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에 대해서는 비록 행장과 묘지는 아직 찾지 못했어도 방계 자료들을 통해 최소한의 관직 이동 상황과 예술적 환경 변화 및 작품의 편년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최완수의 「겸재 정선 연구」(「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는 겸재의 삶을 현재로서는 완벽하게 복원해놓은 우리나라 문화사의 큰 업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는 겸재의 가계는 물론 외가와 진외가의 족보까지 캐내고 그의 패트런이나 진배없었던 서울 장동(洞)의 안동 김씨 집안과의 관계도 소상히 밝혀놓았다.
그리고 최근 한문학과 미술사 분야에서 겸재의 측근이었던 관아재 조영석, 담헌(擔軒)이하곤(李夏坤), 사천(梭川) 이병연(李秉淵), 농암 김창협(金昌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 동계(東谿) 조귀명(趙龜命) 등의 시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추진되어, 이들과의 교류를 통한 색의 인간적·예술적 면모가 다각도로 조명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의 삶에 대해대략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예술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오늘에이르기까지 변함없는 명성과 찬사와 존경의 예찬이 이어지고 있다. 겸재가이룩한 예술 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또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직접 사생하여 이를 감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진경산수의 창시자가 되었고, 또 그것은 후대에 두고두고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하여 겸재의 진경산수는 줄곧 민족적 - P186

산수화풍으로 이해되고 한국적 산수화풍의 창시자로 평가되어 왔다.
진경산수의 사회적 배경은 조선 후기 숙종, 영조 연간에 일어난 사회·문화·예술 전반의 사조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사상에서 실학의 대두, 문학에서 한글소설. 판소리의 등장과 사설시조의 유행, 그림에서 현실을 소재로 담은 속화(俗)의 탄생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그 모두를 ‘리얼리즘시대‘의 산물로 이해해왔으며, 그런 인식 틀은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근래 겸재의 진경산수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두 가지 견해가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하나는 최완수를 비롯한 이른바 ‘간송학파‘들이 겸재의 진경산수를 율곡에서 완성된 조선 성리학이 노론의 정치적 이념으로 구현된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의 산물이라 주장한 것이고, 또 하나는 홍선표, 한정희, 고연희 등 홍익대 출신 중견· 신진 학자들이 진경산수는 명나라 때의 <황산도(黄山圖)> 같은 실경산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학설은 겸재의 예술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는 데 나름대로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두 학설 모두 적지 않은 과장과 오해가 있었다. - P188

겸재의 진경산수를 논함에서 중요한 것은 18세기 전반기 숙종·영조 연간에 이처럼 민족적이고 감동적인 우리의 산천 그림을 훌륭히 예술적으로그렸다는 사실이다. 겸재의 작가의식이 여기에 있는 한 그가 진경산수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황공망을 이용하든 <황산도>를 원용하든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독창성이란 남이 하지 않은 그 무엇을 혼자 제시했다는것이 아니라, 남들이 이룩하지 못한 또는 생각하지 못한 예술 세계를 창출해냈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기법적으로 여러 선례를 원용하는 것은 어느시대, 어느 대가에게나 있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겸재의 진경산수는 겸재 이전 시대에도 있었던 사경산수景山水)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중국 남종화(南)의 예술적 성과를 받아들임으로써 한 차원 높은 민족적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기왕에이동주, 최순우, 안휘준 등이 해석했던 주장은 그대로 유효한 것이다. 사실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겸재의 벗인 조영석이 겸재의 『구학첩(帖)』에 부친 그 유명한 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겸재의 이 화첩은 먹을 씀에는 자취가 없고 번지기에는 법도가 있고, 깊고 울창하며 윤택하고 빼어남이 있다. 거의 송나라 미불(米芾)과 명나라 동기창(董基昌)의 울타리 안에 들어갈 만하다. 조선 3백 년 역사 속에 이와 같은 - P192

