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회남


음력 정월 보름날ㅡ.
새벽 일찍이 일어나 안방으로 가니까, 어머니께서 밤 한 톨을 주신다. 어려서부터 해오던 버릇대로 공손히 받아서 입에 넣고 깨물었다.
또 약주 한 잔을 데우지도 않고 주셨다. 먹으니까 찬술이 향기를 풍기며 자르르 기분좋게 뱃속을 자극한다.
아마 이날 날밤이나 잣, 호두 등속의 단단한 것을 먼저 먹게 하는 것은 치아가 튼튼하라는 뜻인 듯싶다. 치아가 오복 중에 하나로 든다고한다. 찬 약주를 그대로 마시는 것은 일 년 내내 남에게서 추잡하지 않은 좋은 말만 들으라는 축수이며 또 귀가 밝아지는 것이라고 어머님이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좋은 말만 들으라는 말처럼 좋은 말은 없을 것이다. 나는 옛 풍속의 이러한 분위기를 대단히 좋아한다.
빈속이라는 것보다도 눈을 뜨는 즉시로 한잔한 터이라 술기운이 뱃속에서 풀어지면서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거나하였다. - P73

어머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네가 집안 주인이니까, 오늘은 제일 먼저 나가서 대문을 열어라. 그리고 뒷짐을 지고서는 세 번 큰기침을 하면서, 휘이 한 바퀴 집안을 돌아라."
"네......"
딱 어린애 장난 같은 일이다. 쑥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소시민적 행복감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일이다. 나보다도 어머님께서 더욱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을 느끼시는 모양이다. 그러면 다른 것으로는 효도를 못해도 이 힘 안들이고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으로나마 노래하신 어머님을 위로해 그리고 기쁘게 해드리리라 마음먹었다. - P74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전에 집을 나갔을 때는 불행을 가져왔으나 이번에는 꼭 행복을 찾아오겠다는 희망이었다. 나는, 혹 서울엘 오거든.
나도 서울 가서 있을 테니까. 옛날 ‘정자옥‘ 바로 건너편 흰 사층 벽돌집이 있는데 그 사층 조선문학가동맹 안으로 찾아오라고 주소를 써주며, 간곡히 그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그를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ㅡ 그와 나와는 비교하여보면, 과거에 있어서 가정적으로, 내가 그보다 퍽 행복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나, 가령, 보름날 밤 나는 쑥스러운 보름날 행사를 충실하게 시행하는 한편 평화스런 내 집에 불이나 나지 않을까,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을 한 소심한 위인인 대신그는 아무 애착 없이 자기 집에 불을 놓아, 과거의 악몽을 불살라버리고 파괴하였다. 물론 꼭 그러한 방법을 취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나,
하여간 이것은, 그와 나와의 현실에 대한 태도와 인간으로서의 많은 거리를 보여준 것이며, 그가 나보다 불행한 대신, 헌것을 파괴하고 새롭게 앞에 서 있는 것을, 직접 나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것만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 다르며, 불행했으며, 적어도 나보다는 새로우며, 또 적어도 나보다는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일과 그의 말을 생각하면 모두 그가 믿어지는 까닭이다. 내가 앞으로 좀더 큰 소설가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 살려고 하는 그와 함께 모든새로운 타입의 인물을 붙잡아야만 할 것이다. - P90

별을 한다
계용묵


산도 상상봉 맨 꼭대기에까지 추어올라 발뒤축을 도두 들고 있는 목을 다 내빼어도 가로놓인 앞산의 그 높은 봉은 눈 아래 정복하는 수가없다.
하늘과 맞닿은 듯이 일망무제로 끝도 없이 빠안히 터진 바다, 산 너머 그 바다. 푸른 바다, 고향의 앞바다. 아아 그 바다 그리운 바다.
다시 한번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지끗 뒤축을 들어본다. 금시 키가 자랐을 리 없다. 역시 눈앞에 우뚝 마주서는 그놈의 산봉우리.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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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소시민
지하련

