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성찬

                      김태정

축하한다
생애에 축하할 일이 하도 없어서
생애에 그다지 기쁜 일이 많지 않아서
생일이나마 축하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남은 것을 축하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남아서 한살 더 먹게 된 것을 축하한다

흰 쌀밥과 미역국
이 단순한 흑과 백의 영토 안에서
일시에 모든 계급적 경계를 허무는
또한 모든 계급적 경계를 낳는
‘해피벌스데이투유‘ 그 경쾌한 전지구적 진혼가는
차라리 포스트모던한 야유에 가깝다

아무려나 생일상 앞에서만큼은
보수도 진보도 따로 없으려니
자본이든 노동이든
철조망이든 비무장지대든
칠공년대든 팔공년대든
오일팔 육이구 국가보안법 남북정상회담 월드컵.......
그리고 요강, 망건, 장죽, 장전, 구리개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등 무수한 반동들까지
그 모든 한국적 영광과 한국적 비애는
다만 한그릇 미역국에서 태어나
다시 다국적 밥상으로 마주할 뿐
뒤집어진 야유가 오늘의 축가를 은유할지언정
너와 나는
살아남은 값으로 최초의 성찬과 대면하리니
열화우라늄탄이 바그다드를 겨냥한다 해도
한반도의 밥상은 튼튼하고 안전할지니
축하한다 이 세상에 태어남을

*김수영의 시[거대한 뿌리]에서 인용.



**야!
이렇게 살다 간
생일조차도 가난하고...
막무가내로 착한 시인도 있었다
생각하믄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엄청난 축복이라는 걸
이 시를 읽을 때마다 하게된다
이런 시인을 가진 적 있어
내 삶이 이나마라도
빛이 되는 순간을 만나는 거라고...
그 빛을 나누는
나의 동행
**
너의 생일을 축하한다
아직 오지 않은 많은 날들
함께 걷자
좀 힘에 부치더라도
가끔은
지겹더라도
찬란한 햇살 아래 어느 날을
기억하면서...
축하해^^
.
.
.
라고 낮에는 써서 보냈고


당신의 이마에 손을 얹었을 때가 벌써 36년전,
오늘 아침 일처럼 손바닥에 차가움 그대로 남아있는데...
김판득여사, 엄마,
엄마 불러봅니다.

라고 적었는데 보낼 곳이 없던 어제
음력 3월 29일
**의 생일이고 엄마의 기일.
김태정시인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과 함께했다.
시인의 ‘가을 드들강‘을 엄마가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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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메모

                            장석남

이 여행은 순전히
나의 발자국을 보려는 것
걷는 길에 따라 달라지는
그 깊이
끌림의 길이
흐릿한 경계선에서 발생하는
어떤 멜로디
내 걸음이 더 낮아지기 전에
걸어서, 들려오는 소리를
올올이 들어보려는 것
모래와 진흙, 아스팔트, 자갈과 바위
낙엽의 길
거기에서의 어느 하모니
나의 걸음이 다 사그라지기 전에
또렷이 보아야만 하는 공부
저물녘의 긴 그림자 같은 경전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끝없는 소멸을
보려는 것
이번의 간단한
나의 여행은.

계간[시인시대]2016년 겨울호



문학집배원이 배달해준 시편이 걸음걸음을 붙잡네요

나의 발자국을 보려는
이번 여행은
이번 생애의 매 순간들이겠지요
결국은.
삶은 곧 여행이니까.
사브작사브작 걸어가는 누군가의 골똘한 뒷모습을 보는 것 같은 여운이 남아서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게 됩니다.

역시, 장석남시인.
고요롭고 깊어
덩달아 고요해지는 저녁...
                               2017. 2. 25.


이렇게 끄적거려놓았네요.

지치게 걸었던
시간들, 걸음들,
백만년,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버렸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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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 후에 남은 것



봄의 식물들은 기다리는 게 일이다
자기 순서를

날아가는 새의 힘 뺀 발등
그 작게 뻗은 만세,
아래로
날들이 미끄러진다

소복이 쌓이는 새봄

                  박연준 시집[베누스 푸디카]중에서









바람 살랑살랑
햇볕은 노곤노곤
흙은 바슬바슬
몸은 고실고실
아,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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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불빛 한점

                                        김태정

세상에 보태줄 것 없어
마음만 숨가쁘던 그대 언덕길
기름때 먼지 속에서도
봉숭아는 이쁘게만 피었더랬습니다
우리 너무 젊어 차라리 어리숙하던 시절
괜시레 발그레 귓불 붉히며
돌멩이나 툭툭 차보기도 하고
공장 앞 전봇대 뒤에 숨어서
땀에 전 작업복의 그대를
말없이 바라보기나 할 뿐
긴긴 여름해도 저물어
늦은 땟거리 사들고 허위허위
비탈길 올라가는 아줌마들을 지나
공사장 옆 건널목으로 이어지던 기다림 끝엔
언제나 그대가 있었습니다
먼 데 손수레 덜덜 구르는 소리
막 잔업 들어간 길갓집 미싱 소리
한나절 땀으로 얼룩진 소리들과 더불어
숨가쁜 비탈길 올라가던 그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허방을 짚는 손에
야트막한 지붕들은 덩달아 기우뚱거렸댔습니다​
​그대 이 언덕길 다할 때까지
넘어지지 말기를
휘청거리지 말기를
마음은 저물도록 발길만 흩뜨리고
그대 사라진 언덕길 꼭대기에는
그제 막 보태진 세상의 불빛 한점이
어둠속에서 참 따뜻했더랬습니다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 창비2004 )

훅~가을이 깊어버린 오늘,
2017년 9월6일
김태정시인을 읽습니다.
2011년 9월 6일 해남에서
세상을 떠난
시인의 시편들이 물푸레나무처럼
가슴을
물들이는 까닭이지요.

시인을 다시 읽습니다.
아니, 시인의 시를
다시 읽는 밤입니다.
2017년 구월의 밤입니다.
그녀,
아마도
땅끝 아름다운 절, 미황사에
동백꽃 피는 해우소 같은
집,
마당에서 환히 웃고 있겠지요.
부디
그러시기를.
부.
디.
여.
여.
하시기를.
바래보는 쓸쓸하고 고즈녘한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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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피는 해우소
                   김태정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중에서



김사인시인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의
시를 읽는 바람 차운 밤,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봄은 이미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봄,
봄이 오고 있습니다.
여기 콩콩두부家의 해우소에서 모든 근심은 다 털어버리고 ……^^
이 봄,

부디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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