것은 볼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그 동안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은 산수의 윤곽과 구도를 잡을 때 (화본에 나오는) 16준법(十六준法)에 두었기 때문에 계곡이 여러 모양으로 흐르고 굽어내리는 모습을 똑같은 필치로 묘사하면서도 아직껏 이것을아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싸여 있어도 오직 한 가지수묵법으로만 표현되어 그 앞과 뒤,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 얕고 깊음, 그리고토파(土坡)와 돌의 평평하고 험한 세를 가려 표현하지 못했다. 물을 그려도잔잔함과 급함을 구별하지 않고 두 붓을 새끼 꼬듯 비껴서 아울러 잡고 그렸으니 어찌 산수가 있다고 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런 주장을 했을 때 겸재 또한그렇다고 했다.
겸재는 일찍이 백악산(白岳山) 아래 살면서 그림을 그릴 뜻이 서면 앞산을마주하고 그렸다. 산의 주름을 그리고 먹을 씀에 저절로 깨침이 있었다. 그리고 금강산 안팎을 두루 드나들고 영남을 편력하면서 여러 경승지에 올라가 유람하여 그 물과 산의 형태를 다 알았다.
그리고 그가 작품에 얼마나 공력을 다했나 보면, 다 쓴 붓을 땅에 묻으면 무덤이 될 정도였다. 이리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이 한결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병폐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이다. - P193

이하곤은 해악전신을 보면서 겸재의 진경산수에는 데생력(사생력)도데생력이지만, 형사가 아니라 전신으로 재해석해서 나타내는 능력이 있음을보고 이 같은 찬사를 보낸 것이다. 그래서 이하곤은 이것을 갖고 싶어하며이렇게 말했다.

사천이 금화를 다스릴 때 겸재와 함께 동쪽에 가 놀면서 해산(海山: 금강산)의 기이한 곳을 만나면 문득 붓을 들어 모사케 하여 무릇 30여 폭을 얻었다. 이윽고 김창흡과 조유수에게 부탁하여 각 폭마다 발문을 짓게 하고 또 내게도 이어 부치게 하니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여기에 써서 공간을 메운다......
흉중에 모름지기 하나의 금강산이 따로 있어서 이빨과 가슴이라는 것이 모두 구름과 언덕과 나무와 바위로 되어야만 그런 후에 가히 금강산을 잘 보았다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그림이나 문자들은 모두 사족에 속하는 것이다. 사천이 안목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그림을 나에게 주어야한다. 한번 크게 웃으며 담헌거사는 또 희제(題)하노라.

이하곤의 입장에서는 진경산수의 진면목은 남종산수화의 한 이상인 흉중구학(胸中丘壑)을 그리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에 형사를 무시할 수 없지만, 그 대상에 얽매이지 말고 강약의 변용, 과장과 생략이라는 살활조종을 통해 전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점은 겸재 입장에서도, 이병연 입장에서도, 김창흡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진경산수의 미학은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형상을 통해 전신으로 나아가는 이형사신(以形寫神)에 있다. - P223

그러나 겸재가 섣불리 자기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이처럼 고전을 차근차근 방작하는 중년의 겸손과 성실성을 거쳤기 때문에 훗날 자신의 개성에 힘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옛 사람의 업적을 생각할 때 보통 그 결과만을 갖고 평가하게 된다. 그것이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역사적 평가란 대단히 준엄한 것이다. 이 역사적 평가에만 의존하다 보면 우리는 한인간이 한 화가가 어떤 노력 속에서 그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낳게 되었는가라는 그 과정과 예술적 고뇌와 인간적 성실성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 점에서 역사적 평가란 너무 잔인하고 때론 경박한 면도 없지 않다.
겸재의 경우 우리가 그를 위대한 화가로 칭송하는 것은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폭도> 같은 박진감 넘치는 진경산수에 있다는 것은 움직일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겸재는 그 위대한 민족적 화풍인 진경산수를 창출하기 위해 기해년화첩』 같은 남종문인화풍에도 열중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진경산수는 고루한국수주의적 색채나 지방적 낙후성에 빠지지 않고 국제적 시각에서도 당당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초가 되어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국제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고전을 통과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같은 것이다. 나이 40대 때 『기해년화첩」 정도밖에 그리지 못했던 겸재가 20년 뒤인 59세 때는 <금강전도>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낳을 수 있던 것에는 이런 역량의 축적이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겸재는 대기만성형의 대가였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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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재가 그린 <조영복 초상>은 그가 당대에 왜 인물화의 대가로 손꼽혔는지를 유감없이 증명하는 명작이다. 우리나라의 초상화 전통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는 당장 진재해(秦再奚, 1691~1769)가 그린 <조영복 초상>의 뛰어난 사실성으로 알 수 있다. 관아재의 <조영복 초상>은 거의 초상화가들의 정형화된 초상화의 전통에 따르면서 한편으로는 선비화가다운 다른 면모를 보여줌에 주목하게 된다.
우선 조영석의 초상화에는 인물의 기품이 넘처흐른다. 기존의 초상화에서도 신중하게 추구했던 전신의 가치가 여기서 더욱 역력히 살아나고있다. 사대부적 기상이란 화원이 아닌 사대부화가의 손에서 더욱 살아나고있음은 공재가 그린 <심득경 초상>에서도 이미 보아왔듯이 관아재의 초상화 또한 고고한 선비의 분위기를 품위 있게 잡아내었다.
둘째는 형식에서의 자유로움이다. 기존 화원의 초상화는 주어진 초상화의 규범에서 조금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반면 관아재는 그런 제약에서 일탈할수 있는 자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대부화가의 유리한 조건이었다.
사각건(四角巾)에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빨간 도포끈을 동여맨 평복(平服:服)을 입고 있는 모델의 모습은 공식적인 엄격성을 벗어나고 있으며, 몸체를 마치 커다란 자루 속에 담은 것처럼 과장의 파격을 보여준 면은 더욱 그렇다. 특히 무릎 위에 가볍게 놓은 양손의 표현은 이 초상화의 백미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수많은 초상화에서는 대개 손을 그리지 않았다. 두 손을 마주잡고 공손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면서 손을 소매 속에 감추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초상화의 초점을 얼굴에 맞추기 위한 조형적 관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손을 그리면 초상이 훨씬 자연스럽고 더 인간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이처럼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손을 그린 것은 <신임(申) 초상> <강세황 자화상> 이외에 조영석이 그린 <조영복 초상>밖에 없다. - P134

