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아힘사(ahimsa)와 같은 불교의 윤리적 가르침은 낙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게 하는가? 불교는 ‘생명‘을 우선하는가 혹은 ‘여성의 선택‘을 우선하는가? 윤회에 대한 불교의 믿음은 현대의 낙태 논쟁에 새로운 차원을 불러온다. 우선, ‘삶은 언제 시작되는가?"라는 질문에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불교에서 삶이란 뚜렷한 시작이나 출발점이 없는 윤회의 연속이며, 태어나고 죽는 것은 계속 지나가고 지나가는 회전문과 같다. 그런데 윤회에 대해 믿으면 낙태가 가지는 의미가 더욱더 심각해지는가 아니면 감소하는가? 낙태를 하면 윤회가 뒤로 미루어지는 것이니까, 즉 태어나기로 됐던 아기가 나중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니까 낙태에 대한 심각성을 줄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라면 어른을 죽이는 것도 그 어른이 결국 다시태어날 것이니까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불교의 계율의첫 번째 불살생계는 삶의 어떤 단계에서든 인간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 P129
것은 금지한다.
붓다는 출산을 네 가지 단계로 구분하였다. 가임기, 임신기, 분만, 그리고 육아가 그것이다(M.ⅱ.148). 그는 인도의 전통적인 의학사상과 맞추어 수태를 다음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설명하였다(M.i.256). 인도 전통 의학에서는 수태란, (i)남녀 간의 교합이 있어야 하고, (ⅱ) 이것이 여성의 가임기 동안 이루어져야 하며, (ⅲ) 윤회하여 태어나려고 하는 죽은 사람의 의식(gandhar-va, 건달바 또는 업식이라고 함)이 있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초기불교도들은 생식의 과정에 대해서 『아유르베다』 (Ayurveda)라고 하는 고대 인도의 의료 전통에서 내려오는 생각을 공유한다. 아유르베다』에 따르면, 성교가 이루어져서 정액이 생리혈의 잔여물과 섞이게 되고, 만일 그때 업식이 있어서 이 유체 덩어리에 내려앉으면 이것이 수태이다. 수태되는 아기의 성별은 이때 결정된다고 한다(그런데 요즘 어떤 경우에는 임신 중에 성별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고 함). 수태이후,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진(불교에서는 이것을 명색名色, námarupa라고 부름) 이 새로운 개체는 ‘우유와 물의 혼합물 같은 결합체의 형태로 자라게 되며, 죽음에 이르러 분리된다. 일단 의식이 자궁으로 ‘내려오고‘ 수태가 이루어지면 배아는 여러단계를 거쳐 발달한다. - P130
그에게 맞는 시자가 없다면, 내가 그의 시중을 들 것입니다. 찬나가칼을 쓰지 못하게 하소서! 찬나가 살도록 하소서! 우리는 그가 살기를 원합니다! (M.iii.264)
이러한 의견들은 초기불교의 일반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즉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는 피해야 하며 죽음은 결코 의도적으로 야기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포함한다. 자살이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몇 안 되는 경우는, 「율장」의 바라이죄 조목 중 세 번째, 즉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금지하는 규칙 하위에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이 규칙은 앞의 제6장에서 낙태에 대해 논의할 때 여러 번 언급되었다. 이 규칙이 도입된 상황은 자살과 안락사 모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해설서에 따르면, 붓다가 어느때 승려들에게 몸을 관찰하는 수행법을 가르치면서, ‘부정관‘이라는 명상법을 가르쳤다. 이것은 몸에 대한 애착을 없애기 위해 하는 명상법이다. 부정관을 하면서 몸이란 무상하고 썩고 무너지기 쉬운 것이며 따라서 애착을 가질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가르친 후, 2주간 선정에 들어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동안 이 스님들은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부정관응 너무 열심히 수행해서 자신의 몸이 피와 대소변 등 온갖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죽고 난 후에는 시체가 부패되어 찢기고 짐승들에게 먹히고 결국 백골만 남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그렇게 더러운 삶을 사느니 이 몸을 버리는 - P158
것이 낫다면서 결국 많은 승려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또는 서로 목숨을 끊어 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가사와 발우를 주면서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앗아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붓다가 나중에서야 이 일이 일어났음을 알고는 바라이죄의 세 번째인 사람의 목숨을 앗는 것을 금하는 계율을 설하셨다(박스 17번). 이 일화는 스님들이 스스로 또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 자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붓다가 직접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불교의 규범적 입장을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근거이다. - P159
<박스 17> 살인을 금지하는 승가의 계율, 세 번째 바라이죄
