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2백 년을 대표하는 화가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3원 3개 여섯 분을 꼽고 있다. 3원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3재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碩),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등을 일컫는다. 이런 식으로 말을 만들어 한 시대의 예술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물론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회화사는 3원 3재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으며, 사실상 이들이 영조, 정조시대라는 그림의 전성기와 왕조의 마지막 미술을 상징하고 있으니 이런 세평을 그저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또 그런 평가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나름의 역사성을 갖는다.
본래 3원 3재라는 말이 생기기 이전에 먼저 ‘3재‘라는 말이 있었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보면 "세사인명화삼재(世稱士人名畫三齋)라 했다"는기록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사대부 출신의 선비화가로 영조 연간을 대표한다. - P15

실제로 3재의 화가들은 문자 그대로 우리나라 회화의 신경지를 개척한분들이다. 겸재는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담은 동국진경산수(東國眞景山水)라는 새로운 장르를 확립시켰고, 관아재는 그의 뛰어난 인물 묘사력과관찰력을 기반으로 하여 속화(俗)의 틀을 갖추어냈으며, 현재는 중국의남종문인화(人)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토착화시키는 데 성공한 분으로 관념적 화풍의 그윽한 멋과 조선 그림의 국제적 조응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ㅈ이들 3재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진경산수, 속화, 문인화라는 세 장르는 이후 조선 후기 화단의 일반적 경향으로 공인되어 훗날 3원의 화원들이 추구한 예술 세계는 모두 3재의 화풍에 근거해 있다. 그러니까 영조시대의 선비화가인 3재에 의해 개척된 그림의 새로운 지평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정조시대 이후에 일반화되어 3원을 비롯한 도화서 화원이라는 일종의 테크노크라트들에 의해 확산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 조선 후기 회화사의 큰 흐름이며, 이는 영조와 정조시대 문화적 성격의 중요한 변별점이 된다. - P15

그런 3재 중에서 현재 심사정, 1707~1769)은 이래저래 가엾고 불우한 처지의 화가였다. 그의 삶이 딱했다는 것은 살아 생전의 팔자 소관으로 돌린다손 치더라도,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 고독과 가난을 예술로 승화시킨 주옥 같은 명작들을 당시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은 바 없건만사후 2백 년이 넘도록 왜 그의 삶과 예술은 올바른 조명 한번 받아보지 못했는가.
심사정은 정말로 그림을 잘 그리는 명화가였다. 
남겨진 유작들을 봐도 그의 회화적 기량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으며, 동시대의 평가 또한 당대의 최일류 화가였다. 영조시대 서화가에 대해 가장 풍부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이규상(李奎象)의 『일몽고(一夢稿)』 중 「화주록(畫廚錄)」에는 다음과 같이 증언되어 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은 현재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추앙하였고, 어떤 사람은 겸재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추숭하였는데, 그림이 온 나라에 알려진 것도 비슷하였다. - P16

그런 현재 심사정의 예술이 오늘날에 와서는 겸재에 비할 때 그 예술적성과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대중적인 지명도도 낮게 되어버렀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과 그림을 대하는 관념에서 영조시대와 오늘날은 엄청나게 차이가 생겼다는 점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림을 평가할 때 그 예술적 입장과 관계없이 거론하는 첫번째 덕목으로 작가의 개성, 독창성을 든다. 또 진보적이고 민족주의적인예술관에 입각한다면 현실적 리얼리티가 문제로 대두되는데, 이 두 측면에서 심사정의 예술은 결정타를 입는다. 같은 3재의 화가 중 겸재의 진경산수와 관아재의 속화는 장르 자체의 독창성도 돋보이고, 그 나름으로 사회적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스트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그들의 예술은 오늘날 더욱 부각될 수 있는 소지를 담고 있지만, 현재에겐 그런 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이룩했다는 문인화풍의 확립이라는 것도 중국에서 제시된 패턴을 소화해낸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해버리면 그의예술에서 남는 것이라곤 붓을 다루고 먹을 쓰는 재주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 P18

조선 후기 중국의 남종문인화가 본격적으로 이입될 때 심사정만큼 대가의작품을 많이 방작한 화가는 없었고, 또 그것을 심사정만큼 자기화한 화가도없었다. 그의 방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 중 송나라 마원(馬)을방한 <방마원산수>, 송나라 미 남궁(南宮: 米芾)을 방한 <방미남궁산수>, 원나라 예 운림을 방한 <방예운림산수>등을 보면 구도 · 필법등은 대가의 고전적 작품을 본받아 그렸지만 단순히 그것을 본떠서 베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여기에 예를 든 작품은 그 누구를 방했건 관계없이 여름산수, 가을 산수의 그윽한 멋과 조용한 시정이 은은히 일어나는 명품들이다.
그 필치의 세련됨, 구도의 완벽성은 모두 심사정 산수의 특징으로 그는 이렇 - P20

게 자신의 예술, 우리 예술의 넓이와 깊이를 더해갔던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건 역사적 관점에서 보건, 현재 심사정은 이렇게 확고한 자기의 예술 세계를 견지해왔으니 그에 대한 오늘날의 대접은 부당한것이다.

현재 심사정은 1707년(숙종 33), 죽창(竹) 심정주沈廷胄, 1678~1750)의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심사순(沈師淳, 1701~1723)과 누이가 있는 3남매중 가운데였다. 어려서 이름은 이숙(叔)이라 했고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호는 현재라 하고 묵선(禪)이라는 도인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1769년(영조 45)까지 63세의 일생을 살았는데, 배천(白川) 조씨와 결혼했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여 사촌인 심사문師)의 둘째 아들 심욱진(沈郁鎭)을 양자로 받아들였음을 족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밝혀주는 전(傳)이나 행장은 고사하고 벗이나 동시대문장가들이 증언하는 제대로 된 글귀 하나 아직껏 발견된 것이 없다. 어쩌면 그런 기록은 씌어진 일조차 없을지도 모를 정도로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고적하고 불우한 일생을 살아갔다. - P21

그런 가운데 그의 삶을 얘기해주는 오직 한 편의 글이 전해지고 있으니, 그것은 심사정의 7촌 손자 되는 심익운(沈翼雲, 1734~?)이 쓴 「현재거사 묘지명(玄齋居士墓誌銘)」이다. 심익의 병세집(竝世集)』에 실려 있는 이 글은 "현재거사를 이미 장사 지낸 이듬해 경인년(1770)에 심익운이 그 묘의뜻을 돌에 새긴다"라는 부기와 함께 시작되는데, 쓸쓸하기가 이를 데 없다.
흔히 옛 사람이 묘지명을 지을 때면 고인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그 삶의 아름다움을 수식하는 것이 관례였건만 어찌하여 그 손자뻘 되는 사람은 이토록 애절한 글을 지었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이 묘지명을 통해 심사정의 살아 생전 모습을 애처로운 마음으로 그려보게 된다.

