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성세에 풍월 읊는 그 따위 소리 하면 뭘 해. 그러면 한반도는 조선인이 일본에 갖다바쳤단 말인가? 왜놈 마음대로 한 짓이아니란 말인가? 집안이 불바단데 들판의 볏가리 챙기러 뛰어나가는 꼴이군."
유인성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선우일의 말이나 분노를 잘못이라 할 수는 없었다. 흑룡강을 넘고 우수리강을 넘고 어쩌고하는 말은 당소 황당했을지 모르지만, 간도가 우리 민족의 원한이 사무쳐 있는 곳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지난날, 용정촌 상의학교의 젊은 교사였던 송장환은 생도들에게 말하기를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치고 고구려를 쓰러뜨려 삼국을 통일하여 팔백 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신라는 통일의 대가로 요동 일대의 우리 영토와 영토 내의 수많은 우리 백성을 잃었다. 지금 여러분들이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청인들 속에 우리가 잃은 조상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땅 간도도 옛날에는 우리 땅이었고 가시덤불과 울창한 수림을 낫으로 헤치고 도끼로 찍어내어 용정촌을 만든 것도 우리들의 부모님이 아니었던가ㅡ - P111

사라져간 민족의 영광을 강조하고 물거품이 된 개척 정신을 애통해했던 송장환, 그의 비분은 나라를 빼앗긴 약자의 부질없는 감상이라 할 수 있겠고, 선우일 역시 약자의 허세로 볼 수 있을지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본연의 어쩔 수 없는 감정이며 자신들이 소속된 집단에 대한 도덕이기도 하다. 한말(韓末), 일본이 조선을 먹어들어올 무렵, 의병 봉기에 이어 오늘 현재까지 과히 민족의대이동이라 할 만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을 버리고 남부여대, 이주해갔고 항쟁의 터전으로 부상된 곳, 조선 민족에게는 서사시적무대이며 아득한 옛적부터 민족의 혈흔이 점철된 그곳 간도의 땅을 선우일이 말한 대로 중국에게 결정적으로 넘겨준 것은 일본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사살했던 그해, 1909년 청일간에 간도협약(間島協約)을 맺음으로써 그 땅은 청국으로 넘어갔다. 말하자면 일본은 두 걸음 전진하기 위 - P111

하여 한 걸음 후퇴한 것이다. 간도를 중국 땅으로 확정지으면서 일본이 얻어낸 것은 일본 영사관 내지 영사관 분관을 설치하는 일이었고 장차 청국의 길장철도(吉長鐵道)를 연길(延吉) 남쪽까지 연장하여 회령의 조선 철도와 연락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영사관 설치는 ‘조선 독립군을 색출 탄압하는 합법적 본거지가될 것이며 철도의 연결은 병력과 군수품의 신속한 이송을 위한 장차의 포석이었던 것이다. 요동 일대가 한민족의 고토였다는 것은역사적인 사실이지만 밀리고 밀어붙이는 끊임없는 판도의 변화 속에서도 여진족은 금(金)과 후금(靑)이라는 국가를 형성하기까지 대체로 한민족의 지배, 혹은 영향권 속에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주변 국가에 둘러싸여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던 만주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충지였으며, 어쩌면 반만년 역사에 단일 민족으로,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여 존속해왔던 조선은 만주라는 완충 지대의 덕분인지 모른다. 한민족과 중국, 몽고의 각축장이기도 했던, 그러나 대청제국이 성립되고 만주는 중국을 정복한 대제국으로 부상함으로써 완충 지대는 간도 지방으로 좁혀지고 고정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사정 또한 매우 복잡하게 되었던 것이다. - P112

간도 지방에 할거했던 오란가이족(兀良哈族)과 충돌이 있어 사십여 호의 부족을 이끌고 돈화(敦化) 방면으로 도주한 건주여직(建州女直)의 간타리족(幹朶里族)에서 청의 시조 누루하치가 나왔다 하여 그들 발생의 영지(靈地)를 보존한다는 의지와 그밖에 정복한 타부족이 월경하여 도피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것을 방지하려는 정치적 배려도 있고 해서 1628년 청의 태종(太宗)은 간도를 비워놓고 피차 사월(私越)하는 것을 엄단한다. 그것을 제시하여 조선의 인조(仁祖)와의 사이에 협약을 맺은 것인데 소위 간광(間曠) 지대로서 봉금(封禁)한 것이다. 강약이 부동하여 조선은 불평등 협약에 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조선에서도 권리는 있었다. 이쪽에서 그 땅으로 넘어가면 아니 될 일이나 그쪽 역시 농부들이 넘어와 주거를 마련할때 조선은 청에 통보하여 그들을 철수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옥한 땅, 국법이 아무리 엄하다 하여도 굶주린 쌍방의 백성들이 옥 - P112

