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이는 허겁지겁 담배를 꺼내 붙여문다. 양필구(梁必求), 그는 누구인가. 석이 처남이었다. 더 분명하게는 전처 양을례의 이복 오라비, 혼인 전부터 삼일 운동을 전후하여 사귄 친구로서 석이와 필구는 동지이기도 했다. 사악한 을례 친정어미가 석이 모친에게 작용하여 혼인이 성사되었을 때 양필구는 마치 타인과 같이 그들 결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또한 누이나 계모와의 관계 역시 타인과다를 것이 없었다.
석이 마음속 깊은 곳에 그리움은 있었으나 은인으로서 연상의 기생, 정작 본인 기화는 석이 감정 같은 것은 알지 못했는데 을례는 의심하여 질투하고 보복하려 했으며, 혹 석이에게 장래가 없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핑계로 삼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석이 뒤를 쫓는 나형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등, 결국 석이는 만주로 피신해올 수밖에 없었다. 송관수 양필구 이범준은 그보다 늦게, 군 - P91

자금 강탈사건에 가담했고 군자금 수송에는 도솔암의 일진이 가세하여 만주로 건너왔으며 이곳 조직과 합류했던 것이다. 그들 중 송관수는 병사했으며 양필구 또한 왜헌병 총탄에 쓰러졌다 하니, 석이는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일진은 연안에 가있다는 확실찮은 소식이었고 이범준은 상해에 아직 있는 모양이었다. 일제가 망할 것을, 일각여삼추로 기다렸던 석이였다. 이제 언덕으로 올라가서 멀리 패망하는 일본을 보게 되었고 조선 독립의꿈이 확실하게 윤곽이 잡히게끔 되었는데 석이 마음속에는 일각여삼추의 기다림이 사라지고 없었다. 설렘이나 희망보다 이 비애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석이는 자기 마음을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죽었어야 했다. 눈보라치던 그 벌판에서 죽었어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 사람이 그 얼마인가. 영광, 독립 투사, 어설프고도 또 어설프다! 그게 아닌데 진정 그게 아닌데.......‘ - P92

홍이 얼굴은 왠지 슬퍼보였다.
"서로 견해의 차이는 있으나 적어도 강두메는 깨끗하다. 깨끗한 정열이지. 사심이 없다. 그런 면에서 친구지만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리고 우수한 인물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 어릴 적부터 두뇌가 비상했고 남다른 데가 있었지."
"그게 혹 그분이 말한 것처럼 형님의 감상 같은 것, 어릴 적 추억때문은 아닐까요?"
"추억?"
홍이는 가만히 영광을 쳐다본다.
"그럴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정당성이 있어."
"공산주의 말입니까?"
한동안 말이 없다가
"나같은 입장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거부감이 있어. 획일적인 그것이 맘에 안 들어. 주의와 주장이 어떻게 다르다 하더라도 결국 정치나 조직은 다수를 통제하는 것, 보다 이상적으로는 전부를 통제하는 것 아니겠어? 나는 정치나 조직 같은 게 생리적으로 싫어." - P108

"왜 그같은 인연을 맺는 거요? 밥벌이나 하면 됐지."
어리석은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뭔지 모를 분노 같은 것을 느끼며 지감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소망 때문이겠지요."
"소망?"
"예."
"무슨 소망?"
"한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물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뭐 세속적인 욕망하고는 다른 것 아닐까요? 절실한 것…… 사람들의 절실한 그 소망은 대체 무엇일까요?근원에서 오는 절실한 그것 말입니다."
"그걸 나한테 묻는 거요?"
"지감께서도 그 절실한 것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한평생을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았습니까."
"헛산 것이지 방황이라 하기도 민망하지요. 이건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니며 서서히 묻히면서 퇴물이 되어갔다.
그게 오늘날 조선의 소위 반가(班家)라 이름 붙은 자손들 말로가 아닌가요? 나야 세상사와 하직을 했고 천만다행, 조형은 변신하여 쟁이받이로 회생했으니."
가닥이 다른 말을 읊조리다가 지감은 무슨 까닭인지 씩 웃었다.
"그래, 그래서 조형은 그놈의 물과 인연을 맺으면서 소망을 이루었소?"
역시 우문이었다.
"아니지요. 애당초 이루기 위해서라기보다, 뭐랄까요? 소망을 위탁했다. 하하핫핫. 뭐 그런 것 아닐까요?" - P154