청송 심씨는 그 공훈(功勳)과 덕이 세상에 빼어났다. 우리 만사부군(晩君之源)에 이르러서는 더욱 번창했는데 거사는 그의 증손자였다. - P21

거사는 태어나서 몇 해 안 되어 홀연히 물체 그리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고, 네모 나고 둥근 형상을 모두 그려낼 수 있었다. 어렸을 적에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워 수묵산수를 그렸는데, 옛 사람의 화결(訣)을 보고 탐구하고 나서는 눈으로 본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여到] 드디어는 이제까지 해오던 방법을 크게 변화시켜 그윽하면서 소산한 데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종래의 고루한 방법을 씻어내는 데 힘써 중년 이후로는 융화천성(融化天成)하여 잘 그리려고 기대하지 않아도 공교롭게 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관음대사(觀音大師)와 관성제군(關聖帝君)의 상을 그렸는데 그것은 꿈에 본 것을 그린 것이었다고 한다. 연경(燕京)에 다녀온 사신들이 말하기를 연경의 시중에는 거사의 그림을 사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돌이켜보건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50년간 근심과 걱정, 낙이라곤 없는 쓸쓸한 날을 보내면서도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몸이 불편하여 보기에 딱할 때도 그림물감을 다루면서 궁핍하고 천대받는 쓰라림이나 모욕받는 부끄러움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 P22

그리하여 통유(通幽)의 경지, 입신(入神)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으니 멀리 이국 땅까지 전파되고,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그를 사모하고 좋아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거사가 그림에 임한 바는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하여 대성(大成)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거사가 이미 세상을 떠났건만 집이 가난하여 시신을 염(殮)하지도 못했다. 나 심익운은 여러 사람의 부의賻儀)를 모아서 장례 치르는 것을 도와주어모년 모일 그의 상자(喪子) 욱진이 파주(坡州) 분수원(分水院) 언덕(坐原)에 장사 지냈다. 장지는 만사부군의 묘소 동쪽 어느 언덕이다.
이어 명(銘)을 붙이니, 거사의 이름은 사정이며 이숙은 그의 자이다. 아버님은 정주이고 어머니는 하동정씨였다. 아내에게는 자식이 없어 사촌형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고 향년 63세에 돌아가시어 여기에 장례를 치렀다.
애닯을지어다! 후세인이여, 이 무덤을 훼손치 말지어다!

이 애처로운 「현재거사 묘지명」을 읽노라면 그의 예술은 궁핍과 고독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야생화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 P22

늙을 때까지......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말 속에서 그의 작품은 감추어진 예술의 열정과 인내의 노작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심사정 예술의 남다른 매력과 개성은 바로 이런 삶의 조건에서 형성된 것이다.

현재 심사정이 그토록 불우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그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청송 심씨 집안의 몰락 과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심사정의 집안은 묘지명에도 씌어 있듯이 당대의 명문이었다. 증조할아버지되는 만사(심지원, 1593~1662)은 인조반정의 일등 공신으로 이후 출세가도를 달려 평안감사, 이조판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올랐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는데 셋째 아들인심익현, 1641~1683)은 효종의 둘째딸인 숙명(淑明)공주와 결혼하여 청평위(淸平)에 봉해지고 임금의 총애를 받아 세 차례나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여러 차례 지냈으니왕가의 사돈집으로 권문세가라 할 만하였다. - P23

그러던 집안이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심익현의 막내 동생이자 심사정의 할아버지 되는 심익창(沈益昌, 1652~1725)이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있을 때인1699년(숙종 25)에 단종의 복위를 경축하는 과거 시험에서 시험관과 공모하여 답안지에 이름을 바꿔치기 하다가 들통이 나서 엄벌을 받게 되는 과거 시험 부정 사건 때문이었다. 이때 심익창은 간신히 특명으로 곽산(郭山)에 귀양살이를 떠나는 것에 그쳤으나, 이른바 이 기묘과옥(己卯科獄)은 명문 청송심씨 가문을 파렴치한 패륜가로 전락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심익창은이후 무려 10년간의 유배 생활을 보내고 1709년(숙종 35) 11월에 풀려났다.
과옥의 수치와 10년간의 귀양살이 후 근신하고 있던 심익창에게 또다시정치적 풍파가 덮친 것은 이른바 왕세제(王世弟) 시해 미수 사건이었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은 숙종의 유언을 내세워 연잉군(延礽君: 후에 영조)을왕세제로 책봉하는 데 성공하고 이어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 청정하게 했으나, 소론의 정치적 반격에 밀려 노론 4대신이 유배되고 종국에는 사사되는 신임사화(士禍)가 일어났다. - P23

이렇게 정권을 차지한 소론측은 아예 노론의 지지를 받는 연잉군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 사건의 주범은 소론 중에서도 과격파인 준소(峻)의 김일경(金鏡)으로, 그는 내시 박상검(朴尙)과 궁녀를 매수하여 왕세제를 시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사건 수사 과정에서 그 배후에 심익창이 있었다는사실이 드러났다. 심익창은 박상검의 옆집에 살면서 어려서부터 그를 가르쳤고, 김일경은 심익창 전처의 외사촌 오빠였다는 사실 등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김일경이 내시 박상검과 궁녀를 죽여 증거를 없애버림으로써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그 후 3년 뒤인 1724년에 병약한 경종이 마침내 죽고 연잉군이 임금(영조)으로 즉위하게 되자 사태가 달라졌다. 영조는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이때의 사건들을 재수사하기 시작했다. 먼저 김일경을 신임옥사의 무고죄로처형하고 이듬해인 1725년 봄에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 미제 사건의 배후인물인 심익창을 극형에 처해버렸다. 그리고 심익창의 큰아들인 정옥(玉),
넷째 아들인 정신(神)은 죽기 직전에 감형되어 변방으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니 집안은 완전히 절단나고 말았다. - P24

