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강 18


날벌레떼가 잔 날갯짓을 비벼대던 하늘이다
날벌레들은 닳아서 모두 떨어졌고 지금은 
별빛들이 잉잉거리고 있다

강 물줄기가 환하다 내 발등도 밝다

어느 날은 눈자위 꺼지고 귓속 깜깜한 저녁에

나는 걸어가며 몇 번이나 더듬대고 내 발걸음보다 더디게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서 물줄기보다 더딘 발걸음으로 어디까지 오래 걸었던가 내 발걸음보다 더딘 걸음으로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얼마나 길게 귀 기울여서 들었던가

자정에는 한 별자리가 내려와 등에 얹혔고

나는 내내 걸어서 강 물줄기를 뒤따라간다 물에 떠 흘러가는 별빛 몇이 깜박이며 뒤돌아보며 걱정스레 - P100

두런거리는 여러 말들을 고작 한두 마디도 못 알아듣는다

강 밑바닥에 별빛이 꽉 찼다 - P101

탐진강 19


읍에 가서, 예양리의, 가파르고 비좁고 이리저리굽은 골목길을 걸어 내려간다 길의 끝에는 강이다

모난 모퉁이에 부딪혀 나뒹굴고 굽은 굽이를 돌며 휘어지고 튀어나온 처맛날에 눈썰미가 잘리기도 하는 이 길을 누구의 한 生이라 이름 지어 부를 것인지, 염려한다

한때는 강을 끌어다가 내 가까이에 매어두었다 징검돌을 딛고 가며 물 위를 걷고 물길 저 너머로 조약돌을 팔매질하던, 그때는 강을 건너며 발을 적시지 않았다

지금은 강에 닿아 다만 강을 본다 먼 길을 흘러와 잠깐 닿은 강이 길을 내며 더 멀리 흘러가는 것 본다 강에 닿은 사람이 멈추지 못하고 걸어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 본다 - P102

발바닥 젖고 발목 잠기고 무릎 안에 고이고 가슴 가득 차오르고

강 건너에서 누구인가 오래전에 잊었던 내 이름을 부른다 강에 안개 짙다 - P103

백목련꽃


그걸 알아보라고 했다. 꽃이 피기는 필 것인지를, 꽃 피는 날은 날이 개이고 하늘이 훨씬 가까울 것인지를, 그런 하늘에서야 꼭 꽃이 피는지를,

장지에 눌린 창호지가 툭, 툭, 뚫리듯

머리 위 여기저기서 하늘이 뚫린다. 불쑥, 
불쑥, 꽃봉오리들이 목을 빼 들이민다. 가득하게 한 입씩 햇살을 베어 문다. 이를테면 지금 백목련꽃이 피었다. 하늘은 파랗고 저렇게 꽃이 희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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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안에


잘라낸 뒤엔 모체 가까운 곳에 두세요
고무나무의 삽수를 설명하는 전문가의 목소리가 밝다

물을 너무 자주 갈아주어도 안 됩니다
가지치기는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는 과정이에요

흠칫 놀라게 되는 말들이다
밝음을 신뢰하지만 밝기만 한 사람은 무섭다

난간에서 바닥으로
벽에서 창으로
주인은 나의 거처를 여러 번 옮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곁
홀로서기 좋은 위치를 궁리중이다

밤이 되면 독 안에 든 기분이 들 거야
그때까지 햇볕 이불을 충분히 덮어야 해

해결되지 않은 마음을 우후죽순 밀어올리는 계절,
봄이라 했다

태양과의 눈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여름  - P130

마른잎을 전리품처럼 매달았다, 가을
생장점이 닫히는 계절, 겨울
독 안에서
독 안에서

깨버리면 그만일 독이더라도
연두를 밀어올리려는 발걸음

당신은 나의 가지를 잘라 간다
무성하다는 뜻이다 - P131

굉장한 삶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내려왔는데
발목을 삐끗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런 것이 신기하다

불행이 어디 쉬운 줄 아니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또 늦은 건 나다
하필 그때 크래커와 비스킷의 차이를 검색하느라