토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청이 쇠퇴기에 들면서 간도지방을 돌볼 겨를이 없을 때 그 틈을 타서, 또 흉년을 맞이하여 많은 유민들이 그곳으로 흘러간 것이다. 그런데 1881년 청은 도문강(圖門江) 동북의 간광지를 개간할 계획을 세워 미리 조선에게 통고하고 시찰을 한 바, 많은 조선 백성이 거주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해서 청은 변발하고 그들 복색에 따를 것이며 그들 정교에 복종 아니 하는 조선 백성은 간광지에서 나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조선 백성은 그들 요구에 불응했고, 많은 유민들은 갈 곳이 없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그것은 심히 난감한 문제였다. 당시 조선의 동북경략사(東北經略使)였던 어윤중(允中)이 종성의 사람, 김우식(金寓軾)으로 하여금 백두산을 답사하게 하고 정계비(定界碑)와 토문강(土門江)의 원류를 규명하게 한 것이 이 무렵이다. 그리하여 토문과 도문은 별개의 것으로서, 정계비에 씌어진 토문강은 북류하여 송화강(松花에 이르는 것이므로 철수해야 할 조선 유민은 토문강 밖에 있는사람에 한할 것이며 도문강 밖의 유민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선은 청에다 제기했던 것이다.  - P113

말하자면 국경 분쟁이 시작된것이다. 1885년 두 나라는, 청의 가원계(賈元柱)·진영(秦瑛), 조선의 이중하(李重夏)·조창식(趙昌植)이 마주앉아 담판을 벌이게 되었다. 그들은 정계비에 씌어진 강 이름의 차이 따위는 별로 개의치 아니하다가 실지를 답사하고 산천의 형세를 살핀 뒤 당황하기 시작했다. 결국 결판을 내리지 못하고 그들은 물러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차 삼차로, 담판은 속개되어 청은 협박으로 밀고 나왔으나 이중하는 내 목을 쳤으면 쳤지 국경을 좁힐 수는 없다 하여 강경히 맞섰던 것이다. 간도 내에 거주하는 유민 중 조선인이 십만이요 청인이 삼만, 십대 삼이었지만 그간 대국의 세를 믿고 청인의 핍박을 조선 백성은 겪어야 했고 그 고초는 오죽했겠는가. 끊임없이 변발과 복색의 변경을 강요당하며 그러지 아니할 때 땅을 몰수당하는 등, 군과 경찰이 그들 수중에 있는 만큼 소수 청인들의 횡포는 격심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빗발 같은 간도 유민들의 보호 - P113

요청을 받은 조선 정부는 이범윤(李範允)을 시찰원으로 파견하였고이범윤은 동포들의 참상을 보고 정부의 허가를 무시한 채 사포대(E)를 조직하여 청에 대항했다. 이범윤은 노일전쟁 때 러시아에 가담했는데 그것은 북청사변(北淸事變) 때, 러시아가 진주했을때 청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곳 백성들 경향에 따라 한 짓이며 그 역시 러시아의 힘을 빌어 청을 밀어내려는 일말의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시아가 패전하게 되자 이범윤은 노령으로 잠적했던 것이다.
간도의 사정은 대강 이상으로 설명이 되었는데 그러면 만보산사건은 어떤 것이었는가. 동북 지방, 길림성의 장춘(長春)에서 서북방 삼십 킬로 지점에 있는 만보산 부근에서 중국 농민과 조선 농민의 충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일 관헌(中日官憲)의 무력 충돌이라 해야 옳고, 더 정확하게는 무력 충돌이기보다 쌍방간의 시위로 보아야 옳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측 농민 한 사람이 약간의부상을 입었을 뿐 쌍방간에 사상자는 없었다.  - P114