나는 평소에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없지만 오직 산수와 시와 그림만은 독실하게 좋아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이를 궁구한 바는 있었지만 아직 제대로 얻지는 못하였다.
무릇 시를 배우는 일은 숭상받아 왔다. 그림도 깃발이나 종정(鼎)에 사용되면서부터 오랜 옛날의 성인들이 없애지 아니한 것이다. 산수를 유람하는 일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고인일사(高人逸)나 시인들은 말할 것도없고 후세의 대현명유(大賢名儒)들조차 기쁜 마음으로 종종 홀로 내달려 그윽한 곳에 이르는 일을 떠올리면서 마치 그만둘 수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무릇 시는 성정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며, 그림의 경우는 문장과 글씨가 해낼 수 없는 것을 그림에서 구하는 것이니 진실로 취할 바가 있는 것이다.
저 맑게 흐르는 물이나 하얗게 드러난 바위는 사람의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여기에서 무엇을 취하겠는가? - P140

동자를 데리고 그윽한 곳에 은거하며 독서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한 선비의 집에 눈 내린 어느 날, 한 친구가 동자에게 고삐를 쉬게 하고 소를 타고찾아왔다. 이에 두 선비는 서재에 마주 앉아 고담준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의 이야기이다.
집주인은 학창의를 입고 있고 방문객은 두건을 쓰고 있는데 모두 의젓이 정좌하고 있다. 이때 창문은 닫혀 있었겠지만 화가는 그림을 위해 창을 열어놓았는데 방안에는 책이 그득하다. 이 두 인물 묘사에서 우리는 그들이 다름 아닌 조선의 선비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데, 이처럼 조선 그림에 조선의 선비가 정확하게 표현된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이다. 
이제까지 우리나라 산수화에 나타나는 인물은 모두 중국 화본에서 제시한인물묘사법을 벗어나지 못하여 그저 막연히 선비 · 신선 • 나그네를 묘사한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설중방우도>에는 조선의 선비가 당당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는 겸재 정선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자연이 그림의 소재로 승격되고, 거기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의 선비가 등장하게 되는 것과 똑같은 한국회화사상의 일대 사건이며 쾌거이다. - P168