숨이 노닷게 정거장에 들어서, 대뜸 시계부터 바라다보니, 오정이 되기에도 아직 삼십 분이나 남았다. 두시 오십분에 떠나는 기차라면 앞으로 늘어지게 두 시간은 일찍이 온 셈이다.
밤을 새워 기다려야만 차를 탈 수 있는 요즘 형편으로 본다면 그닥빨리 온 폭도 아니나, 미리 차표를 부탁해놨을 뿐 아니라, 대단히 늦은줄로만 알고, 오분 십 분, 이렇게 달음질쳐 왔기 때문에, 그에겐 어처구니없이 일찍 온 편이 되고 말았다.
쏠려지는 시선을 땀띠와 함께 측면으로 느끼며, 석재는 제풀에 머쓱해서 밖으로 나왔다.
아카시아나무 밑에 있는, 낡은 벤치에 가 털버덕 자리를 잡고 앉으니까 그제야 화끈하고 더위가 치쳐오르기 시작하는데, 땀이 퍼붓는 듯, - P13

뚝뚝 떨어진다.
수건으로 훔쳤댔자 소용도 없겠고, 이보다도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더 숨이 막혀서 무턱대고 일어나 서성거려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으나. 그는 어디가 몹시 유린되어, 이도 흐지부지 결단하지 못한 채 무섭게 느껴지는 더위와 한바탕 지긋이 씨름을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목덜미가 욱신거리고 손바닥 발바닥이 모두 얼얼하고, 야단이다.
이윽고 그는 숨을 돌이키며, 한 시간도 뭐할 텐데, 어쩐다고 거진 세시간이나 헛짚어 이 지경이냐고, 생각을 하니 거반 딱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하긴 여게 이유를 들라면 근사한 이유가 하나둘이 아니다. 첫째 그가이 지방으로 ‘소개‘하여 온 것이 최근이었으므로 길이 초행일 뿐 아니라. 본시 시골길엔 곧잘 지음‘이 헷갈리는 모양인지, 실히 오십 리라는 사람도 있었고, 혹은 칠십 리는 톡톡히 된다는 사람, 심지어는 거진 백리 길은 되리라는 사람까지 있고 보니 가까우면 놀다 갈 셈 치고라도위선 일찌감치 떠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 P14

아름드리 소나무가 좌우로 갈라선 산모랭이 길을 걸으려니 생각은 다시 그때 학생사건으로 들어와 감옥에서 처음 알게 된, 그 눈이 어글어글하고 몹시 순결한 인상을 주는 김이란 소년이 눈앞에 떠오르곤 한다.
문득 길이 협곡을 끼고 뻗어올랐다. ‘영‘이라고 할 것까지는 못 되나 앞으로 퍽 가풀막진‘ 고개를 연상케 하였다. 이따금 다람쥐들이, 소곤소곤 장송을 타고 오르내리락 장난을 치기에 보니, 곳곳에 나무를찍어 송유를 받는 깡통이 달려 있다. 워낙 나무들의 장대한 체구요싱싱한 잎들이라 무슨 크게 살아 있는 것이 불의한 고문에나 걸린 것처럼 야릇하게 안타까운 감정을 가져오기도 한다.
‘저게 피라면 아프다.‘
근자에 와, 한층 더 마음이 여위어 어디라, 닿기만 하면 생채기가 나려는지, 그는 침묵한 이, 유곡을 향하여 일말의 측은한 감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넘어 노변에 자리를 잡고 그는 잠깐 쉬기로 하였다. 얼마를걸어왔는지 다리도 아프고 몹시 숨이 차고 하다.
담배를 붙여 제법 한가로운 자세로 길게 허공을 향하여 뿜어보다 말고, 그는 문득 당황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해가 서편으로 두 자는 더 기운 것 같다. 모를 일인 게, 그는 지금껏 무슨 생각을 하고 얼마를 걸어왔는지 도무지 아득하다. 고대 막 떠나온 것도 같고, 까마득히 먼 길을 숱해 한눈을 팔고, 노닥거리며 온 듯도 싶다. 이리되면 장인이 역전운송부에 부탁하여 차표를 미리 사놓게 한 것쯤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길이 얼마나 남았든지 간, 위선 뛰는 게 상책이었다. - P19