이때 심사정의 나이 18세였다. 젊은 나이에 그가 받았을 심적 타격은 능히 알 만하다.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의 저서로 생각되는 동패락송 속(東稗洛誦)』을 보면 "현재는 성품이 몽매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숙맥이었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가 이렇게 소심하고 소극적이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소년 시절에 겪었던 이 가정사적 충격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로부터 3년 후인 1728년에는 ‘이인좌의 난‘이 터졌다. 영조 즉위와 동시에 권력을 잃은 소론 중 준소가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여 이인좌가 참형되는 사건이었으니, 이후 소론 중의 준소는 출세할 생각은 꿈에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왕조 사회에서 이럴경우 얼마나 오랫동안 그 꼬리표가 따라다녔는가는 오늘날 우리로서는 결코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혹심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심사정의 그림은 "나라에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에게는 패트런은 고사하고 어느 선비도 내놓고 그의 그림에 시 한 수 지어 붙이는 일조차 없을 정도로 철저히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P24

사실 알고 보면 조선왕조 사회에서는 심사정처럼 불우한 환경에서 일생을보내야만 했던 수많은 양반이 있었다. 개중에는 세상을 등지고 처연한 은일자적 삶으로 일생을 보낸 사람도 있고, 세상을 비관하면서 술로 그 고통을잊으려 한 사람도 있었고, 풍류객이 되어 세상을 떠돌다 일생을 마친 사람도 있었다. 살아가면서 자기 실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억울한 사람들이 보인 참담한 굴욕, 낭만적 반항, 생에 대한 의욕 상실은 그런 식으로나타나곤 한다.
그러나 심사정은 다행히도 그림 솜씨가 있어 그것을 통해 자기 인생을 꾸려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마련했다. 마치 중종 때 양송당(堂) 김시(金)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김안로(金)가 처형되는 비극적 환경을 자신이 예술적 삶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아가서 현재는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쓰라림과 고독의 감정을 붓끝에실어 동시대 누구보다도 화가의 감정이 깊이 개입된 명상적이며 때로는 애수의 시정이 들어 있는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삶이 불우했던 만큼 그의 예술은 정서의 심화를 일으킬 수 있는 회화적환경으로 전환해갔던 것이다. - P25

마치 현대미술에서 서구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국제성이라는이름 아래 외래 사조를 추종하는 데 지나지 않았느냐, 아니면 그 모더니즘의 미학에 자극받고 힘입어 우리 미술의 폭을 넓히고 질을 고양시킨 무엇이있느냐에 따라 그 예술을 달리 평가하게 되는 것과 같다.
현대미술에서 대부분의 화가들이 국제적 유행 양식을 추종하는 것에 급급하여 자기 예술을 만들어내지 못했음에 비해, 수화(樹) 김환기(金煥基)와고암 이응로(李應魯)가 보여준 예술 세계는 우리 현대미술사의 가장빛나는 부분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듯이, 심사정은 중국 그림을 모방하면서그것을 단순히 수평적으로 이동하거나 물리학적으로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반응에 의한 재창출이라고 할 만큼 자기화하였다는 데 중요한 미 - P53

덕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겸재나 관아재처럼 현실과 현상을 추구하다보면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근원성 내지 철학성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의 남종문인화풍속에서 보이는 작가정신의 철학적 고양과 작가적 감성의 적극적 개입이라는미덕을 살려내어 심사정은 그런 관념성과 정서를 적극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진경산수나 속화의 박진감과는 또 다른 미감의 세계, 즉 그림 속에서차분하고 명상적이고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서 고양과 정서의 환기작용이 거기에는 있었던 것이다. 이규상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심사정은 "그림에서 정신을 숭상(畫尙精神"한 화가였다. - P54

조선 후기 회화에서 사람들은 진경산수와 속화가 지닌 사회 변혁적 기류를 읽어내고, 그것이 이 시기의 중요한 미술적 동향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사실인즉 그렇고, 특히 시대 분위기 내지는 현실의 직접적 반영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게 해석할 만하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진경산수와 속화라는 즉물적 사고의 뒤안에 서려 있는 철학적 관념적 사고로서 문인화풍이 공존하고있었음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철학적·정서적뒷받침에서 즉물적 사고는 깊이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겸재의 진경산수와 현재의 남종문인화를 그런 면에서 대비시켜 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겸재에게는 존재론적 사고가 우위를 차지한다면, 현재에게는 인식론적 사고가 앞선다. 겸재에게는 개별성 · 사실성·현실론이 중요했다면, 현재에게는 보편성. 관념성 · 원칙론이 중요했다. 겸재는 대상을 심층적으로 파고들었다면, 현재는 그 대상의 성격을 보편화시키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 그림 형식에서 겸재는 묵법(墨法)보다 필법(筆法)을 중시한 데 비해, 현재는 필법보다 묵법을 중시한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있었다. 그것은 양자의 강점이자 곧 특징이기도 하다.
모든 대비는 대비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혼연히소통되는, 그리하여 서로의 약점을 보강할 수 있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 P54

현실적 사고에 얽매이다보면 보편성을 잃기 십상이고, 존재론에 집착하다보면 인식론의 지평을 망각하게 마련이다. 겸재의 진경산수가 박진감을 표현한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실경의 개별적 성격을 조선 산수의 보편적차원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할 때 반드시 보완했어야만 했던 그 무엇이 있었다. 현재가 보여준 보편성 관념성이라는 것도 당대적 정서와 조선적 서정에 뿌리지 않으면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겸재의 진경산수에 서려있는 남종화적 분위기, 현재의 문인화에 배어 있는 조선적 서정은 바로 그런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힘이었다. 또 겸재도 관념적 남종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렸고, 현재도 금강산 같은 진경산수를 그렸다는 사실은 양자의 대척적 측면 못지 않게 상호 보완적 측면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3재의 시대가 지나가고 3원의 시대가 오면, 단원 김홍도는 바로 이 대비된 양자를 통합하면서 그림의 새 차원을 펼치게 된다. 한마디로 줄여서 겸재의 진경산수를 현재의 남종문인화풍으로 재해석한 것이 곧단원의 산수화라고 할 것이다. 그런 현재 심사정인데 우리는 영조시대의 회화적 성과를 말하면서 그를 너무 소홀히 대접하고 있다는 자책이 일어난다.
살아 생전에 쓸쓸한 나날을 보냈던 현재 심사정의 신세를 더욱 가엾게 만든 것은 사실 이 시대 미술사가들이었다는 미안한 생각이 내 손끝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 P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강전도>에서 완성된 겸재 화풍의 중요한 특징은 대담한 구도의 변형과 필묵의 농담 대비로 요약될 수 있다. 이제까지 그의 금강산 그림이 기본적으로 대상의 충실한 묘사에 있었다면 여기에 이르러서는 사실(寫實)에서사의(寫)로 대전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것이 겸재 진경산수의 가장 큰매력이며 미학이다.
그리하여 겸재의 진경산수에는 화가의 주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그의사상과 시정이 화면 속에 충일된다. 겸재에게 『주역(周易)』을 배운 금석 박준원이 "겸재는 『주역』을 좋아하여 자못 역리(易理)를 잘 풀었는데 역의 이치를 잘 푸는 이는 변화를 잘하는 법이니, 겸재의 화법은 『주역』에서 얻어 그러하던가"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는 겸재 그림에서 음양의 대비란 외형상의 형태만이 아니라 그 내용과 정신까지 말한 것이었다.
그래서 훗날 송호(松湖) 유언술(兪彦述, 1703~1773)이 박대원(朴大源,
1694~1766)이 소장하고 있는 『겸재화첩』에 부친 다음과 같은 글은 소박한 감상론이지만 실상은 겸재의 미학을 핵심적으로 잡아낸 명문이다. - P259

