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한 이십 년
-1974년 봄, 또는 1973년 겨울

이인성


그때 그가 돌아오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 여기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여전히 돌아가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절실함, 그는 지나는 길에 잠시 머문 춘천을 떠나 돌아오기 위해 서울행 직행버스에 앉아 있었다. 탑승대 옆 벽시계의 커다란 분침이 뚝 일 분을 건너뛰어 네시 사십분을 가리킬 때 버스는 움직이기시작했고, 그는 또 뜻 모를 조바심을 느꼈다. 종합 정류장을 빠져나온버스는 왼쪽으로 방향을 꺾더니 곧 나타난 다리 위로 올라섰다. 다리 아래로, 반쯤 얼어붙은 너른 물폭의 공지천이 길게 내려다보였다. 깨끗하게 기슭을 다듬은 강둑 가까이 보트 한 척이 얼음 속에 갇혀 있었고, 그안에 두터운 파카옷을 껴입은 한 쌍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헛되이 얼음을 저어 나가려는 것일까? 그 장면을 바라보며 불현듯 꿈터오는 그의상상 속에서, 남자가 말했다. 사랑해.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던 여자가피식 대꾸했다. 안 믿어. 순간, 그의 두 손이, 가슴 밑으로 한낱 바늘처럼 날카롭게 관통해들어오는 통증을 움켜잡았다. - P97

헤아릴 수도 없는 작은 소리의 응어리들이 방안에 투영된 창문 앞의 사철나무를 두드린다. 소리는 나무를 물들이고, 불빛은 물기 속에 스며 나무를 드리우고 있다. 그 불빛들은 여기저기 가지의 끝에서나 잎새의 끝에서 다시 뚝 뚝 뚝 떨어져내린다. 방안 창 밑의 깊은 어둠 속으로 불빛들이 스러질 때, 어둠의 우물안에서는 설핏 빛의 소리들이 울려나온다. 창문을 열고, 나는, 그 깊은깊이를 향하여 몸을 기울인다. - P147

나는 물론 이 소설의 이야기꾼이지만, 이 소설에선 이야기꾼으로서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본문 안에서도 여전히 이 책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이름의 존재와 동일한 이인성이고자 하는 것이다. (…) 작가와는 다른 이름으로 무수히 가능한 다른 이야기꾼들이란, 새로운 두께로 겹쳐져, 나로 하여금 바로 나와 또하나의 나사이를 오가게 하는, 그 사이 속에 개입해 들어오는 타인의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다. (...) 이름과 함께, 그는 나를 벗어나 독자적인 주체이자 대상이 될 테지. 나로부터의 분열이든 확산이든, 그때 하나의실체인 그는 이미 그인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나는 그를 고스란히나 자신으로 품고 싶다. 원심력의 욕구를 가지고 나로부터 떨어져나가려는 한 의식의 반대편으로 일종의 구심력을 작용시키며, 내가 팽팽하게 둥근 하나의 폭으로 열리도록. (이인성, 「문학에 대한 짧은 생각들) - P154

열거한 기억들이 순서대로 나온다면 독자가 읽기에 얼마나 편하겠는가마는, 마치 손가락 깍지를 마주 끼듯이, 아니 손가락이라기보다는 실뜨기를 하듯이 기억들이 얽혀 있다. 그러고는 이러한 모든 기억의 서사가 끝나고 글쓰는자인 ‘나‘가 나타나 그 드러냄을 위해서 이 대목이 있는 것처럼, 비 내리는 이른 여름 밤의 빗소리를 전한다. 그것도 현재의회상 시점을 밝히려는 목적인 것 같다.
이들 젊은 날의 자잘한 상처를 짚어나가는 잡다한 편린들은 엄살을부리거나 심각하지도 않고, 그맘 때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시시껄렁하게 드러낼지언정 과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켜보는 나는 안쓰럽고 어딘가 아프게 느낀다. 도와줄 수도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고 그냥 등뒤에서 묵묵히 지켜본다. 남들도 내게 그러했으리라. ‘한국문학은 1974년에 스물서너 살이 된 한 상처받은 젊은이의 전형적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김현은 쓰면서 그 모습이 성숙하다고 덧붙인다.
심야 공항의 환승구역을 서성대는 여행자가 떠오른다. 그는 불 꺼진쇼윈도 위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힐끗 바라보며 지나간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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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유리창문을 닫으며