이제까지 우리나라 산수화에 나타나는 인물은 모두 중국 화본에서 제시한인물묘사법을 벗어나지 못하여 그저 막연히 선비 · 신선. 나그네를 묘사한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설중방우도>에는 조선의 선비가 당당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는 겸재 정선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자연이 그림의 소재로 승격되고, 거기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의 선비가 등장하게 되는 것과 똑같은 한국회화사상의 일대 사건이며 쾌거이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림 하단을 보면 동자 둘이서 자유스런 몸짓으로 반가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속화의 한 장면처럼 삽입되어 있다. 관아재는 양반들이 격식을 차릴 때 머슴과 동자는 마냥 자유스럽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음을 이렇게 명쾌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도판21 또 질질 끌려가는 소의 모습이 무척 재미있고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눈 덮인 뒷산, 푸른빛을 띠고 있는 겨울 소나무와 향나무 그리고 마른 가지에 핀 눈꽃에는 선비화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취가 물씬 풍기고 있다.
관아재가 이런 대작의 명작을 좀더 많이 남겨주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가 좀더 적극적인 화인으로 살 수 있었다면 우리의 이런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었으련만 현실이 그렇지 못했던 것이 정말로 안타깝다. - P168

그는 평생 개결한 선비로 일생을 살고 싶어했다. 비록 미관말직을 지내더라도 생욕. 색욕· 관욕. 재욕 등 4욕(四慾)을 경계하며 흐트러짐 없는삶을 영위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림을 좋아하였다. 그는 그림이 세상에 공헌하는바, 인간의 정서 함양에 기여하는 바를 정확히 인식하며 글과 시가 할 수 없는 것을그림이 해낼 수 있다고 믿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림이란 현실 속에 있어야 한다는 투철한 사실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인물은 화보 속의 인물이 아니라 대개 현실 속의 인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서민들의 삶을 애정어린 시각으로 그린 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도화서 화원들이 그리는 원법(院法)에 선비화가들의 문학에 배어있는 유법(法)을 발현하여 그림의 격조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
세상에는 관아재의 이런 그림 재주와 취미를 간혹 천한 환쟁이와 동일시하며 비방하고 폄하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면 관아재는 선비로서 품위를 잃는 것을 싫어하여 그림에서 손을 떼고는 삼갔다. 그가 두 차례나 어진 제작에 참여하라는 왕명을 거역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그는 어쩔 수 없는 한 사람의 화인이었다. 그림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주옥 같은 명화, 그것도 속화와 조선적인 인물화에서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관아재는 겸재의 진경산수를 평하여 "조선 3백 년 역사 속에 조선적인 산수는 겸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관아재에게 그대로 돌려 "조선적인 인물화는 조선 3백 년 역사 속에 관아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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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喪服)을 입고 건(巾)을 뒤집어 쓴 채로 지팡이를 비스듬히 집고는 등을 돌린 채 걸어가는 이 인물은 저승길로 걸어가는 연담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한 화가가 <죽음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사실은 연담 이전에도 없고, 연담 이후에도 없는 오직 연담만이 보여준 그의 뛰어난 개성이다. 그 처연함이란 화면 속에 긴장감을 자아내면서 연담의 허허로운 임종을 엿보게 한다. 자신의 죽는 모습을 마치 유언을 남기듯 그림으로 그렸다는 소탈한 모습에서 우리는 과연 연담은 연담이로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며, 그는 결코 한낱 환쟁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연담 김명국, 그는 죽음 앞에서 <죽음의 자화상>을 그린 인생의 달인(達人)이었고 그림의 신필이었던 것이다. - P51

김명국은 확실히 인조시대 화가로서 당대의 이단이었고, 기인이었다. 그는 무엇이든 취흥에 따라 그려낼 수 있는 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의 절묘한 작품을 보고 상찬해준 사람들이 없었고,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모습은 더욱 없었다. 오직 두 차례 일본에 갔을 때 그 영광을 누렸을 뿐이다.
그는 시류 속에 편안히 안주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낭만적 반항의 표정일지언정 자기 자신을 지켰다. 그 점에 연담의 큰 매력과 미덕이 있다. 바로그 점 때문에 연담은 훗날 17세기 조선시대 화단에서 가장 개성적인 작가로살아남게 되었다. 그것이 김명국의 영광이다. 세상이 바뀌고 반세기도 안되어 숱한 찬사 속에 그는 다시 태어난 셈이다.
결국 그의 삶과 예술은 시절을 잘못 만나 기인이 되고 만 한 신필의 자랑스런 반항의 이야기인 것이다. - P51