이는 겸재 팔십 노인의 그림으로 박대원의 소장품이다. 박대원은 그림을 알지 못하나 이 그림을 아주 사랑하여 보배로 여기며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으니어찌 그 사랑하는 바가 그림에 있지 않고 사람에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겸재는 그 흉중에 있는 바를 붓끝에 정신을 실어 발현한 분으로, 그는 늙어서까지 이를 잃지 않았다.
겸재의 그림을 말하는 세상 사람들은 문득 그 빼어나고 기이함을 보면서 절규하듯 말하기를 "핍진하도다" "신운이 감돈다"라고 하니 이는 그림을 아는소리이다. 그러나 겸재는 모르는 말이다. 박대원은 홀로 필법의 기교를 뛰어넘어 신회가 통하듯 겸재의 마음을 얻고 팔뚝 아래에 두며 마음으로 그것을 사랑하니, 박대원은 이른바 그림을 아는 자는 아니지만 그림 보는 법은 아는 자가 아니겠는가. - P260

이런 그림들을 겸재의 첫 금강행 때 소작인 「신묘년 풍악도첩』과 비교해보면 초년작과 만년작의 차이를 한눈에 알게 되며 과연 같은 화가의 솜씨인가 의아심조차 일어나게 된다. 만년의 원숙한 노필이 갖고 있는 위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 <만폭동도> 를 보면 겸재의 적묵법과 스스럼없는 필치가 뒤엉켜 있는데 그 빠른 필치로 화면상에는 더할 수 없는 동감(感)이 일어나고있다. 마치 내금강 계곡의 물소리가 울려퍼지는 듯한 생동감이 일어난다. 나무, 산봉우리, 바위, 물결 어느 것을 그리든 스스럼없는 붓놀림이 그대로 감지되니 이것이 바로 겸재가 말한 천취인가 보다.
<비로봉도>는 우뚝한 비로봉 아래 뾰족한 중향성 봉우리들을 배치한 단순한 구도지만 부드럽고 날카로운 붓의 거침없는 필세(筆勢), 그리고 능숙한 번지기 솜씨로 표현한 운연(雲煙)의 모습은 가히 천취를 느끼고도 남음이 있다. - P303

<만폭동도> <비로봉도> 선면 수묵 <금강전도>가 겸재의 금강산 그림 중남성적 진경산수의 멋이라면, 여성적 진경산수로서 만년의 명작은 단연코간송미술관 소장의 <금강대도>와 <정양사도>를 꼽게 된다. 이 작품들은 담묵의 은은한 설채와 필선으로 아름답고도 신비한 화면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마치 망원 렌즈로 포착한 듯 금강대를 강하게 클로즈업한 시각부터 노련한 경지인데 유연한 묵법은 실경의 사실성을 넘어 필법과 묵법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그것은 현대미술에서도 이룩하지 못한 이형사신(神)의 극치라 할 만하다.
겸재 만년의 금강산 그림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선면 수묵<금강전도>이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우리를 부채살 모양에 따라 꺾어돌리듯 한껏 펼쳐놓은 구도로 더할 수 없는 박진감이 느껴진다. 이런 대담한 구도의 변형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만년의 자신감이 아니면 다다를 수 없는 경지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안개를 표현한 담묵의 번지기는 그야말로 원숙미의 극치로 그 감동이란 실경을 보는 그 이상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 P303

겸재 만년의 원숙미가 절정에 달한 작품, 그러니까 겸재의 대표작을 꼽자면 누구든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박연폭도(朴淵瀑圖)>를 빼놓지 못한다. 사실상 겸재 예술의 최고봉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1751년 겸재 나이 76세에 그린 <인왕제색도>는 겸재의 인곡정사 뒷산으로 그 준수한 바위봉우리가 비안개 걷히며 환히 드러나는 모습을 장쾌하게 잡아냈다. 바위봉우리의 미끄러운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몇 번이고 붓을 가하여 그 붓자국이 더욱 질감을 느끼게 한 것이 이 그림의 핵심인데, 이에 못지 않게 주변 산자락의 바위와 소나무 그리고 태점이 너무도 천연스런 붓놀림으로 묘사되어 화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박진감이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숲을 그리는데 농담의 밀도를 지니고 있고 산자락을 타고 오르는 성곽의 모습이나 적묵의 시커먼 바위 위에도 소나무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디테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치밀한화면 경영이 있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하나의 작품이 명작으로 칭송됨에는 그만한 노력과 완결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그림이 76세 노화가의 필치라는 사실이니 만년에도 최선을 다했던 겸재의 창작태도에 우리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 P313

<인왕제색도>가 겸재의 진경산수에서 대상에 충실하면서 박진감을 잡아낸 작품이라면, <박연폭도>는 대상을 과감히 변형시켜 사실성을 뛰어넘어 곧바로 회화미로 나아간 명작이다. 겸재가 이 작품에서 겨냥한 조형목표는 흑백의 강렬한 대비를 통한 화면상의 울림이다. 
수직으로 쏟아지는 폭포수의 흰 물줄기를 강조하기 위해 양옆 벼랑을 한껏 꺾고 구부리고 짙은 먹으로 겹겹이 비비듯 칠하여 그 대비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 그리고 그 강함을 생경한 곳으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 역시 소나무와 태점으로 활기를 넣어주고 있다. 정자 아래로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 선비의 모습과 절벽 위 성문으로 화가의 시점이 분주히 오르내리는 역동감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정밀하게 묘사한 것이 없으면서도 어떤정밀한 그림도 따라올 수 없는 박진감을 일으키는 것, 이것이 바로 만년 겸재의 노필이 보여준 가장 큰 미덕이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가 겸재 예술의 종점이었다. 겸재는 이렇게 자기 예술의 절정에서 인생을 마감했다. <박연폭포> 이후 겸재의 삶과 예술이란 그 절정의 여운일 따름이었다. - P313