그는 가슴이 철썩하며 눈앞이 아찔하였다. 일본의 패망, 이것은 간절한 기다림이었기에 노상 목전에 선연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도 빨리 올 수가 있었던가?‘ 순간 생각이라기보다는 그림자와 같은 수천 수백 매듭의 상념이 미칠 듯 급한 속도로 팽개비를 돌리다가 이어 파문처럼 퍼져 침몰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것은극히 순간이었을 뿐, 다음엔 신기할 정도로 평정한 마음이었다. 막연하게 이럴 리가 없다고, 의아해하면 할수록 더욱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나 이상 더, 이것을 캐어물을 여유가 그에게 없었던 것을 보면 그는 역시 어떤 싸늘한, 거반 질곡에 가까운, 맹랑한 흥분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우리 조선도 독립이 된대요. 이제 막 아베 소또꾸총독가 말했대요."
소년은 부자연할 정도로 눈가에 웃음까지 띠며 이번엔 말하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벌써 별다른 새로운 감동이 오지는 않는다.
‘역시 조선 아이였구나.‘
하는, 사뭇 객쩍은 것을 느끼며 잠깐 그대로 멍청히 앉아 있노라니. 이번엔 괴이하게도 방금 목도한 소년의 슬픈 심정에 자꾸 궁금증이 가는것이다. 그러나 막연하나마 이제 소년의 말에, 무슨 형태로든 먼저 대답이 없이, 이것을 물어볼 염치는 잠깐 없었던지 그대로 여전 덤덤히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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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연못


얼음 위에 누가 저렇게 돌을 던졌을까
구멍 난 가슴을 덮으려
연못은 더 많은 바람과 그늘을 불러 모았겠다
나이테처럼 얼음을 덧입고
얼음의 근육들이 자란다
더러 뚫고 지나가지 못한 돌들이
얼음에 박혀 있다
거미줄 같은 균열들이 돌을 붙들고 있다
뿌리처럼 퍼져 나가 스크럼을 짜고
상처가 상처끼리 연대한다
한 번 부러졌던 뼈처럼
돌은 얼음의 뼈가 되어 연못은 더 단단해질 것이다
돌 몇 개로 무너진다면 얼음은 얼음도 아니다
돌 몇 개로 메워질 연못이라면 연못도 아니다
큰 돌이 넉넉하게 박힌 얼음이라면
맘 놓고 들어가도 좋겠다
돌 몇 개는 제 가슴에 안고 있는 사람도 그럴 것이다 - P11

성(聖) 물고기


기어이 가야 할 그 어딘가가 있어
여울목을 차고 오르는 눈부신 행렬 좀 보아
잠시만 멈추어도 물살에 밀려 흘러가버릴 것이므로
아픈 지느러미를 파닥여야 하네
푸른 버드나무 그늘에서조차 눈 감지 못하네
오롯이 지켜야 할 무엇이 있어
눈 뜨고 꾸는 꿈은 얼마나 환할 것인가
그 아득한 향수가 아니고서는 비늘이 온통 은빛일 리가없지
뉘우침이 많은 동물이어서
평생을 물에 제 몸을 씻으며
물고기는 한사코 길을 간다네
온몸으로 물을 뚫고 길을 내지만
이내 제 꼬리지느러미로 손사래를 쳐 지워버리네
지나온 길은 길이 아니라네
제 몸 길이만큼만이 길이어서
발자국도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네 - P12

화살촉 같은 몸짓으로 말하네
살아 있는 물고기만이 비린내가 없다고
그러나 그것만이 살아야 할 이유는 아니라는 듯
묻고 있네
네 가슴에도 천국의 지도 하나쯤 품고 있느냐고
낚시 바늘에 얹힌 한끼 식사에 눈길 주지 않은
몇 마리 물고기
거친 물살에 제 살을 깎으며
강을 거슬러 오르네 - P13

덮어준다는 것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빈 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이었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은 아닐까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 P14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 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나절을 몇 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 P15