윤두서는 당당한 한 선비로서 정확하게 시대정신의 추이를 인식하고서 그것을 학문적으로, 예술적으로 실천한 한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그의 지인들은 공재를 가리켜 일국의 재상에 되고도 남을 높은 지식과 도덕의 크기를 갖고 있고, 그의 풍모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넓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고 삶에 지친 그는 결국 고향 땅 해남으로 낙향해 불과 48세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가 낙향하던 바로 그 해, 45세 때 그런<자화상>은 공재의 그러한 풍모와 고독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공재의 <자화상>은 얼굴만을 그리는 일종의 소조(小照)라 할 수 있는데, 상투 위와 수염 아래쪽은 모두 생략하고 얼굴만 부상시키는 구도가 파격적이고 박진감이 있다. 본래 이 <자화상>은 철선묘(鐵線描)로 풍만한 어깨선을 흐미하게 그려넣은 것이었는데 후대에 보수하는 과정에서 아예 지워져버렸으니 마치 허공에 떠오른 얼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범의 상을 한 준수한 얼굴은 육색(肉色)에 윤기가 역력하며 정면을 응시하는 눈초리가 자못 삼엄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압도해버린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속에서 느꼈던 온갖 고뇌가 서려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 역정이 이 작은 화폭에 완벽하게 담겨 있다.
그리하여 한국 회화사상 최초의 자화상인 이 그림은 우리나라 초상화 중최고 걸작으로 손꼽혀 회화로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되었다. - P58

그러나 공재가 간접적으로 조선 후기 회화 전체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다. 특히 속화는 그가 개척한 바를 관아재 조영석과 단원 김홍도가 계속 발전시켜 마침내 가장 조선적인 장르로 완성된다. 또 그가 시도한 문인화풍은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등으로 이어져 마침내 조선적으로 정착되었다. 또 그가 시도한 동국진체(東國眞體)는 백하(白下) 윤순(尹淳)과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에 의해 완성을 보았다. 그런 미술사적 신경지의 선두에 공재 윤두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 P107

실제로 공재 글씨는 고전으로 거슬러올라가 거기에 우리 풍토에 맞는 향색(鄕色)을 가미한 글씨로서, 옥동과 함께 공재가 추구한 동국진체는 결국50년 뒤 그 후배인 백하 윤순과 원교 이광사에서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이점에서도 공재는 선구였던 것이다.

공재 윤두서는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의 후예라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시운을 얻지 못하여 평생 경륜을 펴보지 못한 불우한 선비였다. 그러나공재는 세월을 탓하지 않고 학문과 예술에 힘써 숙종 연간의 문화 기류 속에서 명백히 진보적 입장을 취하며 ‘실득(實得)‘ 있는 학문을 추구하고, 민족주의적인 ‘동국진체‘를 개발하고, 현실주의의 입장을 띤 ‘속화‘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진실로 불운하게도 공재는 학문과 예술이 원숙하게 무르익을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은 너무도 안타깝고 아까운 변고 - P111

였다. 그리하여 벗 옥중 이서는 다음과 같은 통곡의 제문을 바쳤다.

슬픈 일이로다. 하늘은 이 세상을 편안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어찌이다지도 빨리 공을 앗아갔단 말인가? 공의 인후하고 관대한 덕과 공평하고정직한 의지, 영민한 지혜와 폭 넓은 지식,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학문적·예술적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개척한 선구적 과제는 모두 뛰어난 후배들이 그대로 이어받아 학문에서 실학은성호 이익이, 글씨에서 동국진체는 백하 윤순이, 그림에서 속화는 관아재조영석이 마침내 하나의 장르로 완성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영조시대 문예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의 모든 기틀은 사실상 숙종시대에 그 밑거름이 만들어진 것이라 말하는데, 공재 윤두서는 바로 그 문화를 일구어낸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공재의 선구적 위업, 그리고 천수를 다하지 못한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성호 이익이 눈물로 쓴 제문은 공재가 누구였는가를 이 세상에 가장 극명하게 증언한 글이었다. - P113

죽은 자는 유감이 없고 산 자는 더욱 힘써야 하는 법. 공은 진실로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생은 또한 일찍이 밖에 나아가서는 공의 풍채를 보며 즐거워하였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공의 생각하는 바를 간직하였습니다.
말씀하시는 데는 사물의 이치를 갖추었고, 행동함에는 법도가 있었으니 선비로서 현자(賢者)를 희구하는 분이었습니다.
사람을 대함에 공손함과 관대함이 있어, 어진 이고 어리석은 이고 환영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사람과 잘 사귄 분이었습니다. 일에 임할 때는 민첩하면서도 중용을 지키셨고, 예술에서는 편벽됨이 없었습니다.
오호라! 공이 세상을 떠나니 좋은 벗을 잃은 외로움이 앞서고, 들어보기 힘든 얘기를 들어볼 곳도 없게 되었으며, 그 당당한 풍모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재능은 있었으나 명이 짧음은 하늘의 뜻이거늘 어찌 공이 의도한 바라 하겠 - P113

