범위한 경제적·문화적 힘이 함께 어우러져 특수한 두민족이 상호 의존하는 송금 경관을 구성한다. - P194

 이렇듯 한족은 한국으로의 이주 기회를 상대적으로 덜 갖고 있음에도, 그들 또한 한국바람이 불러일으킨 극적인 사회 변화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 P194

정식 호구제 등록 없이 이촌향도를 감행한 농민들은 도시민으로부터 차별을 받고 국가 보호와 시장 활동으로부터도 배제된다. 그러면서도 미디어와 사회담론은 이들을 ‘국가의 구제가 절실한‘ 극빈층으로 규정하면서, 도시의 일부가될 권리를 인정해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배제적 포용" 또는 "포용적 배제" 체제 아래에서 이주자들은 교양과 질서의식을 갖춘, 생산적이며 책임 있는 새로운 도시 주체로 거듭날것을 요구받는다. 이 체제는 빈부 격차나 도농 격차를 개인의 ‘수준‘에 달려 있다고 보면서, 자기 변혁을통해 이상적인 중산층 소비자이자 시민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도시 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농민 출신 이주자들은 그렇게 도시의 ‘타자‘로 형성되어 갔다. - P197

가난한 농민이든 비교적 잘사는 도시민이든, 연변에서는 그 누구도 한국바람을 피하기 어려웠다. - P202

란 사장을 포함해 농촌에서 연길로 이주한 조선족 노동자들은, 한국으로 가는 것만이 농민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을 극복하고 안락한 도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경로라고 여기곤 했다.
이러한 도시로의 이주는 연변 농촌의 민족 구성을 급격하게 바꾸었다. 대다수 조선족 농촌 지역은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조선족이 경작하던 토지를 남겨둔 채 한국이나 다른 중국의 대도시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해당토지는 농민 개인 소유가 아니지만 국가로부터 30년간 임대받은 것이어서, 본래의 임차권자가 떠나면 누군가가 재임차해 경작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행 기회가 훨씬 적은 한족 농민들이 조선족 지역으로 이주해 조선족이 ‘버린‘ 토지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 P205

한국에 가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보내주는 한국 돈에 의존하는 삶은 이제 조선족 가정에서 매우 흔한 일이 되었다. - P211

‘한국물을 먹는다‘는 표현에 담긴 조롱은 조선족 귀국자들의 사소한 행동이나 태도를 지적하는 데 사용된다. 예컨대 ‘한국물을 먹은 이들은 한국 사람처럼 차려입고 화장을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처럼 보이지 않는다거나, 연변과 서울 말투를 섞어 쓰며 한국 사람처럼 말하려고 해보지만 제대로 해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한국 스타일을 모방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면, 연변에서는 야유를 받거나 놀림거리가 된다. 또한 모방은 ‘결핍‘의 증명으로도 여겨진다. ‘한국물을 먹은‘ 이들은 실제 경제적 지위와는 관계없이 그저 거들먹거리기 위해 돈을 써댄다고 여겨진다. 중국에서는 그만큼 큰 돈벌이가 없기에 돈이 떨어지면 다시 한국으로 갈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분명히 ‘한국물을 먹다‘라는 표현에는 한국 문화, 스타일, 그리고 돈에 중독된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 대한 과장 섞인 경멸이 담겨 있다. 한국에서 돌아온 조선족들이 과소비를 한다는 이미지는 그들의 자녀에게까지 투영된다. - P212

젊은이들은 외식을 하고 돈을 ‘물처럼‘ 써댔는데, 이는 부모가 한국에서 보내오는 ‘비상금‘ 덕분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저녁에는 마치 그들이 한턱을 내야 한다는 기대가 존재했다. ‘한국 돈‘ 탓에 조선족 젊은이들이 업무를 게을리하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다는 불만도 제기되었고, 이런 소비 행태는 연변의 고용주들에게 골칫거리로 여겨지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조선족이 한국에서 버는 만큼 벌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일하려 들지 않는다는 인식도 퍼져 있었다. - P214

연변에서 만난 한국인 고용주들은 ‘게으른 조선족‘과 ‘부지런한 한족‘으로 고정된 민족 이미지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개인의 경험들이 쌓이며 그러한 고정 관념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었다. 예컨대 조선족은 급여가 높은 일자리를 찾아 계속 이직할 생각만 하고, 회삿돈 관리에 정직하지 않으며, 시간이나 돈 관리에 있어서도 책임감이 없다고 한국인 고용주들은 이야기했다. 그에 반해 한족은 성실하고 믿음직하게 여겼다. 연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조선족이 부모나 다른 가족으로부터 ‘쉽게 받는 돈‘ 때문이라고 해석하며, 그 갑작스러운 물질적 풍요가 조선족의 직업 윤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 P217

조선족의 국제 이주는 연변을 유동적 상황으로 몰아넣으면서 문화적·경제적 특성을 재정의하도록 요구했다. 한족은
‘유동하는 인구‘, ‘민족적 타자‘, ‘소수 민족‘으로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연변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이들 한족 노동자들은 연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나의 집주인과 같은 조선족에게 민족 차이에 따른 언어적·문화적 불편함을 안기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성장하는 산업인 서비스업에서 조선족 고객들을 상대로 일하며 연변 경제를 이끌고 있기도 했다. - P218

비록 한국 돈이 만들어낸 송금 경제는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었지만, 나는 연변이 이제 ‘한국바람‘에서 ‘중국 바람‘으로 넘어가는 전환 국면에 들어섰음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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