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이주자들은 더는 10년 전처럼 한국 꿈을 예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해온‘ 일들과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일들, 그리고 지금부터 또는 앞으로 ‘하게 될‘ 일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재평가하고 성찰하기 시작했다. - P226

이러한 재평가와 함께 코리안 드림, 그리고 한국바람에 대한 새로운 서사가 등장했다. 한국에 가지 않은 이들, 즉 연변에 머무른 채 한국바람이 몰고 온 경기 호황의 수혜를 입은 공무원, 지식인, 사업가 등이 오히려 한국에 다녀온 이들보다 더 풍족하게 산다는 것이다. 이는 이동과 떠남을 결핍의 징후로 간주하는 반면 비이동(머묾)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을 나타내는 근거로 인식하는데, 이렇듯 새롭게 부상한 담론은 조선족에게 해외로 떠나기보다는 중국 내에 정착할 것을 말하는 사회적 권유를 담고 있다. - P228

이렇듯 ‘사장님 자아‘를 지향하도록 하는 사회적 권유는 내가 ‘포스트 한국바람‘이라 부르는 국면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포스트 한국바람‘은 한국바람 시대와 명확히 분리되는 일직선적 발전 단계라기보다는, 일종의 복합지대적 사회 풍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229

 중국의 경제개혁 이후로 대다수 조선족은 끊임없는 이동을 불가피한 삶의 조건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중국이 글로벌 경제 강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연변에서는 비이동이 점차 ‘풍요‘와 ‘안정‘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이동에 대한 논쟁도 점점 더 다각화되고 있다. - P230

지난 30여 년간 한국에서 일하며 노동자로 살아온 조선족 이주자들은 ‘생산 수단이라고는 몸 하나뿐인 육체노동‘ (3장 참조)이 중국보다 한국에서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 P230

 2000년대 후반 들어 중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귀환자들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해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선족 귀환자 대부분은 한국에서 단순 육체노동에 종사했기 때문에 연변으로 돌아와서도 시장성 있는 기술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중국 내 신규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웠고, 취업이나 창업 역시 쉽지 않았다.(중략) 한국과 연변을 오가는 반복적 이주는 연변에서 일반화된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유동 인구는 상대적으로 경제 형편이 좋은 조선족들에게서 무시를 받곤 했다. 이들은 단순 육체노동을 하는 조선족 이주자들을 낮춰 보았고, 신문이나 조선족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한국행이 "근시안적 판단"에 불과하다는 사회적 경고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 P231

 한국에 다녀온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은, 훌륭한 ‘수준‘이나 ‘인격적 자질‘을갖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경향을 보인다. 전자는 국제 이주노동을 세련된 매너를 습득하게 하는 세계시민적 또는 대도시적 경험으로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그것을 하층 계급의 지위와 매너를 견고하게 하는 일생일대의 선택으로서 이해한다. - P234

중국의 고위 공산당 간부들이나 자국 경제의 부흥과 함께 성공한 이들 중에는 코리안 드림을 좇았던 이들을 비판하거나 무시하는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 P245

이러한 변화 속에서 연변의 지식인과 정부 관료들은 이제 한국에 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한국을 ‘일밖에 모르는‘ 삶에 종속된 곳으로 보며, 조선족 이주자들은 한국 사람들 ‘밑에서‘ 일하는 사회 계층에 속한다고 본다. - P246

‘한국식 말투‘ 또는 ‘서울말 흉내‘는 귀환자들이 소위 ‘한국물‘, 즉 한국적 생활 방식을 얼마나 체화했는지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예컨대 연변 사람들은 서울 말투를 흉내 내는 조선족 이주자들이 ‘어색하게‘ 연변 말투와 섞어 말한다고 조롱하곤 했다. 나는 이러한 귀환자들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연변의 조선족들을 자주 만났다.(중략) 한국이 여전히 송금, 세련된 생활 방식, 패션, 근대 문화의 원천으로서 강력한 매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가기‘는 이제 연변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지 못한다. 오히려 한국식 말투와 옷차림은 결핍의 표시, 즉 중국의 새로운 시장경제에서 자리 잡지 못하는 사람의 증거로서 해석되고 있다. - P248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머리를 쓰지 않아요. 그저 ‘몸‘만 쓰죠. 그거 아세요? 나는 한국에서 돌아온 친구들이랑 대화가 안 통해요. 다들 한국에서 10년씩 일하다가 머저리가 되어버렸어요. 하지만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하면 사업을 계속 키울지 고민하지요. - P254

이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삶은 더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력 부졸, 다시 말해 결핍을 드러내는 표시로 간주된다. - P255

이제 한국바람은 1990년대 초만큼 조선족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연변을 오래 비움으로써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데 필수적인 사회적 관계망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이들이 느끼는 이질감과 상실감은 정서적 차원을 넘어, 문화적이고 실제적인 것이 되었다. 성철 씨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알아야 할 무언가를 놓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 ‘무언가‘는 경제적·사회적 성공을 위한 암묵적인 행동의 문법으로써 성철 씨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열쇠가 될지도 모르지만, 이미 성공 궤도에 오른 사람들과 최근 귀국한 이들 사이의 격차는 점점 더 넓어져 갈 뿐이다. - P260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교차점이자 두 개의 꿈이 경합하는 변경지역인 연변을 지난 30년간 지배해온 욕망, 즉 ‘머무르기 위한 떠남‘과 ‘떠나기 위한 머묾‘은이제 재검토와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기에 이주노동자가 아닌 사장이 되어 "악순환을 끊어내라"는 사회적 호소가 더해지면서, 코리안 드림은 현재 위기에 직면해 있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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