겸재의 이러한 만년의 필치를 보면 인생과 예술의 오묘한 리듬을 생각하게 된다. 그림으로 말할 때 대상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며 미세한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는 성실성은 중년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런데 노년을 지나 만년의 무르익은 경지로 들어선 대가들은 언제 그랬더냐 싶을 정도로 그 치밀함을 버리고 대상을 되도록 간략하게 요약하려 든다.
디테일을 과감히 생략하는 것은 물론이고 형상의 골격 자체에 과장과 변형을 가하여 요점만 제시하고 만다. 얼핏 보기에 그것은 불성실하고 소략하다는 생각을 갖게도 한다. 그러나 예술이란 오묘하여 그런 만년의 소략함이중년의 치밀함보다 더욱 박진감 있고 깊은 멋을 전해준다. 그것이 만년의 경지이다.
그러나 인생과 예술에는 준엄함이 있어 만년의 원숙한 경지란 반드시 중년의 치밀함과 성실성을 경험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중년 시절에 만년의 작업을 시도했다면 그것은 불성실이고 일시 성공한다고해도 조로(早老)하고 마는 법이다. 겸재로 말할 것 같으면 60대를 다 보내는노년에 이르기까지도 그런 중년의 치밀함과 성실성을 버리지 않았다. 때문에 겸재의 만년은 더욱 원숙했고, 남들은 노년의 경지에 머물고 만 것을 만년에 이르러 한번 더 높이 끌어올렸던 것이다. 더욱이 겸재는 84세까지 장수하는 천복을 누렸다. 단원 김홍도를 겸재 정선과 비교할 때 아쉬운 것은 단원은 나이 60세 무렵에 세상을 떠나 겸재가 70대에 보여준 만년의 원숙함같은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 P316

조선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분인 겸재의 일생은 이렇게 끝맺었다. 그런데 겸재의 전기를 쓰면서 나는 겸재의 죽음에 대해 이상하리만치애도의 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죽음에 임하여 일어나는 감정이란 오로지 그의 위업에 대한 공경과 찬양뿐이다. 한치 모자람이 없는 고마운 인생이었다는 감사의 마음뿐이다.
겸재가 이룩한 진경산수의 세계는 진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적 산수화를 창시하고 완성했다. 그는 당대의 문화적 성숙에 힘입어 이를 자신의 숙명적 과업으로 알고 신분을 떨쳐버리고, 남들이 천하다고 비웃는 소리에 괘념치 않고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화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과 의지로 이와 같은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래서 그의 위업은 더욱 위대하게 다가온다.
겸재의 진경산수는 당대부터 문인들의 상찬과 존경을 받았다. 그로 인하여 시와 그림은 더욱 가까워졌고 그림의 사회적 위치도 한껏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겸재의 진경산수는 당대부터 많은 화가들이 추종하는 바 되어 그의 제자는 물론이고 화가라 지칭하는 사람으로 겸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강희언, 김희겸, 김윤겸, 정충엽, 정황, 마성린, 김응환, 김홍도, 이인문 ....... 그리하여 18세기에는 ‘겸재 일파의 진경산수화풍‘이 형성되었고, 진경산수는 마침내 하나의 회화 장르로 확립되었다. - P3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의 삶에 대해서는 비록 행장과 묘지는 아직 찾지 못했어도 방계 자료들을 통해 최소한의 관직 이동 상황과 예술적 환경 변화 및 작품의 편년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최완수의 「겸재 정선 연구」(「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는 겸재의 삶을 현재로서는 완벽하게 복원해놓은 우리나라 문화사의 큰 업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는 겸재의 가계는 물론 외가와 진외가의 족보까지 캐내고 그의 패트런이나 진배없었던 서울 장동(洞)의 안동 김씨 집안과의 관계도 소상히 밝혀놓았다.
그리고 최근 한문학과 미술사 분야에서 겸재의 측근이었던 관아재 조영석, 담헌(擔軒)이하곤(李夏坤), 사천(梭川) 이병연(李秉淵), 농암 김창협(金昌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 동계(東谿) 조귀명(趙龜命) 등의 시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추진되어, 이들과의 교류를 통한 색의 인간적·예술적 면모가 다각도로 조명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의 삶에 대해대략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예술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오늘에이르기까지 변함없는 명성과 찬사와 존경의 예찬이 이어지고 있다. 겸재가이룩한 예술 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또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직접 사생하여 이를 감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진경산수의 창시자가 되었고, 또 그것은 후대에 두고두고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하여 겸재의 진경산수는 줄곧 민족적 - P186

산수화풍으로 이해되고 한국적 산수화풍의 창시자로 평가되어 왔다.
진경산수의 사회적 배경은 조선 후기 숙종, 영조 연간에 일어난 사회·문화·예술 전반의 사조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사상에서 실학의 대두, 문학에서 한글소설. 판소리의 등장과 사설시조의 유행, 그림에서 현실을 소재로 담은 속화(俗)의 탄생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그 모두를 ‘리얼리즘시대‘의 산물로 이해해왔으며, 그런 인식 틀은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근래 겸재의 진경산수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두 가지 견해가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하나는 최완수를 비롯한 이른바 ‘간송학파‘들이 겸재의 진경산수를 율곡에서 완성된 조선 성리학이 노론의 정치적 이념으로 구현된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의 산물이라 주장한 것이고, 또 하나는 홍선표, 한정희, 고연희 등 홍익대 출신 중견· 신진 학자들이 진경산수는 명나라 때의 <황산도(黄山圖)> 같은 실경산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학설은 겸재의 예술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는 데 나름대로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두 학설 모두 적지 않은 과장과 오해가 있었다. - P188