습니까. 혹 이를 애석하게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공은 그림 같은 한가한 일과 외도로 나간 재주
에서도 스스로 묘(妙)함을 얻었지만 혹 이것만으로 공을 찬탄하는 것은 공에게 누를 끼치는 것입니다.
오호라! 세상에서 공이 장부(丈夫)라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었음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고? 이것이 더욱 슬플 뿐입니다.

공재 윤두서, 그는 진정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과 아쉬움을 동시에 남긴 당대의 선구적 지식인이자 예술인이었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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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광호 교수는 연담 김명국의 <은사도(隱士圖)>라는 작품의 화제시를면밀히 분석한 결과, 이 그림은 어떤 은일자를 그린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죽음을 그린 "죽음의 자화상"임을 밝혀내었다. 화제를 다시 새겨보면, 연담은 유언을 말이 아니라 그림으로 남겼다는 뜻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을 만드니 將無能作有
그림으로 모습을 그릴지언정 어찌 무슨 말을 전하랴畫貌宣傳言
세상엔 시인이 많고 많지만世上多騷客
누가 이미 흩어진 혼을 불러주리오誰招已散魂

연담이 이처럼 <죽음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사실은 너무도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나는 이러한 모든 지적과 가르침에 감사하며 책의 3쇄를 출판하기에 앞서 세밀한 교열을 다시 보아 여러 곳의 미세한 오류를 바로 잡았다. 이미책을 구입한 독자들을 위하여 정오표를 만들었으나 전달할 길이 없는 것이 죄스럽기만 하다.
앞으로도 오류가 발견되면 곧바로 수정할 것을 약속드리며 강호제현들의유익한 가르침을 기다리겠다.

2001년 5월 15일
유홍준 - P-1

활달한 필치로 아무 거리낌없이 북북 그어내린 몇 가닥 선으로 달마대사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얼굴을 묘사하는 데서도 담묵(淡墨)의 속필(速筆)로 그의 이국적 풍모와 깊은 정신 세계를 인상 깊게 드러내주고 있다. 그야말로 손이 움직이는 대로, 붓이 가는 대로 내맡기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수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동양화에서 말하는 운필(運筆)의 힘과 선의 함축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실감할 수 있으며, 도대체 그가 이그림을 완성하는 데 과연 몇 분이나 걸렸을까 생각할 정도로 일필휘지의 속도감을 엿보게 된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작품을 가리켜 신품(神品)이라 했고, 그런 화가를 신필이라 했다. 연담 김명국은 조선시대 화가 중에서 신필로 추앙받은첫번째 화가이다. 김명국 이전에도 안견, 강희안, 이상좌, 김지 같은 수많은대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신필이라는 평을 듣지 못했다. 신필이란 천재성과 기존의 격식을 뛰어넘는 기격(奇格)이 뒷받침되어야 붙여지는 칭호이다. 김명국 이후에도 정선, 김홍도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이 줄을 이었지만 이들은 대가(大家)·거장(巨匠)이라는 칭호를 받았어도 신필이라 불리지는 않았다. 오직 후대의 오원 장승업만이 신필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니 김명국은 조선시대 두 명의 신필 중 첫번째 화가인 셈이다. - P15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이다. 그 화법은 앞시대 사람의 자취를 밟으며 따른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주어진 법도 밖으로 뛰쳐나갔으니, 포치(布置)와 화법 어느 것 하나 천기(天機)가 아닌 것이 없었다.
비유컨대 허공으로 하늘나라의 꽃이 날리듯 눈부시고 황홀하여 형상을 잡아내기 힘들고, 바다에서 용이 일어나듯 변화를 헤아리기 어려우며
무궁함은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
작으면 작을수록 더욱 오묘하고, 크면 클수록 더욱 기발하여 그림에 살이 있으면서도 뼈가 있고, 형상을 그리면서도 의취(畵意)까지 그려냈다. 그 역량이 이미 웅대한데 스케일 또한 넓으니, 그가 별격의 일가(一家)를 이룬즉,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다.