두 번의 여름을 흘려보냈다
사실은 비 오는 날만 골라 방류했다
다 들킬 거면서
정거장의 마음 같은 건 왜 궁금한지
지척과 기척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

장작을 태우면 장작이 탄다는 사실이 신기
해서
오래 불을 바라보던 저녁이 있다

그 불이 장작만 태웠더라면 좋았을걸
바람이 불을 돕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솥이 끓고
솥이 끓고 - P144

세상 모든 펄펄의 리듬 앞에서
나는 자꾸 버스를 놓치는 사람이 된다

신비로워, 딱따구리의 부리
쌀을 세는 단위가 하필 ‘톨‘인 이유
잔물결이라는 말

솥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신기를 신비로 바꿔 말하는 연습을 하며 솥을 지킨다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
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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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


그는 다섯 개의 칼을 가졌다

나는 색이 곱고 결이 유순한 나무 도장을 하나 집어
그에게 건넨다

그는 먼저 구획을 나눈 뒤
칼을 골라 든다
이 자리에서 삼십 년을 했어요
요즘은 기계로 파는 데가 많지만 도장이라는 게 필시 칼맛이거든요
묻지 않은 말끝엔 잘 왔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나는 잘 왔다는 말을 생일 축하인 양 곱씹으며
가게 내부를 둘러본다
한쪽 벽면 가득 열쇠가 걸려 있고
한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침침해서
이름을 일으키려면 그의 이마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안내삼아야 한다

그는 여러 번 칼을 바꿔 든다
곡선을 위한 칼과 직선을 위한 칼
도려내는 칼과 깎는 칼
시작하는 칼과 끝맺는 칼을 지나 - P110

서서히 떠오르는 이름을 보면서

당신도 나를 이렇게 만들었겠군요
저 먼 지평선을 향해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것들을 열쇠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열쇠 이전의 열쇠들은
자신이 태어나는 순간 열거나 잠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여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 잠그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

너무 오래 의자에 앉아 있어 의자가 되어버린 적막에게
잠시 속내를 털어놓는 동안

도장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울퉁불퉁하고 기계로 판 것만큼 정교하지 않다

값을 치르고 미닫이문을 끼익 연다
등뒤에 다섯 개의 칼, 골몰하던 뒤통수를 남겨두고

문턱을 넘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본다 - P111

칼과 열쇠가 한통속인 이유를
도처에 문이 있는 세계에
나를 외로이 남겨둔 이유를 묻고 싶었다 - P112

물색


그 집에선 낙엽 냄새가 났다

순간 위령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대신
단지 끝에 공원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던데 한번 가볼까. 말했다

그러나 그리로 가지는 않고

우리는 살 집을 찾으려는 거잖아
오전 열한시인데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어두웠어

살아 있는 집은 따로 있다는 듯이
말했다


*

그날은 도망치듯 낮잠을 잤다

수박 속살을 뭉개며 노는 아이들
팔뚝을 타고 흐르는 다홍빛 물

창을 열고 초를 켠다 - P116

집은 가진 것을 내보이는데
그럼 나는 무얼 내보이는 사람인가 
생각하면서


*

집을 본다. 이불을 깨지 않는 집
집을 본다. 파충류를 기르는 집

서향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어요 암막 커튼이 필요 없거든요
벽면 가득 곰팡이가 피었는데 두 사람이 살기엔 이만한 집이 없다고


