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당신이 먹으려던 자두는
당신이 먹었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2023년 6월
황인찬 - P-1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함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하자
학교에서 봐 - P-1

학교를 안 갔어


일단 전철을 탔고
시를 벗어났어

다들 학교도 안 가고 회사도 안 가고
뭐하는 걸까

나에게는 변명이 많았지
현장학습을 하러 가는 날이에요.
집에 급한 일이 생겼어요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진 않았지만

전철은 달렸어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들
강물에 반사되는 빛

기관사가 차내에 계신 분들께 알리는 소리
다들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나도 사람에게 할 말은 없었어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유경아, 이렇게 생각해줄 수는 없겠니? 나 진숙은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이 단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고양이 양양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 유경 너야. 그래서, 그래서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너, 말투가 사무적이구나. 그래. 미안해. 언제나 나 혼자서 잘못한 거지, 뭐. 또 내가 머리가 나빠서 실수한 거니? 출근 준비 잘 하라구. 똑똑한유경,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시간을 뺏어서 미안해."
그리고 진숙은 탕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나 참. 뭐가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진숙의 감정 변화는 기복이 너무 심하다. 그 비합리적인 굴곡은 감당할 수가 없다. 어쨌든 나이 든 독신 여자친구란 정말 골치 아픈 존재라니까! - P33

자연이 결혼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집안의경제 사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자연에 대해서 잘 모른다. 자연은 말이 없고 특별한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가난한 부모와 대학을 다녀야 하는세 명의 남동생들 때문에 무슨 사건을 일으키고 싶어도 일으키지 못했을지 모른다. 아마도 자연은 우리들 중에 유일하게아직 처녀로 남아 있는 단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생화학 책을 펼쳤다. 글자들이 춤을 춘다.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글자들 위로 또다시 글자들이 겹쳐졌다.
독신녀는 무엇으로 사는가. - P84

결국 그 말이 맞았다. 친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춤추러 가거나 미장원에 갈 때는 몰라도 조금 더 진전되면 돈을 빌려주거나 병원에 같이 가주는 친구는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길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바보같이잊고 말았다. 나답지 않았다.
잠자려고 불을 끄고 누웠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혹시 길일까 싶어 걱정되었으나 지금은 길이 자기 집 안방 침대에서 와이프와 잠자고 있을 시간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자.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겨울의 끝
이성복 「그 여름의 끝을 읽고


눈 속에서도 매화나무는
몇 구절 꽃줄기를 지켰습니다
서너차례 폭설에도 한번의 강풍에도
꺾이지 않고 눈보다 더 환했습니다

이 세상 무엇이
저렇게 눈부실까요

폭설의 한가운데 서서
매화를 보는 나의 눈빛이
오늘이 끝날인 것처럼 간절하였습니다

한그루 고결을 지키듯
매화나무 질긴 꽃들이
서너평 좁은 마음을 흰 자락으로 덮었을 때

기적처럼 나의 맹목은
끝이 났습니다 - P-1

아름다운 진보


산골로 피서 갔던 한 도시 소녀가
밤하늘에 가득 찬
별을 보고 울었다

스스로 빛나는 별자리가
거기에 있었다

언제나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밤하늘이 울부짖었다

별빛 안에는 수많은 빛이 있어
아름다움은 빛과 같은 것일까

소녀는 저를 뒤집는 힘으로
별자리 하나를 가졌다 - P-1

아침에 생각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시를 쓰지 않고는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가 생각나고 나는 시작(詩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나에게서 시인이 없어졌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수영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은 깊게 생활은 단순하게 하라는 워즈워스가 생각나고 오늘 나는 아름다움에 인사할 줄 안다는 랭보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문학에서의 정치는 연주회장에 울리는 총소리와 같다는 스탕달이 생각나고 우리의 열망이 우리의 가능성이라는 새뮤얼 존슨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움베르토 에코가 생각나고 나는 정의를 믿는다 그러나 정의에 앞서 어머니를 옹호한다는 카뮈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마지막으로 돈! 천국 외에는 다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신문 배달 소년의 응모 시 한 구절이 아프게 생각난다 어둠은 빛보다 어둡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침이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하튼 안녕


어떤 여자가 밀고 가는 유모차에서 개가 근심스럽게 세상을 내다본다

계사전에 이르길 겨우 봇짐이나 질 자가 수레를 타면 사방에 도둑이 들끓는다고 한다

골목의 개가 밤마다 열심히 짖는다
너무 애쓰지 마라
그냥 살면 된다

도연명은 쌀 몇말 때문에 하급 관리들에게 머리를 굽히기 싫어 관인을 끌러놓고 전원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생각이 짧은 것이다
저자에서 지키지 못한 졸(拙)이 전원에서 지켜질 리 없는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나기를 전원에서 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세상에, 아직도 남의 땅을 빼앗는 나라가 있다니 - P-1