그런데 어찌하여 이사건은 그렇게 엄청난 것으로 발전했고 국내 중국인 학살로 격화되었는가, 그러면 간도협약 이후의 간도 사정은 어떠한가. 한마디로말하여 간도의 백만을 헤아린다는 조선인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쿠션 같은 존재였다. 중국은 조선인을 때림으로써 일본을 때리는 효과를 얻으려 했고 일본은 조선인을 방패 삼아 밀고 나간다 할 수있었으니까. 조선인의 대부분이 소작농과 고용의 입장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데 오 할의 소작료, 전수입의 일할 오부가 공과금,
팔부의 비싼 이자, 게다가 일본 경찰의 지배 하에 있는 우리 백성들, 착취는 중국이, 탄압은 일본이,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간도 주민 자체가 완강한 저항 세력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경찰권은 강화되고 일본 경찰권의 강화에 불안을 느끼는 중국은 조선독립운동을 저지하려 들었고 일본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는 만큼조선인을 앞세워 토지 매수를 공작하고 중국은 또 불안하여 토지매매는커녕 토지상조권(土地商租權)에 대해서조차 창구를 닫아버리는 현상, 일본은 조선인의 국적 이탈을 절대로 승인 아니 하는가 - P114

하면 중국은 귀화해야 땅을 준다. 해서 이중 국적자는 늘어났고 따라서 조선인은 이중의 탄압에 신음해야 했다. 그리고 배일 민족운동은 조선인 배척운동으로 나타났는데 물론 일본의 앞잡이가 조선인에게 없지 않았으나 동북 정권의 일본을 업으려던 지난날의 행적이 있고 팽배해오는 배일 민족운동은 그들에게 일말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그 칼끝을 조선인 배척운동으로 돌려왔다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단순한 민족 배외운동으로 흐르기 쉬운 존재였기에 결과적으로 관민 모두가 합세하여 쫓기는, 상처입은 짐승 한 마리를 일본과 함께 몰아붙였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은 중국인이 조선인을 몰아붙이면 그럴수록 좋다. 독립운동의 지반이 없어지는 것이 우선 좋고 중국이 가혹해지면 그럴수록 조선인이 일본에 기대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 P115

중국은 분쟁의 씨로 보기 때문에 조선인을 내몰려 하고 이런 사정에서 중국인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 지배인이 만보산 부근의 토지 삼백 헥타르를 지주 열두 명으로부터 십년 계약으로 빌려 그것을 아홉 사람의 조선인에게 빌려주었고 이들 빌린 사람은 이백여 명의조선인을 동원하고 개간에 착수했는데 개간 비용의 삼천원은 일본 영사관 감독하에 있는 조선인민회 금융부(朝鮮人民會金融部)에서 조달하였고 수전(田)의 설계, 씨앗 구십 석은 남만주 철도주식회사(南滿鐵道株式會社)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니까 애당초 문제가 있었던 공작으로 보아야 옳고 지주와 중간에 땅을 빌린 자와또다시 조선인이 빌리는 이 과정에서 계약상의 하자도 있었으며,
그러나 무엇보다 수로 개설로 인근의 다른 농토에 침수 위험이 있다는 것이 분쟁 발단의 가장 큰 이유였다. 중국 농민들은 일을 막으려 했고 조선 농민은 강행하려 했고 중국 공안국에서 사람이 나오게 되고 일본 영사관에서 압력을 넣고 아홉 명의 조선인 개간 당사자가 체포되는가 하면 다시 영사관 경찰에서 출동하고, 일은 확대일로로 치달아 무장한 쌍방 경찰, 보안대가 대치하고 이쪽저쪽농민들이 대치하고, 위기촉발의 상태로까지 갔던 것이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러나 쌍방간에 중국인 농부가 약간의 부상을 했을 - P115

