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일


가까운 사람을 잃는 건 외로운 일이지
높은 장대를 뛰어넘는 것도
노을을 바라보는 것도

나는 꽃을 주었는데
그대는 가시를 받네*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외로운 일이지

기침을 참는 것도
물가를 걷는 것도

밤을 지나온 차의 범퍼에 잔뜩 붙어 있는
죽은 벌레들
빗에 엉겨 있는 머리카락
한쪽 방향으로 일제히 누운 칫솔모

먼지는 먼지로 돌아가고
아, 지겨운 초록

같은 곳을 오래 바라보는 것도 외로운 일이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 P-1

공평하게 늙어가는 것도
또 꽃을 사는 것도




*이대흠의 시 「에서의 거리」에서 빌려 변용함. - P-1

흰 빛


회벽에
흰 빛이 어른거린다

어디서 온 걸까, 너는

대야에 담긴 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요사를 떨고 있었다 - P-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슈퍼에 가 ‘설레임‘ 아이스크림 있냐고
묻는다는 것이
망설임 있어요. 라고 잘못 말했는데
가게 주인이 아무 망설임 없이
설레임을 꺼내다준다

영화관에서 단적비연수 두 장 달라는 것을
단양적성비 두 장 달라고 말했는데
단적비연수 표를 내줬다는.
형식과 내용이 합일하는 이런 경이로움을
나는 사랑한다

문득, 비 오는 바다가 보고 싶어
아침 일찍 오도리 해변에 나갔다가 돌아와
밀란 쿤데라가 9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는 뉴스를 본다
시간당 60mm,
비가 저렇게 오면 바다도 넘치지 않을까

이름이 ‘나보라‘인 신입 직원에게
영문 이름을 지어줬다
Look at me!

해피 투게더를 - P-1

햇빛 두 개 더, 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후배 시인이 아는 할머니 한 분은
헤이즐넛 커피를 해질녘 커피로
알고 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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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감
-나는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내가 서로 다른 것을 원할 때


말라죽어 내다 버린 꽃나무에서
새잎이 올라온다

내가 꽃나무를 버린 게 아니라
꽃나무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
버림받은 느낌

이제 나의 재미는 그저
너의 재미 보는 걸 보는 것
마지막으로 물을 준 게 언제였더라
문득 나는
나보다 더 나쁜 사람을 알지 못하고

잎을 내지 않기로 했던
나무의 어떤 결심을 들여다본다

이제 너의 마음은
여기에 없구나

마른 가지 사이로 요지부동의 잎들이
여봐란듯
쏟아져나온다 - P-1

나는 어머니 입속의 염소고기처럼


어머니 돌아가시기 이태 전
포항의 내 집에 두어 달 머무셨지
뭐 잡숫고 싶은 게 있냐 물으니
염소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여
잇꽃 피어 있는
교외의 염소 요릿집에 모시고 간 적이 있지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수육을 드시면서
구순의 어머니는 이게 뭐라고, 이게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셨는데

가끔 사는 게 참 쓸쓸하다 싶을 때면
어떤 침묵을 엿들은 양
이게 뭐라고, 이게 뭐라고
그날 어머니의 그 혼잣말이
내 귓가에 반그늘처럼
맴도는데 - P-1

정원


나무는 발밑에 꽃을 내려놓네
두고 보려고

봄꽃이 지천인
이 아름다운 곳을 방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이별은 멀리에 있고
시작한 곳에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데

꽃은 아픈 이름

새들은 울음을 공중에 심고

피었다 지는 것도
정원의 일부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너의 이름을 부를 때

꽃잎은
그늘 속에서
피가 마르는 기분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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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이건 연습이에요.
연습일 뿐이에요.

2024년 9월
고영민 - P-1

늙은 시


꺼내 다시 읽어보니
그새 늙어 있다

망실되었구나. 너도 나처럼
서랍 속에서

원망하지 마라
네가 널 이렇게 만든 것이다

무엇에도 도달할 수 없다

창밖의 눈송이가
눈보라로 바뀐다 - P-1

마태복음


아버지 고창선은 어머니 김도화를 만나
6남 6녀 12남매를 낳고
큰형 고명규는 5남 2녀를 낳고
큰누나 고순희는 3남을 낳고
둘째 형 고흥규는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1남 3녀를 낳고
둘째 누나 고순흥은 2남을 낳고
셋째 형 고준규는 1남 1녀
셋째 누나 고선화도 1남 1녀
넷째 형 고상규는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1남 1녀를 낳고
넷째 누나 고난영은 2남을 낳고
다섯째 형 고운규는 1남 1녀
다섯째 누나 고난희는 2녀
여섯째 누나 고난미는 1남 2녀
12남매 중 막내인 나 고영민은
2녀를 낳고