거기다가 어떤 나라는 무기를 팔고
어떤 나라는 돈을 댄다
죽는 건 아름다운 청년들뿐

어떤 사람들은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세월호 타령이나 하는 건 이제 지겹다고 한다

나치에게 당한 바로 그 사람들이 지금 가자에서 그 짓을하고 있다

갠지스강 가에 가득한 모래알만큼 그만큼의 갠지스강이 또 있다 한들*

이번 나의 생은 이것으로 끝이다



*금강경 - P-1

세계문학을 버리다


세계문학을 버렸다
수심에 잠긴 셰에라자드도 덮고
햄릿이나 그레고르 잠자 같은 군상들은 노끈으로 묶어
폐지 장수에게 줘 보냈다
세계문학이라는 것도 별거 아니다
한때 그들이 사랑하고 미워하던 세상이 있었고
그들 따라 웃고 울던 무리들이 있었다
수십년 동안 하드커버로 나를 장식해주었던
문학을 내다 버렸다
교산은 어린 길동을 달래 사천 외가로 보내고
불쌍한 아Q도 울며 집을 나간 지 오래
그들은 세상에 버림받았고 혁명도 끝이 났으며
인간도 이전의 인간은 아니다
세계를 버렸다
이사업자들에게는 최악의 상대이며
비용 견적만 높이는 세계문학을 버렸다
나는 이미 세계인이 된 지 오래되었고
많은 미래가 과거가 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아파트에는 세계가 들어갈 데가 없다 - P-1

폐지 장수 리어카에 실려 가는
조르바나 돈키호테 같은 이들이 나를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분개했지만
세계는 변했고 나도 이전의 내가 아니므로
미련 없이 그들을 버렸다 - P-1

수행자의 노래


모차르트를 높여놓고 설거지를 한다
세제 향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설거지에는 설거지의 도가 있어
먼저 더운물에 그릇을 불리고
거품을 일으켜 애벌 씻은 다음
부드럽게 헹구고 물을 찌워
마른행주로 닦아 말리면 뽀송해진 그릇들이 좋아한다
어느 과정 하나 소홀하면 안 되고
깊고 얕고 넓고 좁고 그릇에겐 그릇의 품성이 
있어
마땅히 예로써 존중해야 한다
아내는 내가 설거지를 해놓으면 좋아한다
어떤 때는 그릇에 얼룩이 그냥 있다거나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고 해도
그러한 지적으로 나의 공부는 나날이 깊어간다
애들이 식기 세척기를 사준다 해도
기계는 일은 알지만 살림의 도리를 모르고
마지막으로 행주를 짜 널고
바라보는 재계(齋戒)의 기쁨을 모른다
어떤 날은 이 일 말고 하는 일이 없기도 하지만
그릇을 닦는 일은 세상을 닦는 일이고
나의 경계는 나날이 높아간다. - P-1

괜히


불가에서는 붙잡힌 짐승이나 물고기를 가엾게 여겨 놓아주는 것을 방생이라 한다 그러다보니 잡아 오는 사람과 놓아주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고 어느덧 이 일은 양쪽에 다 필요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 극락에 간다면 이는 극락을 사고파는거나 마찬가지이고 영문도 모른 채 잡혔다 놓여나는 것들 입장에서 보자면 극락을 가고 못 가고는 저들에게 달렸고 목숨까지 걸린 일인데도 아무것도 손에 쥐는 게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도 불전함을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고 계시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괜히 극락 같은 걸 만들어 사람들을 놀리거나 불쌍한 것들 고생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 P-1

시인의 말


이 시집에 실린 시편은 대부분 내가 아무 일도 없이 생애의 가장 한가로운 시기에 쓴 것들인데 나를 따라 시도 무사하기만 한 게 싫어서 틈만 나면 낯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거나 새벽에 일어나 비를 바라보기도 하고 천변에서 새들과 놀기도 했다.


세상에 아무런 공덕도 없는데 좋은 일들이 자꾸 생긴다. 가을과 헤어지고 나면 눈을 이고 겨울이 찾아오는 것도 그렇고 많은 이들의 살핌과 찬을 받아 시집을 묶는 일도 그렇다. 그리고 그것들이 갚을 수 없는 것들이어서 더없이 즐겁기만 하다.
2025년 12월
이상국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푸레나무도 힘들다


물푸레나무,


꽃은 봄에 가지 끝에 모여 피고
열매는 늦여름에 익어 짐승의 밥이 된다

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푸르스름한 물이 우러나는데
그걸 달인 물에 먹을 갈아 글을 쓰면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희고 부드러운 몸은 척척 휘고 질겨서
조선의 포졸들이 죄인을 다스리던 육모방망이나 곤장질로는 당할 나무가 없었고 일본놈들은 그걸로 순사 방망이를 만들어 식민지 조선 사람을 패는 데 썼다고 한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