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독


심장 곁에 서서
물어볼 사람이 없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면서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면서

불현듯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
악의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

그건 나무 안에 있는 흔들림이야

한밤중 조명가게 옆을 지나면서
빛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말해본다
이 문장은 아주 좋은 문장이야

빛 잃은 것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

너무 작은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주머니에서 줄줄 흘러나오는데 - P96

주머니를 버릴 수가 없다
잘 버려지지 않아서
단 하나의 침묵도 가지지 못한 사람

나는
쓰지 못할 것 같다
나라고밖에 쓰지 못할 것 같다

내게 말하듯이
네게 말하는 버릇

붉게 빛나는 십자가 수천 개
밤마다 빛을 뿜고 있는데

문이 닫혀 있는 줄도 모르면서

한밤중의 일들을
단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연필을 깎는 일은
왜 뾰족해지는 일이어야 할까

잘 찢어지는 물음표의 끝을 만지며 - P97

뒤를 돌아보면 네가 앉아 있다

밝은 것은
아침에 열리고 저녁에 닫힌다

잘 버텨주었다 - P98

덧창


검정 비닐봉지 안에서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다.

나는 안에 있었고

바깥에는 공사하는 사람들
무언가 짓는 사람들은 항상 그보다 큰 소리를 낸다

빈 유리컵들이 쌓여 있다

나는 버텨냈다고 말했고
친구는 버텨왔다고 말했다

깨진 유리들이 모여 손이 된다

단단한 두 손으로
버티면서 짓고 있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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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별 나오시니


오늘은 세상이 날콩처럼 비려서
세상에 나가 말을 다 잃어버려서

돌아와 웅크려 누운 사내는
사다리처럼 훌쭉하게 야윈 사내는

빛을 얇게 덮고 일찍 잠들었네

초저녁별 나오시니
높고 맑은 다락집에서 기침하며 나오시니

물그릇 같은 밤과
절거덩절거덩하는 원광(圓光) - P24

눈보라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 P25

겨울 엽서


오늘은 자작나무 흰 껍질에 내리는 은빛 달빛
오늘은 물고기의 눈 같고 차가운 별
오늘은 산등성이를 덮은 하얀 적설(積雪)
그러나 눈빛은 사라지지 않아
너의 언덕에는 풀씨 같은 눈을 살며시 뜨는 나 - P28

눈길


혹한이 와서 오늘은 큰 산도 앓는 소리를 냅니다
털모자를 쓰고 눈 덮인 산속으로 들어갔습
니다
피난하듯 내려오는 고라니 한마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고라니의 순정한 눈빛과 내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추운 한 생명이 추운 한 생명을
서로 가만히 고요한 쪽으로 놓아주었습니다 - P29

낙화


꽃이라는 글자가 깨어져나간다
물 위로
시간 위로
바람에
흩어지면서

꽃이라는 글자가 내려앉는다
물 아래로
계절 아래로
비단잉어가 헤엄치는 큰 연못 속으로 - P32

감문요양원


꽃잎이 흩날리는 대낮에
노인이 환한 쪽을 바라본다

휠체어에 앉아
송홧가루 날리고 산비둘기 우는
앞산의
볼록한 봄까지
먼 눈길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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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 끈을 조이고 사막에 첫발을 내디뎠다. 겨우 열 걸음정도 걸었을 뿐인데 뒤에서 잡아채는 느낌이었다. 몸이 가벼운체책과 규는 아주 빠르게 모래언덕을 올라갔다. 조르흐도 나보다는 빨랐다. 사구를 살펴보니 한 삼십 분 정도면 충분히 오를수 있을 것 같았다. 한 걸음씩 천천히 올라가면 고비를 넘을 수있다는 생각에 약간의 흥분이 느껴졌다.
조금 더 올라가니 모래언덕은 직각의 벽처럼 가팔랐다. 살면서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덤벼든 일들이 참 많았다. 지금도 눈으로 슬쩍 보고 저까짓 것 정도야 하면서 교만하게 첫발을 떼지않았던가. 밀가루처럼 미세한 모래가 쌓이고 쌓여 불쑥 솟구친언덕은 그러나 쉽게 내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앞서 가는 조르흐의 발자국을 빠르게 지우며 바람은 안개처럼 모래를 피워올렸다.
눈으로 보는 것, 슬픔이나 사랑이나 죽음 따위를 관념으로 상상하는 것은 결국 허상이었다. 그것은 결코 면도칼로 살을 베어내는 듯한 상처를 남기지 못했다. 오직 몸으로 겪은 것들만 실상인 것을. 육체가 겪어낸 순간들만 기억이 되었고, 상처로 남았다. 이 고비를 넘으면 바람에 날려가는 모래먼지처럼 내 생의모든 기억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규와 함께했던 날들의 소소했 - P175

