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부터 당신의 메모리칩을 제거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은 당신의 모든 기억을 잊게 될 것입니다.
숫자 열을 세겠습니다.
제로가 발음되는 순간 당신의 모든 메모리도 제로화됩니다.
그때부터 당신은 온전한 당신이 되기 위한 과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행운을, 무조건적인 행운을 빕니다.
루만 2권 펼치기 전에 커피 내리는 동안 머릿속에서 떠오른 문장들.
할머니 나이를 헤아려보았다. 아흔여덟.
삶을 천형이라고 여기는 그녀. 하늘을 보고 싶어도 하늘을 마음대로 보지 못하는 환경에서 그녀가 요양 시설로 들어가는 걸 강하게 거부하는 까닭.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두 팔과 두 다리가 더 이상 제기능을 하지 못해 침대 위에서 오줌을 싸고 똥을 싸게 된다면 그때 들어가겠다.
더 이상 내가 스스로 밥을 짓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 들어가겠다.
들어가서 바로 죽도록 하겠다.
너희들이 원하는 길이 그 길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너희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서
이토록 잘 보이고 이토록 잘 들리고 이토록 배가 고프고 이토록 움직일 수 있는데
조금 버겁다는 이유로 지금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이 삶이 천형이라고 해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자주 생각한다.
인간의 입은 하나다.
그 하나뿐인 입으로 기도를 할 수 있고 저주를 할 수 있다.
커피 방울이 떨어져내리는 시간 동안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언니 작업 들어갔다.
겨울에 개봉한다고. 내용은 묻지 않았다. 그 정도 예의는 궁금해도 잘 지키는 편이니까.
새로운 시나리오 들어가기 전에 봄에 술 마시기로 했다.
호박석이 자그마하게 들어간 목걸이를 선물받았다.
한여름에 자주 하고 다닐듯.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미리 헤아려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손바닥과 발바닥이 너의 아가미다, 라고 스승이 이야기했다.
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서 두 손바닥과 두 발바닥에서 힘을 빼고 아가미로 숨을 내쉬듯 뻐끔거리기를 반복하니 이 반복도 의식이 되더라. 힘 빼고 관절에 기대느니 바닥에 가만히 가부좌 하고 있는 편이 몸에 이롭다는 사실도 알았다. 우리 아가는 기어코 용을 쓰더라만. 용쓰지 마라, 용쓰다 다친다, 했더니 잘 하고 싶단 말야! 라고 버럭 하는 아가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용쓴다고 단번에 되는 게 아니야, 말하고 나니까 좀 웃겨서 소리내어 웃었다. 스승이 보면 얼마나 웃을까 싶기도 해서. 시르아사나 아직도 홀로 되지 않는다. 수련하다가 스승이 와서 잡아주는데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거부감이라기보단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이 사람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 라고 몸이 알아챘고 공포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에서 억지로 긴장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과 몸이 알아채서 저절로 긴장을 하지 않는 건 크나큰 차이가 있다. 배신을 자주 당하면 타인에 대한 불신과 인간사에 대한 환멸이 짙어진다. 자연스럽다. 그렇게 환멸과 불신이 짙어지는 가운데 또 희망이 싹튼다. 이 또한 자연스럽다. 고유성은 반복에 의해 그 가치가 증명된다. 이걸 가장 잘 증명해내는 건 시간의 반복이다. 루만을 읽다가 알게 된 점.
직설이 아니라 은유로 표현을 하면 왜 단번에 알아채는 인간들은 적은 걸까?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거 같아 거기서 멈춰, 다시 가지 마, 라고 스스로의 옷깃을 잡아채었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이들고 어린 사람들이 경계 없이 오고 간다. 경계를 없애고 싶었던 이는 나뿐만은 아니었으리라. 이렇게 저렇게 조금씩 알아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