한때 학교가 구질구질했었다.
학교 일이란게
온통 치사하고, 쫀쫀하고, 유치하게 여겨졌고
교문 바깥에
더 중요한 일, 더 보람 있는 일,
더 멋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학교 밖을 맴돌았다.
그랬던 내가 오늘 학교 식당에서
몇 백 명도 넘는 놈들
시간 안에 모두 밥 먹여보려고
열심히 줄 세우고 있다.
급식도우미들에게
예쁘고 눈에 띄는 패찰 어떻게 만들어줄까
고민하고 있다.
나 오늘 복도 유리창 문을 닫고 있다. - P26

선생 되고 나서 처음인가
아이들 모두 돌아간 후
어둔 복도 유리창 문을 닫아본 일
목련꽃 흐드러진 봄날이
흘러가고 있다.
내 생애가 흘러가고 있다. - P27

이성부의 ‘벼‘를 가르칠 때마다


이성부의 ‘벼‘를 가르칠 때마다
그 시절 생각나
얼굴 화끈 달아오른다
대학시절
안으로 문 걸어 잠그고
못까지 꽝꽝박고
플래카드 내걸고
단식 농성했던 본관 201강의실
그때 처음 들었던 이성부의 ‘벼‘,
난 물 한잔에
소금 몇 조각 함께 집어먹으면서
선배가 읽어준 이성부의 ‘벼‘를 처음 알았는데
이제 아이들에게 이성부의 ‘벼‘를 다시 가르치면서
그 시절 되돌아보니
참 부끄러워라
생각해보면 ‘전두환 물러가라, - P38

또는 ‘비상계엄 해제하라‘도 아니고
고작 ‘어용, 무능 교수 물러가라‘로
어쨌든 나를 가르치던 교수들 쫓아내는 일로
문 걸어 잠그고, 밥까지 굶을 일이었을까?
그리고 더욱 부끄러워라
난 그나마 며칠 버티지도 못하고
맨 먼저 창문 밖으로 업혀 나와서는
앰뷸런스에 실려가 링거까지 맞았으니
내 젊은 시절 돌이켜보면
모두 부끄러운 일 뿐
세상 고통 혼자 다 짊어진 척
언제나 오만상을 찌푸리고
머리는 어깨까지 덮는 장발에
그나마 잘 감지도 않고
못 먹고 안 먹어 피골이 상접한 채
군대도 거부당할 정도의 몸무게로 - P39

제민천, 시내 삼거리 정자, 순두부집,
중동칼국수, 보문 칼국수, 부흥루,
가는 곳마다 오바이트를 해놓고
세상 걱정 혼자 다하는 척했던
그러면서도 사랑을 찾아 헤맸던 내 젊은 날
생각해보면 혹시 나야말로 무능 학생 아니었을까?
하기야 나
이성부의 ‘벼‘를 가르치는 지금
내 젊은 날보다
단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 P40

이렇게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을 때


자전거를 타니
차타고 다녔을땐 전혀 보이지 않았던,
차타고 다녔을땐 절대 볼 수 없었던
사물들이 보인다.
부평공원으로 들어가 잠시 달리다
백화점 주차장을 거쳐
내가 다니던 부평서초등학교 앞도 지나
가끔씩 슬쩍 차도로 내려서기도 하면서
용갈비 앞을 지나
안쓰러운 재수생들 드나드는 청솔학원 앞으로 해서
학교에 간다
퇴근길에는 부평 농협에 들러 돈도 찾고,
부평역 근처에 있는 니콘카메라 서비스센터를 찾아가
디카수리도 맡긴다.
사위가 어두워진 날은 번쩍번쩍 경광등을 앞뒤로 달고
집으로 온다 - P93

이른 아침에 삽상한 바람을 맞으며,
FM 라디오로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며,
자전거로 출근하는 재미가 쏠쏠해
적당히 땀 흘리며
자전거로 퇴근하는 재미가 참 쏠쏠해
세상에 잠시 눈감고
그래, 이렇게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을 때
북이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한다. - P94

겨울, 도봉


이십일년만의 겨울추위가 찾아온 날
난 이제 그만 내려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고
내려가는 길을
배우기 위해
도봉에 올랐다
겨울, 도봉은
비늘눈이 바람에 흩날려
온통 은빛으로 아름다웠으나
내가 겨울, 도봉에 오른 건
내려가는 길을
배우기 위해서였으므로
눈꽃 피운 나무들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도봉을 내려가면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을 것인가
도봉을 내려가면 - P95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싹을 틔우기 위해
100년 동안 기다리는 씨앗도 있는데
아난 고작 몇 년도 기다리지 못하고
내려가는 길을
배우기 위해
도봉에 올랐다 - P96