던 추억까지도 고비의 모래 속에 묻혀 다시는 기억되지 않기를간절히 소망하며 나는 네발짐승처럼 기었다.
일어서면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고, 엎드려 기어가면 입이며코로 모래가 들이쳤다. 앞서 가던 조르흐가 눈썰매를 타듯이 바닥으로 미끄러져내렸다. 잠시 후 체첵도 포기하고 슬슬 미끄럼을 타며 내려왔다. 규는 언덕을 거의 넘기 직전이었다. 모래바람이 내 몸을 덮쳤고, 나는 중심을 잃고 낙석처럼 굴렀다. - P176

 긴 세월을 만났든 겨우 몇 시간을 만났든 헤어져야 하는 순간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서로 다른 공간 속에서 헤어지는 것이 차라리 편했다. 이별을 선고하는 자는 헤어지는 것이지만, 선고를 받는 자는 버림받았다고 느끼기 마련이었다. 체첵이 몸을 돌려 울었고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나는 사랑했다. 상처를 입고도 그 영혼이 심오하며, 하찮은 사건으로도 파멸할 수 있는 사람을 운서는 그런 사람이었고, 나를뒤에 남겨두고 떠났다. 흐미를 부르는 소녀 체첵도 그런 사람으로 자랄 것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상처를 주고받을 터였다. 사랑과 몰락을 반복하며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이제 기어이 고비 속으로 들어가 고독해지고 싶었다. 남겨졌다는 것과 고독하다는 것은 달랐다. 아름답고 열렬했던 사랑일수록 그 안의 상처는 언제나 치명적이었다. 운서는 내게 안녕이라는 짧은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내 곁을 떠났다. 그렇다고 내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 P177

나는 내가 슬펐다.
슬픔에는 윤리도 논리도 들어 있지 않았다. 상처는 상투성에서 비롯되었다. 생활과 작품과 상상력의 상투성에 사로잡혀 옆구리의 절벽만 자꾸 높였다. 차라리 절벽 끝에서 아득한 낭떠러지를 향해 몸을 던져야만 했었다. 그리고 손톱을 세워 절벽을긁으며 다시 올라와야만 하는 것이었다.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무엇이 두려워 머뭇거렸던 것일까. 게다가 엄살은 또 얼마나 심했던가. 나는 내가 불편했다.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밤의 적막 속에서 테비시를 향해 걸었다. 테비시는 검은 실루엣으로 초원 위에엎드려 있었다. 나는 테비시의 암각화를 향해 백팔 배를 시작했다. 대지에 오체투지를 하며 절을 하자 오래지 않아 땀이 비오듯 쏟아졌고 뼈들이 삐거덕거렸다. 그래, 자학하지 말자. 백팔배를 마치고 나는 초원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욕망의 물컹한살들이 제거된 뼈만 남은 나를 보고 싶었다. 별이 흐르고 늑대가 우는 밤이었다. - P218