겸재의 진경산수를 논함에서 중요한 것은 18세기 전반기 숙종·영조 연간에 이처럼 민족적이고 감동적인 우리의 산천 그림을 훌륭히 예술적으로그렸다는 사실이다. 겸재의 작가의식이 여기에 있는 한 그가 진경산수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황공망을 이용하든 <황산도>를 원용하든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독창성이란 남이 하지 않은 그 무엇을 혼자 제시했다는것이 아니라, 남들이 이룩하지 못한 또는 생각하지 못한 예술 세계를 창출해냈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기법적으로 여러 선례를 원용하는 것은 어느시대, 어느 대가에게나 있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겸재의 진경산수는 겸재 이전 시대에도 있었던 사경산수景山水)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중국 남종화(南)의 예술적 성과를 받아들임으로써 한 차원 높은 민족적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기왕에이동주, 최순우, 안휘준 등이 해석했던 주장은 그대로 유효한 것이다. 사실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겸재의 벗인 조영석이 겸재의 『구학첩(帖)』에 부친 그 유명한 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겸재의 이 화첩은 먹을 씀에는 자취가 없고 번지기에는 법도가 있고, 깊고 울창하며 윤택하고 빼어남이 있다. 거의 송나라 미불(米芾)과 명나라 동기창(董基昌)의 울타리 안에 들어갈 만하다. 조선 3백 년 역사 속에 이와 같은 - P192

것은 볼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그 동안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은 산수의 윤곽과 구도를 잡을 때 (화본에 나오는) 16준법(十六준法)에 두었기 때문에 계곡이 여러 모양으로 흐르고 굽어내리는 모습을 똑같은 필치로 묘사하면서도 아직껏 이것을아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싸여 있어도 오직 한 가지수묵법으로만 표현되어 그 앞과 뒤,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 얕고 깊음, 그리고토파(土坡)와 돌의 평평하고 험한 세를 가려 표현하지 못했다. 물을 그려도잔잔함과 급함을 구별하지 않고 두 붓을 새끼 꼬듯 비껴서 아울러 잡고 그렸으니 어찌 산수가 있다고 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런 주장을 했을 때 겸재 또한그렇다고 했다.
겸재는 일찍이 백악산(白岳山) 아래 살면서 그림을 그릴 뜻이 서면 앞산을마주하고 그렸다. 산의 주름을 그리고 먹을 씀에 저절로 깨침이 있었다. 그리고 금강산 안팎을 두루 드나들고 영남을 편력하면서 여러 경승지에 올라가 유람하여 그 물과 산의 형태를 다 알았다.
그리고 그가 작품에 얼마나 공력을 다했나 보면, 다 쓴 붓을 땅에 묻으면 무덤이 될 정도였다. 이리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이 한결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병폐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이다. - P193

이하곤은 해악전신을 보면서 겸재의 진경산수에는 데생력(사생력)도데생력이지만, 형사가 아니라 전신으로 재해석해서 나타내는 능력이 있음을보고 이 같은 찬사를 보낸 것이다. 그래서 이하곤은 이것을 갖고 싶어하며이렇게 말했다.

사천이 금화를 다스릴 때 겸재와 함께 동쪽에 가 놀면서 해산(海山: 금강산)의 기이한 곳을 만나면 문득 붓을 들어 모사케 하여 무릇 30여 폭을 얻었다. 이윽고 김창흡과 조유수에게 부탁하여 각 폭마다 발문을 짓게 하고 또 내게도 이어 부치게 하니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여기에 써서 공간을 메운다......
흉중에 모름지기 하나의 금강산이 따로 있어서 이빨과 가슴이라는 것이 모두 구름과 언덕과 나무와 바위로 되어야만 그런 후에 가히 금강산을 잘 보았다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그림이나 문자들은 모두 사족에 속하는 것이다. 사천이 안목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그림을 나에게 주어야한다. 한번 크게 웃으며 담헌거사는 또 희제(題)하노라.

이하곤의 입장에서는 진경산수의 진면목은 남종산수화의 한 이상인 흉중구학(胸中丘壑)을 그리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에 형사를 무시할 수 없지만, 그 대상에 얽매이지 말고 강약의 변용, 과장과 생략이라는 살활조종을 통해 전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점은 겸재 입장에서도, 이병연 입장에서도, 김창흡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진경산수의 미학은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형상을 통해 전신으로 나아가는 이형사신(以形寫神)에 있다. - P223

그러나 겸재가 섣불리 자기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이처럼 고전을 차근차근 방작하는 중년의 겸손과 성실성을 거쳤기 때문에 훗날 자신의 개성에 힘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옛 사람의 업적을 생각할 때 보통 그 결과만을 갖고 평가하게 된다. 그것이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역사적 평가란 대단히 준엄한 것이다. 이 역사적 평가에만 의존하다 보면 우리는 한인간이 한 화가가 어떤 노력 속에서 그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낳게 되었는가라는 그 과정과 예술적 고뇌와 인간적 성실성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 점에서 역사적 평가란 너무 잔인하고 때론 경박한 면도 없지 않다.
겸재의 경우 우리가 그를 위대한 화가로 칭송하는 것은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폭도> 같은 박진감 넘치는 진경산수에 있다는 것은 움직일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겸재는 그 위대한 민족적 화풍인 진경산수를 창출하기 위해 기해년화첩』 같은 남종문인화풍에도 열중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진경산수는 고루한국수주의적 색채나 지방적 낙후성에 빠지지 않고 국제적 시각에서도 당당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초가 되어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국제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고전을 통과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같은 것이다. 나이 40대 때 『기해년화첩」 정도밖에 그리지 못했던 겸재가 20년 뒤인 59세 때는 <금강전도>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낳을 수 있던 것에는 이런 역량의 축적이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겸재는 대기만성형의 대가였다. - P2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아재가 그린 <조영복 초상>은 그가 당대에 왜 인물화의 대가로 손꼽혔는지를 유감없이 증명하는 명작이다. 우리나라의 초상화 전통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는 당장 진재해(秦再奚, 1691~1769)가 그린 <조영복 초상>의 뛰어난 사실성으로 알 수 있다. 관아재의 <조영복 초상>은 거의 초상화가들의 정형화된 초상화의 전통에 따르면서 한편으로는 선비화가다운 다른 면모를 보여줌에 주목하게 된다.
우선 조영석의 초상화에는 인물의 기품이 넘처흐른다. 기존의 초상화에서도 신중하게 추구했던 전신의 가치가 여기서 더욱 역력히 살아나고있다. 사대부적 기상이란 화원이 아닌 사대부화가의 손에서 더욱 살아나고있음은 공재가 그린 <심득경 초상>에서도 이미 보아왔듯이 관아재의 초상화 또한 고고한 선비의 분위기를 품위 있게 잡아내었다.
둘째는 형식에서의 자유로움이다. 기존 화원의 초상화는 주어진 초상화의 규범에서 조금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반면 관아재는 그런 제약에서 일탈할수 있는 자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대부화가의 유리한 조건이었다.
사각건(四角巾)에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빨간 도포끈을 동여맨 평복(平服:服)을 입고 있는 모델의 모습은 공식적인 엄격성을 벗어나고 있으며, 몸체를 마치 커다란 자루 속에 담은 것처럼 과장의 파격을 보여준 면은 더욱 그렇다. 특히 무릎 위에 가볍게 놓은 양손의 표현은 이 초상화의 백미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수많은 초상화에서는 대개 손을 그리지 않았다. 두 손을 마주잡고 공손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면서 손을 소매 속에 감추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초상화의 초점을 얼굴에 맞추기 위한 조형적 관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손을 그리면 초상이 훨씬 자연스럽고 더 인간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이처럼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손을 그린 것은 <신임(申) 초상> <강세황 자화상> 이외에 조영석이 그린 <조영복 초상>밖에 없다. - P134