.
.
.
분명 우리에게 내일은
슬픈 것
비로소 그때 새로운 사랑은 오지 - P-1

나는 나의 감옥처럼


피 흘리는 짐승입니까
지나가는 사람입니까
쓰러져가는 담장
허공의 심장소리
방파제를 뛰어넘는 파도입니까
달려가는 냇물입니까
얼굴을 가리고, 지우고 가는
기억입니까
태어나자마자 갖게 된 병입니까
제풀에 꺾인 바람입니까
울 때 같이 우는 사람입니까
자꾸만 귀에서 나는
소리입니까 - P-1

혼잣말


아까부터 왜 계속 저곳에서
서성이는 걸까

눈송이처럼

할말이 있다는 듯
머뭇거리다가 서둘러 사라지는

차마 꺼낼 수 없는 말을 맛보면서
혀끝으로 입천장을 만지면서
끝내 아무 말도 못하고, 삼키고
더이상 네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무람해진 너를 위해
오늘은
그곳에 있을게

우리는 지금 막 만났고
나를 웃게 해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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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척이다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거미처럼
쓰러진 고목 위에 앉아
지저귀는 붉은가슴울새처럼
울부짖음으로 위험을
경고하는 울음원숭이처럼
바람 불 때마다 으악
소리를 내는 으악새처럼
불에 타면서 꽝꽝
소리를 내는 꽝꽝나무처럼

남은 할 말이 있기라도 한 듯
나는 평생을
천천히 서둘렀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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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마지막 시 마지막 행까지 읽고 나니 ‘바람‘은 어느덧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보니 사람이라는 말은 꼭 바람 같다. 천양희라는 한 사람이 바람처럼 이리저리 날리다 이곳에 낙엽처럼 내린 것만 같다.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무사하기 위해 시와 한몸이 된 시인은 "철도 없이 제멋대로인"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채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낸 싸움과 사랑의 기록이 바람에 날린 낙엽처럼 여기까지 왔다. 나는 시인이 바람의 갈피 속에 한장 한장 끼워 넣은 종이들이 풍기는 바람 냄새를 다 맡아본다.

황유원 시인 - P-1

ㅣ시인의 말



머리에서 가슴까지
걸어온 60년 시의 길이
나에게는 가장 먼 길이었다
그 먼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돌아보니 그동안 나는
사람이 그리운 사람이었고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다
마음자리를 잃고
밥처럼 먹은 슬픔을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단 한편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살릴 수 있다면
이것이 시인의 말이 될 것이다

2024년 10월
천양희 - P-1

딱 한줄


「일흔살의 인터뷰」라는 시를 발표한 뒤
한 독자가 물었다

그 시에서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할 때
운다고 썼는데

「여든살의 인터뷰를 쓴다면
어느 때 웃는다고 쓰겠느냐고

나의 대답은
딱 한줄

‘가진 것이 시밖에 없을 때 웃는다‘ - P-1

하나의 사람과 예순한편의 슬픔


한 시인이
슬픔은 어깨로 운다고 합니다
한시인이
슬픔은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졌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오래된 슬픔은 향기를 품고 있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을 팔아서 자그만 꽃밭을 사야겠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이 택배로 왔다고 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나이 먹은 슬픔이
오늘은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 P-1

다시 올 웃음에게


잘 웃지 못하는 내 웃음이
잘 웃는 네 웃음을 만나
비로소 웃기 시작했다

너의 첫 웃음을 보면서
새벽에 첫닭이 울듯
꼬기오 ㅡ웃었다

아마도 너는 하루에
사백번이나 넘게 웃을 것인데
나는 겨우
열번을 웃기도 힘들다

웃기 전에
나는 사람이 힘든 사람이었고
우두커니 서 있는 그림자였다

너는 웃음으로
내 울음을 지불하고 - P-1

학습 없이 웃음보를 가지게 했다

아무리 성나는 일이 있어도
네 웃음을 피할 생각은 없다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네 웃음으로 배워야겠다

웃음에 길을 트면
사방이 웃음 천지

나를 웃게 한 웃음이
저기 앞에 간다

네가 웃는 것으로
이 세상 울음이 끝났으면 좋겠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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