내게 있어 길이란 바로 소설쓰기이며, 떠도는 집이란 소설입니다.
낙타』를 쓰는 동안, 나의 현재를 부정하고자 무던히도 애를썼습니다. 자기의 현재를 부정하지 않으면 새로운 상상력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새로워지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도나를 부정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부정이 얼마나 치열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지상에 평등한 삶은 없습니다. 평균율의 삶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삶은 근본적으로 불평등합니다. 낙타와의 여행은 그것을 깨닫는 길이었습니다. 불평등한 삶을 더욱 불평등하게 몰아세우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영혼의 나태를 경계해야 합니다. 무한경쟁에서 승리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타자를 배려하면서 자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연재할 때와 달리 소설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장들은 온전히 제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게서 빌려온 것들입니다. 눈 밝은 독자라면 충분히 읽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빌려온 문장의 진짜 주인을 찾아보는 것은 독자 여러분의 몫입니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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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의 전제조건은 되도록 적게 소유하는 거야. 많이 가지면 떠나기가 어렵거든. 사랑도 마찬가지야. 누구나 한번쯤은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하지, 청춘의 날들을 보내면서 사랑에 목숨을 걸어보지 못하는 것도 불행한 일이야, 그치? 너도 그랬겠지만 나도 한때는 목숨을 걸고 사랑했었고, 그 여자와 결혼했었어. 그런데 이혼했지. 이혼의 책임을 묻진 마. 중요한 것은 이혼 자체니까. 어쨌든 마흔이 넘어가니까 생각이 많이 바뀌더라.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사랑도 가벼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청춘의 시절에는 결코 하지 않던 생각이지. 그런데 지금은 가볍게 사랑해야 떠나기도 쉽고 상처도 덜 받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늙었거나 가벼워졌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뭐 어쨌든 다 좋아. 늙으면 어떻고 가벼워지면 어때? 나는 지금 자유를느끼고 있는걸. 유목의 핵심은 자유인데, 진정한 자유란 고독을견디는 정신의 힘에서 비롯돼. 외롭다고 징징거리는 사람은 결코 자유인이 될 수 없지. 그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 아니야. 심심하기 싫다는 엄살쟁이인 것이지.‘ - P55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내면에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혼돈이 별로 탄생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의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문제는 규의 혼돈이 무엇인지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외면에 드러난 행위로는 실존의 위기와 혼돈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내면을 뒤흔드는 혼돈일 텐데, 무엇이냐고 묻기가 두려웠다.
황무지를 걸으면서 나는 나를 극복하기 위해 애썼다. 앞서 간사람들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으니 길도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도 이젠 지긋지긋했다. 규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아들 앞이라 꾹 눌러 참았다. 오로지 두 발로 걷는 속도만큼이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내 삶의 그림자는 길고 짙어 발길이 무거웠지만, 그림자가 짧은 규의 발길은 가벼웠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자세히 - P65

보면 조금씩은 다른 풍경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삶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삶은 크게 다르지 않은 날들의풍경과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나는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절룩거렸다. 규는 여전히 날아갈 듯 가볍게걸었다.
"아빠, 전봇대."
규가 까마득한 지평선을 가리켰다. 규의 손끝을 따라가니 전봇대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봇대를 따라가면 마을이 나올 터였다. 마을에서 휴식을 취한 뒤 지프를 빌리면 여행이 좀쉬울 것 같았다. 전봇대를 보니 힘이 솟았다. 규와 나는 또다시침묵 속으로 빠져들었고, 걷는 행위에 하염없이 몰두했다.
걸음마다 잠시 내 곁에 머물던 이름들이 호명되었다. 숙자, 재영, 운서, 추억이 된 이름들이 떠오르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추억을 지우기 위해 빠르게 걸었다. 추억이란 과거의 어느순간을 왜곡하고 미화하여 편집된, 새로운 기억이었다. 나는 자주 추억에 속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나는 언어의 바깥,
마음의 바깥에서 오로지 몸을 움직여 황무지를 건널 수 있기를 소망했다. - P66

봄이 오면 꽃이 필 것이고, 꽃이 지면 열매가 익어갈 것이다.
열매가 지상에 떨어져 긴 겨울을 견디면 또 새싹이 돋고 꽃이필 것이다.
새로울 것도 없고 빛날 것도 없는 다짐을 마음에 새기고 서재에서 나왔다. 하지만 다짐은 다짐에 불과했고 눈을 뜨나 감으나흉측한 악몽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자주 죽고 싶었고, 무엇을 하든 흥이 나질 않았다. 아내와 나는 한동안 허깨비가 되었다. 그렇지만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밝게 웃었다. - P146

그때,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청명한 방울 소리를 냈다. 모두 나무를 쳐다보았다. 나무는 황금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 모두 말을 잊었다. 바람이 방울을 흔들면 그 속에서 빛이 쏟아지듯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무 뒤에서 어떤 사람이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을 등지고 나타났다. 그림자처럼 검은 실루엣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등뒤로 햇살이 아우라를 만들어 눈부셨다. 숨이 막혔다.
"모든 생명의 자궁 어머니 대지에게, 세차게
흐르는 대지의 딸에게, 내리쬐는 햇살 대지의 아들에게, 생명의 젖줄 초원의 풀에게, 바람과 눈보라와 소나기에게 복을 비나이다 비나이다. 아흔아홉 어워에 아흔아홉 번 절을 하고......"
그는 나무를 향해 방울을 흔들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어워에서 나부끼는 하닥처럼 짙은 남색의 기운이 그의 몸에서 뿜어나오자 풀과 나무, 바람과 구름, 대지와 하늘이 깨어나는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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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
경남 함양 마천에서 태어났다. 
1987년 단편 「십오방이야기」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실상사」 「모란시장 여자」 「찔레꽃」, 장편소설 「그대여 다시 만날 때까지」 「길 없는 산」 「푸른 방」 「누망」등이 있다. 
2003년 「누망」으로 단재상(문학부문)을,
2008년 「찔레꽃」으로 요산문학상과 아름다운작가상을 수상했다.