나는 평소에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없지만 오직 산수와 시와 그림만은 독실하게 좋아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이를 궁구한 바는 있었지만 아직 제대로 얻지는 못하였다.
무릇 시를 배우는 일은 숭상받아 왔다. 그림도 깃발이나 종정(鼎)에 사용되면서부터 오랜 옛날의 성인들이 없애지 아니한 것이다. 산수를 유람하는 일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고인일사(高人逸)나 시인들은 말할 것도없고 후세의 대현명유(大賢名儒)들조차 기쁜 마음으로 종종 홀로 내달려 그윽한 곳에 이르는 일을 떠올리면서 마치 그만둘 수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무릇 시는 성정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며, 그림의 경우는 문장과 글씨가 해낼 수 없는 것을 그림에서 구하는 것이니 진실로 취할 바가 있는 것이다.
저 맑게 흐르는 물이나 하얗게 드러난 바위는 사람의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여기에서 무엇을 취하겠는가? - P140

동자를 데리고 그윽한 곳에 은거하며 독서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한 선비의 집에 눈 내린 어느 날, 한 친구가 동자에게 고삐를 쉬게 하고 소를 타고찾아왔다. 이에 두 선비는 서재에 마주 앉아 고담준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의 이야기이다.
집주인은 학창의를 입고 있고 방문객은 두건을 쓰고 있는데 모두 의젓이 정좌하고 있다. 이때 창문은 닫혀 있었겠지만 화가는 그림을 위해 창을 열어놓았는데 방안에는 책이 그득하다. 이 두 인물 묘사에서 우리는 그들이 다름 아닌 조선의 선비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데, 이처럼 조선 그림에 조선의 선비가 정확하게 표현된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이다. 
이제까지 우리나라 산수화에 나타나는 인물은 모두 중국 화본에서 제시한인물묘사법을 벗어나지 못하여 그저 막연히 선비 · 신선 • 나그네를 묘사한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설중방우도>에는 조선의 선비가 당당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는 겸재 정선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자연이 그림의 소재로 승격되고, 거기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의 선비가 등장하게 되는 것과 똑같은 한국회화사상의 일대 사건이며 쾌거이다. - P168

이제까지 우리나라 산수화에 나타나는 인물은 모두 중국 화본에서 제시한인물묘사법을 벗어나지 못하여 그저 막연히 선비 · 신선. 나그네를 묘사한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설중방우도>에는 조선의 선비가 당당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는 겸재 정선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자연이 그림의 소재로 승격되고, 거기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의 선비가 등장하게 되는 것과 똑같은 한국회화사상의 일대 사건이며 쾌거이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림 하단을 보면 동자 둘이서 자유스런 몸짓으로 반가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속화의 한 장면처럼 삽입되어 있다. 관아재는 양반들이 격식을 차릴 때 머슴과 동자는 마냥 자유스럽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음을 이렇게 명쾌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도판21 또 질질 끌려가는 소의 모습이 무척 재미있고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눈 덮인 뒷산, 푸른빛을 띠고 있는 겨울 소나무와 향나무 그리고 마른 가지에 핀 눈꽃에는 선비화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취가 물씬 풍기고 있다.
관아재가 이런 대작의 명작을 좀더 많이 남겨주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가 좀더 적극적인 화인으로 살 수 있었다면 우리의 이런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었으련만 현실이 그렇지 못했던 것이 정말로 안타깝다. - P168

그는 평생 개결한 선비로 일생을 살고 싶어했다. 비록 미관말직을 지내더라도 생욕. 색욕· 관욕. 재욕 등 4욕(四慾)을 경계하며 흐트러짐 없는삶을 영위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림을 좋아하였다. 그는 그림이 세상에 공헌하는바, 인간의 정서 함양에 기여하는 바를 정확히 인식하며 글과 시가 할 수 없는 것을그림이 해낼 수 있다고 믿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림이란 현실 속에 있어야 한다는 투철한 사실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인물은 화보 속의 인물이 아니라 대개 현실 속의 인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서민들의 삶을 애정어린 시각으로 그린 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도화서 화원들이 그리는 원법(院法)에 선비화가들의 문학에 배어있는 유법(法)을 발현하여 그림의 격조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
세상에는 관아재의 이런 그림 재주와 취미를 간혹 천한 환쟁이와 동일시하며 비방하고 폄하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면 관아재는 선비로서 품위를 잃는 것을 싫어하여 그림에서 손을 떼고는 삼갔다. 그가 두 차례나 어진 제작에 참여하라는 왕명을 거역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그는 어쩔 수 없는 한 사람의 화인이었다. 그림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주옥 같은 명화, 그것도 속화와 조선적인 인물화에서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관아재는 겸재의 진경산수를 평하여 "조선 3백 년 역사 속에 조선적인 산수는 겸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관아재에게 그대로 돌려 "조선적인 인물화는 조선 3백 년 역사 속에 관아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 P1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복(喪服)을 입고 건(巾)을 뒤집어 쓴 채로 지팡이를 비스듬히 집고는 등을 돌린 채 걸어가는 이 인물은 저승길로 걸어가는 연담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한 화가가 <죽음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사실은 연담 이전에도 없고, 연담 이후에도 없는 오직 연담만이 보여준 그의 뛰어난 개성이다. 그 처연함이란 화면 속에 긴장감을 자아내면서 연담의 허허로운 임종을 엿보게 한다. 자신의 죽는 모습을 마치 유언을 남기듯 그림으로 그렸다는 소탈한 모습에서 우리는 과연 연담은 연담이로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며, 그는 결코 한낱 환쟁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연담 김명국, 그는 죽음 앞에서 <죽음의 자화상>을 그린 인생의 달인(達人)이었고 그림의 신필이었던 것이다. - P51