뿐 사상자는 없었고, 결국 일본의 압도적 무력 하에 공사는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 경우 여러 가지 면에서 억울했던 것은 중국 농민측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7월 2일 『조선일보』 호외로 만보산사건은 조선 국내로 비화되었다. 일본 기관에서 흘린 허위 자료를 받은장춘 주재의 기자가 본사에 타전했던 것이다. 남의 땅에서 가난한내 동포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강조한 그 보도는 순식간에 민족 감정을 자극했던 것이다. 7월 3일에 벌써 인천에서는 중국인 습격이 시작되었고 서울, 가장 격렬했던 곳은 평양이었다. 연이어 부산• 신의주 · 원산, 학살된 중국인 백이십칠 명, 부상자 삼백구십삼 명, 물적 손해는 이백오십만 원에 이른다 했다. 이러는 동안 일본 경찰은 방관했고 또는 극히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물론 만보산사건이 파급되어 국내에서 일어났던 폭풍은 일본이 면밀하게 짜낸 각본 때문이었다. 칠월을 넘기고 팔월을넘기고 구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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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을 타고 나는 사람이 있다면, 朴景利 선생님의 업은 土地다. 선생님이 업에 가위눌려 신음하고,
좌절하고, 거부하고, 끌어안는 20년 세월을멀리서 가까이서 느끼면서 나는 그 업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土地가 잘 안 써지는 괴로운 긴날 선생님은 손이부르트도록 텃밭을 매며 뜨거운 흙과 땀에 치유되어 그 업에 새롭게 도전하곤 했다. 선생님은 처절하게 업과 싸워서 마침내 이긴 『土地의 한 영원한 주인공이다.

張明秀 한국일보 편집위원 - P-1

사건이 난 뒤 열흘이 지났으나 경찰은 범인의 흔적조차 찾아내질 못하였다. 온통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하마 어디서 쾅! 하고 터질지 모르는 소리를 초조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이도시의 사람들, 그러나 열흘을 넘기면서 긴장은 풀리기 시작했고사람들은 즐거움에 가슴이 뿌듯해져갔다. 어디서나 그 사건은 화제가 되었다. 모르는 사람끼리 눈과 눈이 마주치면 눈으로 이야기하였고 귓속말로 몸짓으로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들리지 않는 함성은 차츰차츰 도시를 휩쓸어가고 있었다. 추상적이던 가정부(政府), 상해에 있다는 우리 임시정부, 사람들은 그존재를 실감하면서 무기력해진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희망의 빛을보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조국. 그 조국이 내게로 올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남녀노소 빈부와 계급의 차이 없이 누구나 가슴 떨리는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적보다 더 가증스러운 배신자, 반역자, 한겨레의 뿌리에서 나온 친일파 앞잡이들에 대한 응징도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만일에 어느 누가 거리에 군자금모금함을 내놓았다면 이 순간만은 사람들 마음이 가락지 비녀 다뽑아넣었을 것이며, 지게꾼 노점상 죽 팔던 노파까지 하루벌이를 - P11

다 털어넣었을 것이다. 윤국이도 걸핏하면 남강 모래밭으로 달려나가 데굴데굴 굴렀다. 몸이 가려운 강아지처럼 굴렀다. 구르면서
‘아버지다! 아버지가 다 꾸미신 일이다!‘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나 모든 것 다 알 것 같았다. 알 것같아서 피가 끓었다. 그 자신도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으며 진주의 집을 수색한 것은 물론 평사리까지 형사대가 파견되어 집안을 뒤졌고 마을 사람들까지 불러들여 조사를 했다. 형사가 넌지시 관련되지 않았는가 말했을 때 길상은 물끄러미 형사를 바라보며
"그만한 돈 만들려면 우리도 어려운 처지는 아닌데 뭐가 답답하여 남의 집에 가서 강도질을 했겠소."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어쨌다는 거요. 나는 석 달 가까이 이곳에 와서정양하고 있었는데 내 혼백이 가서 그 짓을 했단 말씀이오?"
"댁은 피해가 없질 않소. 그들보다 댁의 재력이 월등한데 이상하지 않느냐 그 말이오." - P12

