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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미국 소설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뭘 읽은 거지? 이 난장판은 다 뭐지? 이거 소설 아니고 무슨 엄청 시끄럽고 뒤죽박죽인 말도 안 되는 스포츠 애니메이션 한편 본거 같은데?’
필립 로스가 창조해 낸 거대한 농담 속을 이리저리 정신없이 휩쓸려 다니다가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든 생각이다. 그리고 조금 정신을 차린 후 든 생각은 역시 작가라면 600페이지짜리 뻥 정도는 너끈히 쳐줘야 탁월한 이야기꾼 소리 듣는 구나 싶었다. 대단하다 대단해
미국 메이저리그는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 그리고 패트리어트리그 이렇게 세 개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스미티라는 노인이 있다. 그의 이런 주장은 현재 요양원에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다. 과거 스포츠기자 출신으로 그 역사의 현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스미티는 패트리어트리그의 몰락과 그것에 일조한 거대한 음모와 여전히 진행 중인 진실에 대한 침묵과 역사 지우기라는 범죄행위에 맞서서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위대한 미국 소설’을 쓰기로 한다.
패트리어트리그 꼴찌팀 먼디스는 1943년 전쟁이 한창일 때 미 국방성에 홈구장을 팔아넘긴다. 홈구장 없는 팀이 된 먼디스는 전국을 돌며 원정경기를 다니는 유랑극단 같은 팀이 되어버린다. 이 소설의 거의 주인공급인 이 팀의 면면을 보면 하나같이 오합지졸에 선수로서 부적격한 신체와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구단주가 오로지 돈 때문에 좋은 선수들을 다 팔아버리고 가장 선수 같지 않은 선수들만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의족을 단 포수, 한쪽 팔이 없는 타자, 난쟁이 다혈질 투수, 너무 나이가 많아서 경기 내내 졸고 있는 선수에 범죄자 출신 선수도 있고 관절이 아파서 공 던질 때 마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선수에 14살밖에 안된 실력도 없는 꼬맹이에 진짜 별 이상하고 기이한 선수들이 왕창 모여 있는 팀이다.
먼디스팀의 경기는 늘 엉망진창 그 자체고 지는 걸 밥 먹듯이 하는데 상대팀들이라고 딱히 그리 멀쩡해 보이진 않는다. 흥행만 되면 뭐든 하는 미친 것 같은 다른 팀의 구단주는 난장판 경기를 주도하고 왕년엔 루키 선수들을 꼬시고 다녔던 미모의 구단주는 지금 패트리어트리그에 소련의 스파이가 있다며 걱정한다. 과거에 패트리어트리그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다혈질 투수와 정의로운 심판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점점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경기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렇게 우당탕탕 덜커덕덜커덕하는 기괴한 패트리어트리그는 소련 스파이의 등장으로 빨갱이 색출이라는 광풍에 휩쓸리면서 종착점으로 달려간다. 스파이의 공작으로 먼디스팀 선수 전원이 소련 스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조사결과가 발표되고 한바탕 심문과 구속이 집행되고 엉뚱한 영웅이 탄생하며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고 빨갱이 색출로 인기를 얻은 정치세력이 득세한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로 인해 패트리어트리그는 불명예스럽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도 못 한 채 아예 페이지가 뜯겨져 나가 버리는 운명에 처한다. 패트리어트리그의 홈 타운들은 그 도시이름마저 바꿔버려서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다. 그렇게 이젠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져버린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진실은 소설보다 더 기이하다”라고 스미티는 말한다. 이 거대한 농담 같은 소설이 의도하는 바는 역시 소설보다 더 기이한 현실에 대한 풍자다. 매카시즘에 대한 풍자는 너무나 자명해 보이고 패트리어트(애국자)라는 리그의 이름이 거짓의 위력에 패하여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는 설정은 필립 로스가 미국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선을 드러내는 장치다.
구단주에 의해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선수들은 자본이 가리키는 대로 살수밖에 없는 바로 미국의 시민들을 상징할 것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최약체의 선수들만 모여 있는 먼디스팀은 그야말로 권력자의 관심 저멀리 어딘가에 있는 서민들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평소에는 관심밖의 오합지졸들이다가 권력이 필요할때 그 누구보다 이용해먹기 좋은 사람들로 변신한다는 현실을 이 소설이 빗대어 말해주고 있다. 누명씌워 희생시키거나 권력의 광고판 노릇을 하거나 이러저리 휩쓸려 다니다가 결국엔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런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런 산제물들은 없었던 것처럼 내숭을 떠는 역사에 작가는 조소를 보내며 이 이야기를 써내려간 것이리라.
이 모든 비판과 풍자를 야구를 통해서 전하는 작가의 에너지에 박수를 보낸다. 한편으론 야구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이런 소설을 썼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야구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 소설은 재밌게 읽었다. 필립 로스가 만들어낸 뻔뻔하고 천연덕스러운 뻥의 세계에 한껏 취했던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