꽃잎


국물이 뜨거워지자
입을 쩍 벌린 바지락 속살에
새끼손톱만 한 어린 게가 묻혀 있다

제집으로 알고 기어든 어린 게의 행방을 고자질하지 않으려
바지락은 마지막까지 입을 꼭 다물었겠지
뜨거운 국물이 제 입을 열어젖히려 하자
속살 더 깊이 어린 게를 품었을 거야
비릿한 양수 냄새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려는
어린 게를 다독이며
꼭 다문 복화술로 자장가라도 불렀을라나
이쯤이면 좋겠어 한소끔 꿈이라도 꿀래
어린 게의 잠투정이 잦아들자
지난밤 바다의 사연을 읽어보라는 듯
바지락은 책 표지를 활짝 펼쳐 보인다
책갈피에 끼워놓은 꽃잎같이 - P16

앞발 하나 다치지 않은 어린 게의 홍조

바지락이 흘렸을 눈물 같은 것으로
한 대접 바다가 짜다 - P17

소쩍새 시 창작 강의


달빛 백지장으로 펼쳐놓고
시 창작법 가르치고 있다

말은 안 하고
춤으로 춤을 가르치는 춤 선생처럼
시는 안 가르치고
온통 울음만 울어댄다

애 주먹만 한 가슴을 공명통 삼아
잘못 산 것을,
잘못 살 것까지를 뉘우쳐 통성기도하듯

운다

그 울음의 깊이로 말하면
바닥까지 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달빛의 칠흑 우물거울이다 - P24

2음보 혹은 3음보
수사가 화려하지 않다
울음은 모름지기 이런 것이다

이윽고 몇 소절에는 핏자욱이 묻어나기도 
해서
다는 아니더라도 사랑이 더러는
죽고 싶을 만큼
죽어도 좋을 만큼 아팠음을
그렇잖으면 시도 울음도 아니라는 듯 운다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그 핏빛
울음뿐이라고
무슨 시창작 강의가 붉은 달빛으로 흥건하다 - P25

거울


고요한 수면 위로
수련 한 송이 핀다
가만 보니
수면 아래로도 한 송이 뻗어
서로가 서로에게서 피어나고 있다
혹은
꽃 피는 스스로의 노고를
네 덕으로 돌려
꽃 꺾어 바치는 듯하다
허(虛)와 실(實)이 그렇듯
서로에게 거울이었구나

소금쟁이 몇 마리
수면을 팽팽히 붙잡고 있다 - P40

따뜻한 외면


비를 그으려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가
나뭇잎 뒤에 매달려 비를 긋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
나비 쪽을 외면하는
늦은 오후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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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땟물 지문이 드문드문 찍혔다
참고 참았다가
누이가 건네주던
차게 식은 삼립호빵 - P85

멸치똥


똥이라 부르지 말자
그 넓은 바다에서
집채만 한 고래와 상어와
때깔도 좋은 열대어들 사이에서
주눅들어 이리저리 눈치보며
똥 빠지게 피해다녔으니 똥인들 남아 
있겠느냐
게다가 그물에 걸리어 세상 버릴 적에 똥마저 버렸을터이니
못처럼 짧게 야윈 몸속에
박힌 이것을 똥이라 하지 말자
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잡아먹은 적 없이 잡아먹혀서
어느 목숨에 빚진 적도 없으니
똥이라 해서 구리겠느냐
국물 우려낼 땐 이것을 발라내지도 않고
통째로 물에 넣으면서
멸치도 생선이냐고 - P90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적마다 까맣게 
타들어갔을
목숨 가진 것의 배알이다
배알도 없는 놈이라면
그 똥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들어낸 자리
길고 가느다란 한 줄기 뼈가 있겠느냐
그래도 멸치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밸도 없이 배알도 없이 속도 창시도 없이
똥만 그득한 세상을 향하여
등뼈 곧추세우며
누누천년 지켜온 배알이다 - P91

헌신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을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주리니
그대 다시 나를 돌아보거나 말거나
먼 길 함께했다는 흔적이라면
이 발 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
헌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 P92