"글쎄올시다. 왜 우리집은 털지 않았는가, 이상하긴 이상하군요. 감옥살일 했다고 봐준 겐가?"
"이보시요! 혁명지사 왜 이러시오!"
"왜 이러시오? 그건 내가 할 말이오. 정말 왜 이러시오? 현금은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가졌을 터이고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온들 뭐가 나오겠소"
"......"
"누가 압니까? 요 다음엔 우리집에 화살이 꽂힐지. 하룻밤에 두집 털기도 벅찬 일, 세 집이나 털 수는 없었을게요."
"당신은 재미있어 하는군. 뭐가 그리 신이 나오!"
"그러면 악을 쓰리까? 그것 다 해본 것이오. 무고하다고 악을 써본들 생떼 쓰고 나오면 별수없더군. 사람의 기만 넘고 명대로 살지도 못하겠더군."
그러고도 듣기 거북한 얘기가 한동안 서로간에 오고갔으나 형사는 꼬리를 잡지 못한 채 떠났다. 혐의가 있고 없고 간에 범인을 잡 - P12

지 못하여 노심초사,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경찰이 길상의 전력(前歷)을 감안하면 그를 진주까지 구인(拘引)하여 조사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분히 친일적으로 보여지는 서희의 존재, 평소 음으로 양으로 돈을 뿌려놨던 것이 이럴 경우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애꿎은 두 서기, 그러니까 이도영 집의 서기와 김두만 집의 서기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거의 병신이 되다시피 고문을 당하였고 다급한 나머지 덮어놓고 이름들을 입에 올려 무관한 사람들이곤욕을 치러야 했었다. 아무튼 두 명의 서기는 파멸이었다. 전쟁에 부상한 병사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그것은 비참한 희생이었다. 그동안 김두만은 만나는 사람마다 내 돈 강탈해간 놈들 잽히기만 해봐라! 칼로 배애지를 푹 찔러 직이지 그냥 두나 하고 욕을 했다. 어느놈이든 턱아리를 놀렸기 때문에 돈 있는 줄 알고 들어오지 않았겠는가. 입에 거품을 물고 허공에 삿대질을 하며 떠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맞장구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운수 불길하여 손해가 크다는 정도의 위로를 하던 사람들도 차츰 그를 피하게 되었고, 흥분하는 김두만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 한마디 없이 발길을 돌리곤 했다. 별수없이 그도 욕을 안 하게 되었지만 경찰이 내통했다는 의심을 그에게 전혀 갖지 않는 것을 알고는 빼앗긴 돈이 아까워혼자 꿍꿍 않았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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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에서 기차를 갈아탄 조찬하와 오가다는 새벽이 뿌옇게 걷힐 무렵 진주에 도착하였다. 두 사람이 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오종종하질 않고 훤히 트인 것 같군요. 바다도 없는데 말입니다."
오가다가 낯선 고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이 있어서 그렇겠지요."
"강을 끼고 들어오는 이 도시 어귀는 아름답더군요"
"여러 가지로, 유서 깊은 고장이지요."
"이곳이 형평사 운동의 진원지라면서요?"
"그렇다더군요 옛날에는 민란의 진원지이기도 했고."
"기생 논개 얘기도 있고."
"나보다 더 잘 아는데?"
"인실씨한테 들었지요."
"흔히 색향(色鄕)이라고들 하는 모양인데 옛날 감영의 관기(官妓)들 전통이 이어져서 그럴 테고 농산물의 집산지인 만큼, 돈푼깨나 있는 지주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그러나 임진왜란 때도 그랬었지만 저항이 드센 곳이라 하더구먼."
두 사람은 역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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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은 백정의 사우고 지는 살인자의 아들 아닙니까."
"참 그렇고나, 그렇지."
하다가 관수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한복이도 함께 소리를 내어 웃었다. 두 사내는 자신들이 왜 웃는지, 웃어야 하는지 분별도 없이,
우는 대신 웃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형님, 지는 말입니다. 지는요, 지는 말입니다. 후회 안 할 깁니다. 겁이사 나겄지마는요, 발 빼지는 않을 겁니다. 영호하고 약조를 했인께요 살인 죄인으로 세상 끝내기 보담이야 애국자로 세상 끝내는 편이 안 낫겄십니까."
애국자라 했을 때 한복의 얼굴에는 수줍음이 지나갔다. 그리고술 안 마시고는 못할 말들이었다.
"그라고 그래야만 나는 빚을 갚는 기이 안 되겄십니까? 빚 안지고 살겄다 그기이지 평생의 소원인께요. 관수형님이 처음 지보고만주 가라 했을 직에는 원망스럽기도 했제요. 하지마는 만주 가서길상형님을 만나보고 그곳 사정을 보이, 야, 길상형님이 나를 깨우쳐준 기라요. 나는 과거의 굴레를 벗어라 벗어라 그것은 니 잘못이아니다...... 남이사 머라 카든지 서러버도 억울해도 이자 나는 기대고 떠받칠 기둥 하나를 잡은 기라요. 사람답게 살자...... 나는 발못 뺍니다. 나도 이 강산에 태어나서 소리칠 곤리가 있인께요. 형님이 훌륭하고 그 발밑에도 못 가는 거는 지도 압니다. 하지마는 형님! 지 앞에서 울믄 안 됩니다. 형님 우는 거를 보이 조금은 같잖다는 생각이 듭니다. 와요, 지 말이 틀맀십니까?"
"야, 한복아 그기이 정말로 니 말가? 니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나 못 믿겠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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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씻겨서 흐르는 도랑물같이 상쾌해 보인다. 인실은 조용하를 쳐다보았다. 나이를 헤아릴 수 없게, 뭣인지 모르지만 종잡을 수 없는 미묘한 것, 그리고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눈빛이다. 마음에, 육신에 숨죽이고 있을 치부를 엄폐할 여유를 주지 않는 눈이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또 주량이 늘었기 때문인지 조용하의 안색은 병적으로 창백하였고 피부는 탄력을 잃었으며 최상급 박래품으로 여전하게 세련된 차림새였으나 양복에 감싸인 육체는 초라해져가고있었다. 금력과 세력과 명예? 왕가의 피가 흐른다는 한말의 명문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고 오늘날에는 비록 대일본제국의 귀족으로 탈바꿈을 했을망정 어쨌든 조용하가 가진 것, 누리고 있는 것이 한반도에서는 적어도 으뜸에 속해 있건만 요즘 들어서 찬바람 같은비애에 침식되어가고 있는 그의 울울한 영혼을 인실의 눈은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힐난도 동정도 아니다. 타인의 눈이다. 하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서로의 존재, 피차간의 처지를 알고는 있었지만 만나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타인! 사람을 대할 적에 조용하는 늘 타인임을 과시하는 것으로 강자인 자신을 확신해온 사내였다. 냉담하다는 것은 그가 쓰는 칼 중에서도 예리한것이었다. 그랬는데 조용하는 지금 타인임을 웅변하는 인실의 싸늘한 시선을 견디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감히 내가 누구인데, 분노할여유도 주지 않는다. 명회는 거의 조용하를 정시하는 일이 없었다. 여자가 남자를 정시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행실이라 하더라도 명희의 그것은 좀 철저하였다. 마음을 감추는 행위로 볼 수 있겠고상대를 거부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한때 명희는 조용하에게 결코 타인이 아니었다. - P185