고비사막의 바람 속에서 풍화되고 있는 낙타를 만났다. 늑대가 뜯어먹고 간 뒤 작은 들쥐들이 들락거리며 내장을 파먹고, 독수리가 날아와 마지막 살점까지 청소해버린 낙타의 뼈가 내 정신을 수직으로 세웠다.
제목을 ‘낙타‘로 정한 것은 짐승 중에서 낙타만이 유일하게 영혼의 속도로 걷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아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몽골초원과 고비사막을 건너는 여행이지만, 결국은 자기 내면과 만나는 여행이 될 것이다. 낙타가 찍고 간 부정과 몰락의 발자국에 니체의 문장도 가끔 섞여 있다. 바라건대, 낙타를 타고 무사히 생의 고비를 건널 수 있기를.....

연재를 시작하며‘에서

몽골에 다녀온 일주일 뒤, 옆구리에 절벽 하나가 만들어졌다.
한발만 더 나가면 늪인 줄 알면서, 살짝만 밟아도 덫인 줄 알면서, 그 끝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가야만 하는 때가 있다. 누구도 내 등을 떠밀지 않았다. 나는 갔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절벽은 까마득하게 높았다. 짧은 유서를 남겨놓고 아들 규가 자살했다. 생의 파도가 내 옆구리에 지울 수없는 흔적을 남겼다.
저 절벽을 올라갈 수 있을까? 손톱이 빠지고 발목이 부러져 피투성이의 몸으로 귀환할 수 있을까? 간절히 절벽을 넘어서고싶었다. 마음으로 절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절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은 몸이었다. 오직 내 몸으로 옆구리의 절벽을 무너뜨리고, 그 폐허 위에 규의 손을 잡고, 돌아온 탕자처럼 서 있을 수 - P14

있다면......
절벽 아래에서 헤매고 있을 때, 삼천 년 전 그 낙타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삼 년 동안 밤마다 그 소리가 들렸고, 옆구리의 절벽은 그만큼 더 높아졌다. 나는 환청처럼 들리는 낙타 울음소리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해보았다. 텔레비전을 끄고 어둠 속에 한참 앉아 있기도 했고, 벽에 귀를 붙이고 서 있기도 했다. 소리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근원을 알 수 없어 괴로웠다. - P15

몽골말로 고비는 황무지란 뜻이다. 사진이나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근사한 모래언덕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 아니었다. 황무지에 사막이 포함된 말이 ‘고비‘였다. 주먹만한 크기의 날카로운 돌덩이들이 뒹구는 여기가 이미 고비사막이었다. 나는 고비사막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았다.
고비......
생의 한 고비를 간신히 넘으면 또 만나게 되는 고비, 어쩌면 나는 그 고비를 건너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고비의 한복판에서 나는 물었다. 내가 낙타를 타고가고 있는지, 아니면 낙타가 나를 타고 가고 있는지 모를 시간이 생의 바깥에서 강물처럼 흘렀다. 고비를 넘지 못하고 상처를 받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말한다. 타인 혹은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상처를 준 것은 언제나 ‘나‘였다. 내가 준 상처 때문에 나는 언제나 아팠다. - P49

사람은 결국 자기자신을 체험할 뿐이다.
하지만 그 체험이 인간을 극적으로 변화시키지도 않는다. 몇번의 연애가 황무지였다는 걸 체험했지만, 마음을 사로잡는 여자를 만나면 까맣게 잊고 또 어리석은 보행(步行)을 시작하곤했다. 그리고 어느덧 황무지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떠도는 나를발견했다. 황무지에 갇혀 있다가 문을 열고 마음 밖으로 나오면 공(空)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규와 내 앞에 펼쳐진 황무지는 폐허의 신전이었다. 낙타는 폐허의 신전을 느리게 걸었다. 낙타의 느린 발걸음마다 유적처럼 묻혀 있던 인간의 기도가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규가 낙타위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저러다 떨어질까 싶어 잠시 쉬기로 했다. 낙타가 만들어준 그늘 아래에서 규는 커플링을 빼서 불량낙타의 발목에 끈으로 묶었다. 왜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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