세 사람은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예불을 한 뒤 세 사람은 발길을 옮겨 관음탱화 앞으로 갔다. 한동안 말없이 바라본다.
"남현아, 우리는 나가세."
"예."
두 사람은 나가고 병수 혼자 남았다.
‘훌륭하다!‘
병수는 선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최서희의 모습이 안개같이 떠도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다만 그것은 아름답고 유현한 관음보살이었을 뿐이다. 머나먼 곳에서 비쳐오는 빛과도 같이, 구원과도 같이 아름다운 관음보살. 깊이 모를 슬픔이며 환희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덧 경이로움과 감동은 떠나갔다. 대신 길상의 외로움이 가을밤처럼 숙연하게 묻어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병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자신의 외로움과 동질적인 길상의 외로움이 겹쳐지면서 외롭지 않다는 묘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영혼과 영혼이 서로 닿아서 느껴지는 충일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 P157

‘내가 옛날에 보았던 것은 최서희라는 계집아이가 아니었을 게야. 관음보살이었는지 몰라, 관음보살.‘
병수는 마음속에서 막연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한 여인을 그리워했던 것은 아니었을 게야. 관음보살을 향해서 절실하게 구원을 바랐을 것인지도 몰라.‘
빛이라고는 한 줄기 찾아볼 수 없는 캄캄한 밤과도 같았던 그 시절, 사방은 나갈 곳 없는 절벽, 병수는 한숨을 내쉰다. 시궁창과도같은 욕망과 생각만 해도 아득해지는 악행의 화신 같았던 부모, 그핏줄, 그것에 맞먹는 추악한 자기 자신의 모습, 그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었으며 자신은 그것에 사로잡힌 포로가 아니었던가. 스스로 육신을 파괴하지 않고는, 영혼을 영원히 잠들게 하지 않고서는 그 운명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죽으려고 몇 번인가 강물에몸을 던졌던 일도 생각이 났다. 주막집 영산댁 얼굴이 떠올랐고 그의 양딸의 얼굴도 떠올랐다. 간절하게 간절하게 소망했던 것, 그것은 참된 것과 아름다움에 대한 그것이었다. 소망하는 것만으로 병수는 간신히 자신의 생명을 지탱할 수 있었다. - P164

‘그것이 없었던들 내가 어찌 살아남았으리.‘
지난날의 풍경을 화첩같이, 화첩 한장 한장을 넘기듯 병수는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저주스럽지가 않았다.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불행했다는 생각도 없었다. 삶의 값어치를 그런 대로 하고 살았었다는 슬픔만 있었다. 병수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관음탱화를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길상형, 고맙소.‘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 다가와서 병수의 손을 굳게 잡는것 같았다. 그것은 길상의 손이었고 관음탱화는 길상의 그 영혼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의 소망의 세계였다. - P164

모화는 통영으로 온 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어쩌다가 내려오는 사람이 있어서 마주치기는 했으나 골목은 호젓했고 소리가 없었다. 언덕으로 올라섰을 때 모화의 마음은 다소 진정이 되었다.
언덕에서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사방 언덕과 산에 둘러싸여 아늑해 보였다. 별천지 같았다. 항상 부둣가가 아니면 저잣거리를 오가는 모화에게, 몽치 때문에 정신이 산란한 모화에게는 마치남의 세상과도 같은 마을 풍경에 눈시울이 왈칵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짓이겨진 자신의 팔자하고는 아무 인연도 없는 것 같은 남의 세상.
모화는 숙이를 따라 사립문으로 들어갔다. 말갛게 쓸어놓은 하얀 마당에 햇빛이 쏟아지고 모화는 순간 현기증을 느낀다. 장독가에는 빨간 맨드라미가 피어 있었다. 끝물의 봉선화는 나른해 보였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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