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과 윤국에 대한 근심 걱정과 그리움 사이에 가끔 끼여드는 송영광을 향한 환국의 감정이다. 그것은 오랜 우정을 통하여 서로 알고 이해하는 데서 우러난 순수한 감정인 것이다. 물론 천성적으로 타고난 영광의 인간적 매력에 매료된 점도 있었지만 상처 받은 영혼의 신음, 깊은 곳에 묻어둔 통곡 같은 것, 외톨이의 애잔한 그림자를 끌고 가는 듯한 모습, 그것은 슬픈 것이었지만 환국에게는아름다운 것이기도 했다. 섬세하고 화사한 영광의 감수성을 사랑했으며 굽힐 줄 모르는 내면의 견고한 은빛 성(城)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특히 그림을 그릴 적에 환국은 영광을 많이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어떠한 장점에도 백정이라는 신분의 꼬리표는 불어다녔다. 그 꼬리표는 그의 삶을 강인하게 지배하려 했고 그것에 불복하여 현실에서 유리, 방랑의 길을 택하였던 송영광. 환국은 길을 걷다가, 한밤중에도 가끔 그의 삶을 생각할 때가 있었다. 떠난 뒤에는 더욱 선명하게 그의 모든 것이 떠오르곤 했다. ‘영광의 어디가 어때서? 양현이 불행해질 것이라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어째서 불행해지나. 왜 그런 말을 했지? 전염병 환자처럼, 양현으로부터 물러나라고, 그에게 상처를 주기론 나라고 예외는아니었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나를 용서했다.‘ 환국은 그런 말을 혼자 중얼거릴 때 깊은 회한에 빠진다. - P247
‘영원한 자유인 송영광, 세속적 욕망을 다 버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취했던 사내, 넌 백정의 그 시퍼런 칼날같이 절벽에 서 있었고방금 잡은 짐승의 피같이 신선(新鮮)했다. 상식에 찌든 내가 널 보고 무슨 말을 했지? 양현과 너를 저울대에 올려놓고 마치 인색한장사꾼처럼 저울질을 했다. 도대체 사람과 삶은 저울대에 올려놓을 수 있는 뭐 그런 거였나? 어쩌면 영광은 자신의 생애, 단 한번, 양현을 위하여 현실과 타협하려 했는지 모른다. 단 한번의 기회였는지 모른다. 그것을 박탈할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있었는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도 있었다. "지나놓고 보면 양현이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님도 아시다시피 주변 사정에 따라서 마음을 달리할 그런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양현이가 세속적 욕망이 강했다면 영광이를 단념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비밀을 묻어둔 채 우리를 기만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흑 오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순전히 양현의 감정 문제였지 두 사람이 뭐 장래를 약속한사이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나도 안다." "?" "그애는 외로웠고 짝을 찾고 싶었을 거야." 이 경우 짝은 반드시 남자를, 결혼 상대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동류(同類)를 찾는다는 그런 뜻의 표현이다. "네, 바로 그랬을 것입니다" - P248
찬하는 발길을 옮겼다. 명희는 말뚝같이 길 위에 서 있었다. 조찬하와 오가다는 환국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찬하가 급한 걸음으로 오가다를 따라잡았을 때 굳어버린 듯 오가다는 말이없었다. 뿐만 아니라 찬하를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귀었음에도, 옆에서 일의 전말은 알고 있었지만 찬하는 오가다에게 자기 마음 깊은 곳까지는 털어놓지 않았다. 그것은 굳이 비밀로 하려는 의도라기보다 찬하의 교양에 속하는 일인 듯싶었다. 보여지는 것을 감추려 하지는 않았으나 자기 감정에 대한 설명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가다는 가장 첨예하고 가장 절망적인 바닷가에서의 사건을 목격했으며 부서지고 깨어지는 찬하의 모습을 보았다. 한 사나이가 철저하게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오가다는 너무나잘 알고 있었다. 그때 찬하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데 얼마나 낭패를 했으면, 얼마나 자신이 처참했으면 인실과 오가다를 낯선항구에 내버려둔 채 말 한마디 없이 혼자 떠나지 않았던가. 그것은또한 오가다에게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꿈같이 인실과 맺어졌고아들 쇼지와 이어진 진하고도 끈끈한 인연의 줄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거대하고 은밀하며 기적과도 같은 우연, 만나는가 하면 헤어지고 아아, 인간들의 끝이 없는 드라마, 오가다는진정 그 찬란함에 눈부심을 느낀다.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간에 행복이든 불행이든 간에 삶은 찬란하고도 신비롭다. 그것은 어떠한 힘으로, 무엇에 의해 짜여졌더란 말인가.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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