"조선 사람 전부가 임금 노예로 떨어진다 할 것 같으면 상대적으로 조선 사람 전부가 결사대로 들어가자 그런 말도 나옴직한데 정복자나 피정복자 쌍방의 방향이 화살 가듯 그렇게 곧게 나 있는 것은 아니며 제아무리 욱일승천(旭日昇天)한다는 일본의 기세이기로,
또 한편 한 사람의 친일파도 없는 조선 민족이라 가정하더라도 말입니다. 역사의 역학적 방향과 인간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일까요?"
"절망적이군요. 침략하는 일본이나 짓밟히는 우리들 모두는 의지밖에서 역사에 희롱당하거나 혜택을 받는다 그런 얘긴가요? 저는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말살당하느냐 안 당하느냐그것은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 있는 거구, 친일파의 존재가 아니었던들 우리의 사정은 좀 달라져 있었을 거예요. 길은 형편 따라 우회할 수도 있고 질러갈 수도 있겠지만 생각은 화살 가듯 곧아야 한다고 믿어요."
"생각이란 늘 이상에 기울기 쉬운 겁니다. 길과 같이 생각도 우회할 때는 해야 하고 지름길도 가야 합니다. 들판에서 식량을 생산해내는 농부가 싸움터에 병사를 보내어 의미 없는 죽음을 강요하는군주보다 훌륭하다, 이론으론 그렇지요. 또 그게 진실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 가치관이 힘을 쓴 적이 있습니까? 지배자 없는 시대가 있었습니까?"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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