*

경사로를 따라 굴러간 수박은
너무 커서 맨홀에 빠지지 않았다
결국 쪼개져 붉음을 들키고 만다


*

모든 절단면은 칼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 P117

집은 듣고 있었을까
유리컵에 실금이 가는 소리

모르고 물을 따라 마셨는데 목이 따끔하다
잔가시가 가득한 날들이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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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과 윤국에 대한 근심 걱정과 그리움 사이에 가끔 끼여드는 송영광을 향한 환국의 감정이다. 그것은 오랜 우정을 통하여 서로 알고 이해하는 데서 우러난 순수한 감정인 것이다. 물론 천성적으로 타고난 영광의 인간적 매력에 매료된 점도 있었지만 상처 받은 영혼의 신음, 깊은 곳에 묻어둔 통곡 같은 것, 외톨이의 애잔한 그림자를 끌고 가는 듯한 모습, 그것은 슬픈 것이었지만 환국에게는아름다운 것이기도 했다.
섬세하고 화사한 영광의 감수성을 사랑했으며 굽힐 줄 모르는 내면의 견고한 은빛 성(城)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특히 그림을 그릴 적에 환국은 영광을 많이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어떠한 장점에도 백정이라는 신분의 꼬리표는 불어다녔다. 그 꼬리표는 그의 삶을 강인하게 지배하려 했고 그것에 불복하여 현실에서 유리, 방랑의 길을 택하였던 송영광. 환국은 길을 걷다가, 한밤중에도 가끔 그의 삶을 생각할 때가 있었다. 떠난 뒤에는 더욱 선명하게 그의 모든 것이 떠오르곤 했다.
‘영광의 어디가 어때서? 양현이 불행해질 것이라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어째서 불행해지나. 왜 그런 말을 했지? 전염병 환자처럼,
양현으로부터 물러나라고, 그에게 상처를 주기론 나라고 예외는아니었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나를 용서했다.‘
환국은 그런 말을 혼자 중얼거릴 때 깊은 회한에 빠진다.
- P247

‘영원한 자유인 송영광, 세속적 욕망을 다 버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취했던 사내, 넌 백정의 그 시퍼런 칼날같이 절벽에 서 있었고방금 잡은 짐승의 피같이 신선(新鮮)했다. 상식에 찌든 내가 널 보고 무슨 말을 했지? 양현과 너를 저울대에 올려놓고 마치 인색한장사꾼처럼 저울질을 했다. 도대체 사람과 삶은 저울대에 올려놓을 수 있는 뭐 그런 거였나? 어쩌면 영광은 자신의 생애, 단 한번, 양현을 위하여 현실과 타협하려 했는지 모른다. 단 한번의 기회였는지 모른다. 그것을 박탈할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있었는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도 있었다.
"지나놓고 보면 양현이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님도 아시다시피 주변 사정에 따라서 마음을 달리할 그런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양현이가 세속적 욕망이 강했다면 영광이를 단념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비밀을 묻어둔 채 우리를 기만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흑 오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순전히 양현의 감정 문제였지 두 사람이 뭐 장래를 약속한사이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나도 안다."
"?"
"그애는 외로웠고 짝을 찾고 싶었을 거야."
이 경우 짝은 반드시 남자를, 결혼 상대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동류(同類)를 찾는다는 그런 뜻의 표현이다.
"네, 바로 그랬을 것입니다" - P248

찬하는 발길을 옮겼다. 명희는 말뚝같이 길 위에 서 있었다.
조찬하와 오가다는 환국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찬하가 급한 걸음으로 오가다를 따라잡았을 때 굳어버린 듯 오가다는 말이없었다. 뿐만 아니라 찬하를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귀었음에도, 옆에서 일의 전말은 알고 있었지만 찬하는 오가다에게 자기 마음 깊은 곳까지는 털어놓지 않았다. 그것은 굳이 비밀로 하려는 의도라기보다 찬하의 교양에 속하는 일인 듯싶었다. 보여지는 것을 감추려 하지는 않았으나 자기 감정에 대한 설명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가다는 가장 첨예하고 가장 절망적인 바닷가에서의 사건을 목격했으며 부서지고 깨어지는 찬하의 모습을 보았다. 한 사나이가 철저하게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오가다는 너무나잘 알고 있었다. 그때 찬하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데 얼마나 낭패를 했으면, 얼마나 자신이 처참했으면 인실과 오가다를 낯선항구에 내버려둔 채 말 한마디 없이 혼자 떠나지 않았던가. 그것은또한 오가다에게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꿈같이 인실과 맺어졌고아들 쇼지와 이어진 진하고도 끈끈한 인연의 줄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거대하고 은밀하며 기적과도 같은 우연, 만나는가 하면 헤어지고 아아, 인간들의 끝이 없는 드라마, 오가다는진정 그 찬란함에 눈부심을 느낀다.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간에 행복이든 불행이든 간에 삶은 찬란하고도 신비롭다. 그것은 어떠한 힘으로, 무엇에 의해 짜여졌더란 말인가.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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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이는 허겁지겁 담배를 꺼내 붙여문다. 양필구(梁必求), 그는 누구인가. 석이 처남이었다. 더 분명하게는 전처 양을례의 이복 오라비, 혼인 전부터 삼일 운동을 전후하여 사귄 친구로서 석이와 필구는 동지이기도 했다. 사악한 을례 친정어미가 석이 모친에게 작용하여 혼인이 성사되었을 때 양필구는 마치 타인과 같이 그들 결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또한 누이나 계모와의 관계 역시 타인과다를 것이 없었다.
석이 마음속 깊은 곳에 그리움은 있었으나 은인으로서 연상의 기생, 정작 본인 기화는 석이 감정 같은 것은 알지 못했는데 을례는 의심하여 질투하고 보복하려 했으며, 혹 석이에게 장래가 없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핑계로 삼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석이 뒤를 쫓는 나형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등, 결국 석이는 만주로 피신해올 수밖에 없었다. 송관수 양필구 이범준은 그보다 늦게, 군 - P91