김명국의 예술적 천재성에 대한 남태응의 이 같은 찬사는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와 완암(浣巖) 정내교(鄭來僑, 1681~1757)가 연담을 평한 글에서도 그대로 만나게 된다.) - P16

김명국이 그림 그리는 데 술버릇이 어떻게 작용했느냐는 것은 한낱 재미있는 얘깃거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술이 창작의 촉매제였건 아니였건, 그 취하는 정도에 따라 걸작과 태작이 섞여 나왔다는 것은 자신의 작품 관리에 철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은 엄격히 말해서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오만일 수도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천재성은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기인으로 더 유명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태응은 이것을 꼭 김명국의 작가적 결함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김명국이 한낱 ‘환쟁이‘일 뿐이라는 신분적 제약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고 그를 두둔했다. 남태응은 「청화사」에서 공재 윤두서를 아주 높게 평가한 다음, 세상 사람들이 공재 윤두서가 연담 김명국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공박하고 나섰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공재의 재주가 연담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연담은 천한 신분이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아낄 수 없었던 것이다. 남이소매를 끌고 가면 어쩔 수 없이 손에 이끌려 하루에도 수십 폭을 그려야 했으니, 그 득실이 서로 섞이고 잘되고 못 된 것이 나란히 나와 공재처럼 절묘하게된 것만을 단단히 골라낼 수 없었다.
만약 연담으로 하여금 그 처지를 공재와 같은 위치에 두게 했다면 이름을 얻은 그 성대함이나 작품의 귀함이 어찌 공재만 못하겠는가. 그러니 이런 식으로그림의 등급을 매기는 것은 진실로 어린애나 가질 소견인 것이다.
- P24

그러나 김명국의 예술적 천재성에 대한 이러한 찬사나 증언들은 모두 한두 세대 건너 후대인의 저술들이고,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사실은없다. 이 점은 참으로 이상스러운 일이다. 사실 김명국의 예술을 높이 평가한 남태응과 윤두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태어난 숙종 · 영조 때 문인이었으며, 김명국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뜨거운 애정으로 그의 전기를 쓴정내교는 그들보다 또 한 세대 뒤의 문인이었다. 그러니까 김명국의 예술은동시대가 아니라 반세기 뒤에서야 기록되고 재평가받은 셈이다. 동시대인에게는 하나의 기인으로, 또는 미치광이로 생각되었던 그의 개성적인 필치와기발한 행동이 후대 사람들에게는 그 기행(奇行)과 광태(狂態)가 곧 세상이받아주지 않는 천재성의 굴절로 이해되고 평가되었다는 셈이다.
김명국의 전기로 가장 먼저 씌어졌고, 또 이후에 나오는 모든 그에 대한전기의 모본이 된 정내교의 「화사 김명국전」을 보면 이런 얘기로 끝맺고 있다.  - P28

내 나이 15, 16세 되었을 때(1699년 무렵) 어느 지체 있는 집에서 소위 그의제자라고 하는 자를 만나서 연담의 얘기를 대략 들었으며, 또 동네의 늙은이에게서 ‘지옥도‘ 일화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유묵을 보니 넓고 기이하고 탁월하게 빼어나서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었다. - P29

궁실에서는 인조뿐만 아니라 왕자들도 그림을 좋아했다. 봉림대군(효종)이 심양에 끌려가 있을 때 맹영광에게 구천(句踐, ?~B.C.465: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의 왕)이 회계오나라에게 욕보인 그림을 가져오라고 한 것은 그림 자체보다 그 내용에 더 뜻이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지만, 인평대군은 산수를 잘 그려 이름이 높았고, 그가 한양 낙산 동쪽에 저택을 짓고서 이징에게 단청을 시공하고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게 하여 이징은 수모의 눈물을 흘리며 붓을 잡은 적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인평대군의 남다른 회화 완상 취미를 말해준다. 
사대부의 그림에 대한 취미와 감상 풍조 또한 이전의 어느 시대 못지 않았다. 대신들이 인조의 그림 취미를 공박한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사대부들의 그림에 대한 천기 사상이 얼마나 완고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 중에는 그림에 일가를 이룬 화인이 많았다. 까치와산수를 잘 그린 조속(趙涑)을 비롯하여 포도의 이계호(李繼祜), 매화의 오달제(吳達濟), 소 그림의 김식(金植), 산수의 윤의립(尹毅立), 송민고(宋民古)와 조직(趙稷) 등이 화명을 남긴 이들이다. 특히 선조 · 인조 연간에는 명나라 풍습에 따라 사대부가 어느 한 소재에 특출한 솜씨를 보인다는 이른바 명사(名士) 일기가 문인으로서 하나의 멋이고 교양이라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그래서 조속이 세상을 떠났을 때 『현종실록』에는 그의 행장을 기록하면서 신하로서의 모습과 함께 "그의 그림이 절묘하여 세상에 많이 전하고있다"는 것을 적어놓고 있다. 
사대부 중에서 김상헌(金尙憲)과 허목(許穆)은 당대의 감식안으로 많은 화평을 남기고 있다. 이들의 회화에 대한 견식은 우리나라 화가뿐만 아니라송나라의 유송년, 명나라의 구영(仇英), 당인(唐寅), 문징명(文徵明) - P31