마침표에 대하여


문장을 완성하고 마침표를 찍는다
끝이라는 거다
마침표는 씨알을 닮았다
하필이면 네모도 세모도 아니고 둥그런 씨알모양이란말이냐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 뜻이다
누구의 마침표냐
반쯤은 땅에 묻히고 반쯤은 하늘 향해 솟은
오늘 새로 생긴 저 무덤
무엇의 씨알이라는 듯 둥글다
또 하나의 시작이라는 거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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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에서


전쟁과 남북의 분단은 우리 문학사를 두 동강이로 잘라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인들의 인생과 문학을 ‘실종‘시켰다. 남북 양측의 독재체제에서 내쫓겼던 그들의 문학과 삶은 다행히도 남한의 민주화 과정이 진전되면서 복원될 수 있었고, 이는 북측에 대한 직간접적인 압력이되기도 하였다. 그런 예로, 분단의 극복이란 ‘좌빨 타령‘이나 ‘북에 가서 살라‘는 폭언과 편향된 생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 - P220

한의 올바른 민주주의의 실현에 의해서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이태준에 대하여 쓰면서 서두에 백석의 ‘마지막 시‘를 인용한 것은, 이 시가 어쩌면 월북한 이태준의 말년을 빛바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춰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방되던 무렵 신의주에 홀로살던 백석의 흔적이 나중에 알려진 이 시로 남아 있다. 시쓰기를 집어치우고 생계를 위해 측량기사가 되었던 백석의 이 시에는, 시를 쓰지않는 기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냉혹한 현실이 드러나 있다. 이후 월북이 아니라 재북하고 있던 초기에 그가 행사시나 선동시 몇 편을 남겼다고 하여, 백석이 시인으로 되돌아갔다고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의 마지막 간절한 시인의 노래였던 셈이다. 해방 이후 소설가 이태준의 급진적인 변화와 월북한 뒤의 처절한 몰락은 ‘인생파‘ 로서의 그의 소설보다 더욱 소설적인 것이었다. - P221

이태준에 대한 최후의 기록은 ‘남파공작원‘으로 남한에서 체포되어장기수로 살아남은 김진계의 조국이라는 구술자료에 나온다. 그는 이남에 내려와 생존할 수 있는 현장훈련을 위하여 땜장이가 되어 원산에서 평양으로 이동하던 중 마천령산맥 기슭에 있는 강원도 장동탄광지역에서 열흘간 머물렀다. 마을 사람들이 뚫어진 냄비나 솥단지 등을들고 나오면 김진계가 능숙한 솜씨로 땜질을 해주었는데, 어느 노인이구멍난 솥을 들고 나타났다. 노인은 키가 훤칠하고 나이에 비해 건장한체구였다. 젊었을 때에는 꽤 미남이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게다가남한 말씨를 써서 궁금증이 더했다. 김진계는 노인을 어디선가 본 적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땜질하면서 그는 노인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혹시 글쓰시는 분이 아니냐고 그가 묻자, 무슨 충격이나 받은 것처럼 노인은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이더니 빙긋이 웃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 P226

"이태준이라고 합니다."
김진계는 그를 사진에서 보았을 뿐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평북 안주군에서 선전실장을 할 때 도서실을 정리하면서 이태준의 소설집 『달밤』이나 단편소설 「가마귀」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문장강화라는 책이 좋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본 적도 있었다. 그때 이태준의 글을 읽은 느낌은 우리말을 자유롭게 쓰면서 아름답게 표현해 상당히 민족적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시민적이고 뭔가 약하다는 느낌도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4년 어느 날 그의 책들이 도서실에서 사라졌다. 작업을 하면서 김진계는 궁금한 것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헌데 아직도 글쓰십니까?"
"쓰고는 싶소만......"
노인의 표정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이태준의 나이 예순여섯이던1969년의 일이다. 장동탄광 노동자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두 부부가이름도 잊고 살고 있었다. 뒤에 또 어느 탈북 여성작가는 이태준이 숙청된 뒤에 그의 아들딸들이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남편들과도 헤어졌다고 증언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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