자금 강탈사건에 가담했고 군자금 수송에는 도솔암의 일진이 가세하여 만주로 건너왔으며 이곳 조직과 합류했던 것이다. 그들 중 송관수는 병사했으며 양필구 또한 왜헌병 총탄에 쓰러졌다 하니, 석이는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일진은 연안에 가있다는 확실찮은 소식이었고 이범준은 상해에 아직 있는 모양이었다. 일제가 망할 것을, 일각여삼추로 기다렸던 석이였다. 이제 언덕으로 올라가서 멀리 패망하는 일본을 보게 되었고 조선 독립의꿈이 확실하게 윤곽이 잡히게끔 되었는데 석이 마음속에는 일각여삼추의 기다림이 사라지고 없었다. 설렘이나 희망보다 이 비애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석이는 자기 마음을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죽었어야 했다. 눈보라치던 그 벌판에서 죽었어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 사람이 그 얼마인가. 영광, 독립 투사, 어설프고도 또 어설프다! 그게 아닌데 진정 그게 아닌데.......‘ - P92

홍이 얼굴은 왠지 슬퍼보였다.
"서로 견해의 차이는 있으나 적어도 강두메는 깨끗하다. 깨끗한 정열이지. 사심이 없다. 그런 면에서 친구지만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리고 우수한 인물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 어릴 적부터 두뇌가 비상했고 남다른 데가 있었지."
"그게 혹 그분이 말한 것처럼 형님의 감상 같은 것, 어릴 적 추억때문은 아닐까요?"
"추억?"
홍이는 가만히 영광을 쳐다본다.
"그럴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정당성이 있어."
"공산주의 말입니까?"
한동안 말이 없다가
"나같은 입장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거부감이 있어. 획일적인 그것이 맘에 안 들어. 주의와 주장이 어떻게 다르다 하더라도 결국 정치나 조직은 다수를 통제하는 것, 보다 이상적으로는 전부를 통제하는 것 아니겠어? 나는 정치나 조직 같은 게 생리적으로 싫어." - P108

"왜 그같은 인연을 맺는 거요? 밥벌이나 하면 됐지."
어리석은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뭔지 모를 분노 같은 것을 느끼며 지감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소망 때문이겠지요."
"소망?"
"예."
"무슨 소망?"
"한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물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뭐 세속적인 욕망하고는 다른 것 아닐까요? 절실한 것…… 사람들의 절실한 그 소망은 대체 무엇일까요?근원에서 오는 절실한 그것 말입니다."
"그걸 나한테 묻는 거요?"
"지감께서도 그 절실한 것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한평생을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았습니까."
"헛산 것이지 방황이라 하기도 민망하지요. 이건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니며 서서히 묻히면서 퇴물이 되어갔다.
그게 오늘날 조선의 소위 반가(班家)라 이름 붙은 자손들 말로가 아닌가요? 나야 세상사와 하직을 했고 천만다행, 조형은 변신하여 쟁이받이로 회생했으니."
가닥이 다른 말을 읊조리다가 지감은 무슨 까닭인지 씩 웃었다.
"그래, 그래서 조형은 그놈의 물과 인연을 맺으면서 소망을 이루었소?"
역시 우문이었다.
"아니지요. 애당초 이루기 위해서라기보다, 뭐랄까요? 소망을 위탁했다. 하하핫핫. 뭐 그런 것 아닐까요?" - P154