등의 작품에 찬을 붙일 정도로 넓었다.
게다가 낭선군(郎善君) 이우(李俁, 1637~1693) 같은 대안목의 수장가도 있었다. 그가 소장한 화첩에는 공민왕의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와 안견의<산수도>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20)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화원별집(別集)』의 80여 점은 본래 낭선군의 수장품을 기본으로하여 꾸며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안목이었다.  (이 『화원별집』에는 연담의 그림이 3점 실려 있다. 도판) 참조)
또 도화서 화원 중에서는 이징과 김명국 이외에 선조 때부터 활약한 이신흠, 유성업, 이기룡, 한시각 등이 궁중과 사대부 취미에 맞는 감상화를 잘그려 화명을 남기고 있다.
이렇듯 어느 면으로 봐도 인조시대의 화단은 결코 빈약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예술적 환경 속에서 김명국은 화가로서 활동했던 것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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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새벽에 생각하다』 『지독히 다행한』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청마문학상, 만해문예대상 등을수상했다. - P-1

시를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말하지 않은 말, 침묵의 말을 듣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말하지 않은 말을 듣는 능력이 있다. 시의 침묵과 여백과 행간에는 말하지 않은 말, 말이 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말, 말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반죽 상태로 있는 말, 자극을 받으면 깨어날 수 있는 말이 풍부하다. 우리의 내면에도 그런 말들이 있다. 시를 읽으면서 깊이 공감할 때 그 시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이유는 시 속의 말과 내 안의 말이 서로 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가 나의 말을 꺼내준 것 같기도 하고 나의 말이 시가 되어 나오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60년간 농축된 시인의 삶과 시적 고뇌와 희열이 짧은 시의 침묵과 여백 속에 어떤 모습으로 쟁여져 있을까. 어떻게 그 말들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말들을 흔들어 깨워서 움직이게 할까.
짧은 시 안으로 들어가 말하지 않은 말을 엿들어보니 왜 이 시선집이 짧은 시들로 묶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문장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가 얼마나 풍부한지, 읽으면 읽을수록 짧은 시가 어떻게 큰 시가 되는지 체험하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천양희의 시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시선집은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 같은 경험을 주는 귀한 선물이 될 것이다.

ㅡ김기택 시인, 발문‘에서 - P-1

ㅣ시인의 말


일상에서 일생까지
울음에서 웃음까지
슬픔에서 기쁨까지
머리에서 가슴까지
먼 길 돌아와

자연이
새봄을 펼쳐 보이듯 참으로
한 순간을 눈부시게 하는 것이
짧은 시였으면 했다

작은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짧은 시에 겹친다

나는 잘 살기 위해서 시를 쓰지만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
눈물을 보탠다는 것은 더 어려운 것 같다 - P-1

나에게 남은 유일한 위안은
오늘을 살아가는 너에게
짧지만 긴 여운을 보내는 것이다

2025년 여름
천양희 - P-1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 - P-1

뒤편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 P-1

벌새가 사는 법


벌새는 일초에 아흔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칠십만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나는 하루에 몇번이나
내 몸을 쳐서 시를 쓰나 - P-1

머금다


거위눈별 물기 머금으니 비 오겠다
충동벌새 꿀 머금으니 꽃가루 옮기겠다
그늘나비 그늘 머금으니 어두워지겠다
구름비나무 비구름 머금으니 장마 지겠다
청미래덩굴 서리 머금으니 붉은 열매 열겠다

사랑을 머금은 자
이 봄, 몸이 마르겠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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