김명국은 확실히 인조시대 화가로서 당대의 이단이었고, 기인이었다. 그는 무엇이든 취흥에 따라 그려낼 수 있는 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의 절묘한 작품을 보고 상찬해준 사람들이 없었고,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모습은 더욱 없었다. 오직 두 차례 일본에 갔을 때 그 영광을 누렸을 뿐이다.
그는 시류 속에 편안히 안주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낭만적 반항의 표정일지언정 자기 자신을 지켰다. 그 점에 연담의 큰 매력과 미덕이 있다. 바로그 점 때문에 연담은 훗날 17세기 조선시대 화단에서 가장 개성적인 작가로살아남게 되었다. 그것이 김명국의 영광이다. 세상이 바뀌고 반세기도 안되어 숱한 찬사 속에 그는 다시 태어난 셈이다.
결국 그의 삶과 예술은 시절을 잘못 만나 기인이 되고 만 한 신필의 자랑스런 반항의 이야기인 것이다. - P51

윤두서는 당당한 한 선비로서 정확하게 시대정신의 추이를 인식하고서 그것을 학문적으로, 예술적으로 실천한 한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그의 지인들은 공재를 가리켜 일국의 재상에 되고도 남을 높은 지식과 도덕의 크기를 갖고 있고, 그의 풍모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넓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고 삶에 지친 그는 결국 고향 땅 해남으로 낙향해 불과 48세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가 낙향하던 바로 그 해, 45세 때 그런<자화상>은 공재의 그러한 풍모와 고독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공재의 <자화상>은 얼굴만을 그리는 일종의 소조(小照)라 할 수 있는데, 상투 위와 수염 아래쪽은 모두 생략하고 얼굴만 부상시키는 구도가 파격적이고 박진감이 있다. 본래 이 <자화상>은 철선묘(鐵線描)로 풍만한 어깨선을 흐미하게 그려넣은 것이었는데 후대에 보수하는 과정에서 아예 지워져버렸으니 마치 허공에 떠오른 얼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범의 상을 한 준수한 얼굴은 육색(肉色)에 윤기가 역력하며 정면을 응시하는 눈초리가 자못 삼엄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압도해버린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속에서 느꼈던 온갖 고뇌가 서려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 역정이 이 작은 화폭에 완벽하게 담겨 있다.
그리하여 한국 회화사상 최초의 자화상인 이 그림은 우리나라 초상화 중최고 걸작으로 손꼽혀 회화로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되었다. - P58

그러나 공재가 간접적으로 조선 후기 회화 전체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다. 특히 속화는 그가 개척한 바를 관아재 조영석과 단원 김홍도가 계속 발전시켜 마침내 가장 조선적인 장르로 완성된다. 또 그가 시도한 문인화풍은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등으로 이어져 마침내 조선적으로 정착되었다. 또 그가 시도한 동국진체(東國眞體)는 백하(白下) 윤순(尹淳)과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에 의해 완성을 보았다. 그런 미술사적 신경지의 선두에 공재 윤두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 P107

실제로 공재 글씨는 고전으로 거슬러올라가 거기에 우리 풍토에 맞는 향색(鄕色)을 가미한 글씨로서, 옥동과 함께 공재가 추구한 동국진체는 결국50년 뒤 그 후배인 백하 윤순과 원교 이광사에서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이점에서도 공재는 선구였던 것이다.

공재 윤두서는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의 후예라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시운을 얻지 못하여 평생 경륜을 펴보지 못한 불우한 선비였다. 그러나공재는 세월을 탓하지 않고 학문과 예술에 힘써 숙종 연간의 문화 기류 속에서 명백히 진보적 입장을 취하며 ‘실득(實得)‘ 있는 학문을 추구하고, 민족주의적인 ‘동국진체‘를 개발하고, 현실주의의 입장을 띤 ‘속화‘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진실로 불운하게도 공재는 학문과 예술이 원숙하게 무르익을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은 너무도 안타깝고 아까운 변고 - P111

였다. 그리하여 벗 옥중 이서는 다음과 같은 통곡의 제문을 바쳤다.

슬픈 일이로다. 하늘은 이 세상을 편안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어찌이다지도 빨리 공을 앗아갔단 말인가? 공의 인후하고 관대한 덕과 공평하고정직한 의지, 영민한 지혜와 폭 넓은 지식,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학문적·예술적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개척한 선구적 과제는 모두 뛰어난 후배들이 그대로 이어받아 학문에서 실학은성호 이익이, 글씨에서 동국진체는 백하 윤순이, 그림에서 속화는 관아재조영석이 마침내 하나의 장르로 완성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영조시대 문예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의 모든 기틀은 사실상 숙종시대에 그 밑거름이 만들어진 것이라 말하는데, 공재 윤두서는 바로 그 문화를 일구어낸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공재의 선구적 위업, 그리고 천수를 다하지 못한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성호 이익이 눈물로 쓴 제문은 공재가 누구였는가를 이 세상에 가장 극명하게 증언한 글이었다. - P113

죽은 자는 유감이 없고 산 자는 더욱 힘써야 하는 법. 공은 진실로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생은 또한 일찍이 밖에 나아가서는 공의 풍채를 보며 즐거워하였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공의 생각하는 바를 간직하였습니다.
말씀하시는 데는 사물의 이치를 갖추었고, 행동함에는 법도가 있었으니 선비로서 현자(賢者)를 희구하는 분이었습니다.
사람을 대함에 공손함과 관대함이 있어, 어진 이고 어리석은 이고 환영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사람과 잘 사귄 분이었습니다. 일에 임할 때는 민첩하면서도 중용을 지키셨고, 예술에서는 편벽됨이 없었습니다.
오호라! 공이 세상을 떠나니 좋은 벗을 잃은 외로움이 앞서고, 들어보기 힘든 얘기를 들어볼 곳도 없게 되었으며, 그 당당한 풍모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재능은 있었으나 명이 짧음은 하늘의 뜻이거늘 어찌 공이 의도한 바라 하겠 - P113

습니까. 혹 이를 애석하게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공은 그림 같은 한가한 일과 외도로 나간 재주
에서도 스스로 묘(妙)함을 얻었지만 혹 이것만으로 공을 찬탄하는 것은 공에게 누를 끼치는 것입니다.
오호라! 세상에서 공이 장부(丈夫)라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었음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고? 이것이 더욱 슬플 뿐입니다.

공재 윤두서, 그는 진정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과 아쉬움을 동시에 남긴 당대의 선구적 지식인이자 예술인이었다. - P1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