세 사람은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예불을 한 뒤 세 사람은 발길을 옮겨 관음탱화 앞으로 갔다. 한동안 말없이 바라본다.
"남현아, 우리는 나가세."
"예."
두 사람은 나가고 병수 혼자 남았다.
‘훌륭하다!‘
병수는 선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최서희의 모습이 안개같이 떠도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다만 그것은 아름답고 유현한 관음보살이었을 뿐이다. 머나먼 곳에서 비쳐오는 빛과도 같이, 구원과도 같이 아름다운 관음보살. 깊이 모를 슬픔이며 환희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덧 경이로움과 감동은 떠나갔다. 대신 길상의 외로움이 가을밤처럼 숙연하게 묻어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병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자신의 외로움과 동질적인 길상의 외로움이 겹쳐지면서 외롭지 않다는 묘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영혼과 영혼이 서로 닿아서 느껴지는 충일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 P157

‘내가 옛날에 보았던 것은 최서희라는 계집아이가 아니었을 게야. 관음보살이었는지 몰라, 관음보살.‘
병수는 마음속에서 막연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한 여인을 그리워했던 것은 아니었을 게야. 관음보살을 향해서 절실하게 구원을 바랐을 것인지도 몰라.‘
빛이라고는 한 줄기 찾아볼 수 없는 캄캄한 밤과도 같았던 그 시절, 사방은 나갈 곳 없는 절벽, 병수는 한숨을 내쉰다. 시궁창과도같은 욕망과 생각만 해도 아득해지는 악행의 화신 같았던 부모, 그핏줄, 그것에 맞먹는 추악한 자기 자신의 모습, 그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었으며 자신은 그것에 사로잡힌 포로가 아니었던가. 스스로 육신을 파괴하지 않고는, 영혼을 영원히 잠들게 하지 않고서는 그 운명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죽으려고 몇 번인가 강물에몸을 던졌던 일도 생각이 났다. 주막집 영산댁 얼굴이 떠올랐고 그의 양딸의 얼굴도 떠올랐다. 간절하게 간절하게 소망했던 것, 그것은 참된 것과 아름다움에 대한 그것이었다. 소망하는 것만으로 병수는 간신히 자신의 생명을 지탱할 수 있었다. - P164

‘그것이 없었던들 내가 어찌 살아남았으리.‘
지난날의 풍경을 화첩같이, 화첩 한장 한장을 넘기듯 병수는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저주스럽지가 않았다.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불행했다는 생각도 없었다. 삶의 값어치를 그런 대로 하고 살았었다는 슬픔만 있었다. 병수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관음탱화를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길상형, 고맙소.‘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 다가와서 병수의 손을 굳게 잡는것 같았다. 그것은 길상의 손이었고 관음탱화는 길상의 그 영혼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의 소망의 세계였다. - P164

모화는 통영으로 온 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어쩌다가 내려오는 사람이 있어서 마주치기는 했으나 골목은 호젓했고 소리가 없었다. 언덕으로 올라섰을 때 모화의 마음은 다소 진정이 되었다.
언덕에서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사방 언덕과 산에 둘러싸여 아늑해 보였다. 별천지 같았다. 항상 부둣가가 아니면 저잣거리를 오가는 모화에게, 몽치 때문에 정신이 산란한 모화에게는 마치남의 세상과도 같은 마을 풍경에 눈시울이 왈칵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짓이겨진 자신의 팔자하고는 아무 인연도 없는 것 같은 남의 세상.
모화는 숙이를 따라 사립문으로 들어갔다. 말갛게 쓸어놓은 하얀 마당에 햇빛이 쏟아지고 모화는 순간 현기증을 느낀다. 장독가에는 빨간 맨드라미가 피어 있었다. 끝물의 봉선화는 나른해 보였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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