어떤 승려가 고의로 어떤 사람의 생명을 뺏거나, 자신을 위해 칼잡이가 될 사람을 구하려고 주위를 살피거나, 죽음을 찬양하거나, ‘오, 착한 분이시여, 이 사악하고 어려운 삶이 왜 필요하십니까? 당신에게는 삶보다 죽음이 더 낫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선동하거나, 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음을 찬양하거나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면, 그는 바라이죄를 범한 것이다. 함께 살수 없다. (Vin.iii.72) - P159
제임스 휴즈(James J. Hughes)와 마이클 라 토라(Michael La Toma)와 같은 불교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현재 등장하고 있는 신기술들이 영적인 성장을 위한 능력을 극대화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휴즈는 ‘윤리와 새로운 테크놀로지 연구소 (Institutefor Ethics and Emerging Technologies)의 공동 설립자이며 이 연구소의 ‘사이보그 붓다‘(Cyborg Buddha) 프로젝트의 참가자이기도 하다. 그는 신경기술, 자극의 사용, 총명제(‘smart‘ drug), 그리고 지능을 강화하는 다른 정신 활성화 물질의 사용을 통해 정신적 성장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마치 항우울제가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것처럼, 뇌의 화학적 물질을 약간 조정함으로써 사람들이 이 세상을 좀 더 깨달은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촉진제가 될 것이라 한다. 그러한 증강의 효과가 영구적으로 지속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도 삶을 바꾸는 경험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의 제2장에서 불교윤리에서의 도덕적 덕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논의한 적이 있는데, 휴즈는 ‘덕성 엔지니어링‘(virtue engineer-ing)이라는 테크놀로지의 사용을 통해 도덕적 향상도 가능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자비심에 대해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성향에 영향을주고 그것을 신경화학을 통해 활성화시킨다면, 유전공학과 신경공학의 결합을 통해 자비심을 경험하고 표현하는 경향을 일관성 있게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도덕적 향상을 둘러싼 대부분의 논의는 공감(empathy)을 증진시키는 일에 집중되어 왔지만, 휴즈(Hughes)는 성숙한 도덕적인 - P186
성격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통제, 자비심, 그리고 지혜와 같은 다양한 덕목들의 같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상당히 합리적인 주장을 내 놓았다. 그는 이러한 덕목들 중 어떤 것들은 전자적, 약물적, 그리고 유전적기술에 의해서 향상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양심과 자기절제는 도파민 수용체와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고, 옥시토신 호르몬은신뢰와 유대감을 유도하며, 분노와 공격성은 모노아민 산화효소 A유전자(MAOA)에 영향을 받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은, 건전한 도덕적 판단은 감정, 동기, 그리고 인지적 요소의 삼자 간에 균형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 중 하나의 요소가 바이오기술에 의해 향상된다면 오히려 왜곡된 도덕적 양심이 나타날 수도있다고 지적한다.
어떤 불교인들은 이렇게 덕성을 인위적으로 고양시킨다는 것에 우려를 표시하며, 불교의 오계 중의 다섯 번째 불음주계가 정신을 흐리게 하는 약물 사용을 금지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불교는약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약을 먹는 것이 몸을 낫게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약에 취하기‘ 위한 것인지의 차이이다. 단순히 쾌락을 경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깨어 있음‘(self-awareness)을 증진하는 비중독성 물질의 사용이 다섯 번째 계율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계율이 반대하는 것은 결국 마음챙김을 놓치게 할 수 있는 물질의 섭취이다. - P187
원자를 쪼개는 기술 때문에 핵에너지와 원자폭탄이 만들어졌고, 자동차의 발명은 사람들의 이동성을 증가시켰지만 이것은 결국 이산화탄소 배출의 결과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신체와 분리된 마음은 단순히 새로운 형태의 신경증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사이버 공간에서 서로 간에 분리된 마음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다중 성격과 비슷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공지능에서도 결함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계속 업그레이드해야 하고 이것이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고苦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 항상 동반되는 병과 같은 것이라서 테크놀로지를 통해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불교는 인간의 고를 줄이겠다는 트랜스휴머니즘의 목표에 공감할 수는 있지만 특이점을 열반의 대안으로 삼을 수는 없을 것 같다. - P1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