광덕산의 진달래


어찌하다 온통 키 큰 나무들 사이에 태어나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금이라도 햇볕을 쬐기 위해
키는 크게
잎은 작게
색깔은 여리게
자신의 몸뚱이를 처절하게 바꾸어버린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광덕산의 진달래 - P97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외우는 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해 읽어야 할
반야심경을
내 안에 더 집어넣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다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기 위해 읽어야 할
반야심경을
새로운 괴로움을 만들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다
내려놓기 위해 읽어야 할
반야심경을
더 갖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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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변하셨어요. 표정에 마음의 일을 전혀 내비치지 않던 분이 자주 우십니다. 당신의 눈물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얼른 고개를 돌리지요. 가장 많이 고갤 돌려야 하는 상대가 나랍니다. 다른 가족들이 직장일에 아이들 돌보는 일에 바쁜 탓으로 아무래도 아버지 곁에 자주 있게되는 사람은 단출한 나이기 때문이지요. 아버지가 울 적이면 나는 그저들고 있던 물주전자를 내려놓거나, 괜히 소형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거나 그럽니다. 우는 사람 곁에 있기는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힘이들지요. 더구나 우는 사람이 아버지이다보니 여러 날에 걸쳐 여러 번아버지의 눈물을 보건마는 그때마다 매번 당혹스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내가 허둥거리면 아버지는 이제는 주무시는 척하십니다. 얕게 콧소리조차 내시지요. 방금 울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금세잠이 들겠는가만 나는 아버지가 잠드셨다는 걸 잘 안다는 듯이 조심조심하는 태가 역력하게 발소리를 죽이며 문을 가만히 여닫고서 병실 바깥으로 나오곤 합니다. - P19

남동생의 종아리를 쪼아서 피를 내곤 하던 사나운 장닭을 눈 깜박할 새에 잡아올려 목을 비틀 때 아버지 팔뚝에 불끈 치솟던 힘줄도 기억합니다. 큰오빠에게 먹일 오리의 생피를 얻기 위해 희뿌연 새벽에 오리 정수리에 칼을 내리치던 모습도요. 원체 말씀이 없으신 분이었지만, 아아, 소리를 뽑아올리실 적의 아버지의 젊은 날들을 기억하지요. 3월 삼짇날 연자 날아들고호점은 편편 나무나무 속잎 나 가지꽃 피었다 춘몽을 떨쳐 먼산은암암 근산은 중중 기암은 층층 매사니 울어 천리 시내는 청산으로 돌고 이 골 물이 주루루루루루루 저 골 물이 퀄퀄 열의 열두 골 물이 한테로 합수처 천방져 지방져 월턱져 구부져 방울이 버큼져 건넌 병풍석에다 아주 쾅쾅 마주 때려 산이 울렁거려 떠나간다 어디메로 가잔 말 아마도 네로구나 요런 경치가 또 있나-아버지의 탄력 있는 젊은 목에서뿜어올려지던 그 소리들, 부친이 당신의 영혼 속에 스며들어 있는 소리를 누르고 이 누추한 삶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건 쑥쑥 발목이 굵어지고 있는 우리 형제들 때문이었을 테지요. 그렇게 좋아하던 낡은 가죽 북을 선반에 올려놓았던 건 자식들 앞에선 오로지 현재와 미래에 충실할 수밖에 없어서였겠지요. 그럴 적마저도 탄탄했던 부친의 어깨였는데, 문득 지난 생애의 자취를 한몫에 싹, 문질러버리고 울고 계시는겁니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느냐? 하시면서요. - P20

칠 년 전이면 오빠가 지금의 제 나이였네요.
어쩌면 그때 그도 지금의 나처럼 처음으로 근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해서 그렇게 울었던 것일까요? 삶이 가져다주는 것 중엔 우리가물리쳐볼 수 없는 절대의 상실이 있다는 것을 그도 그때 처음으로 인지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버질 보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눈물이 고이는까닭도 그것일까요? 혹시 오빤 그때 중환자실의 아버질 두고서 옛날의아버지, 그의 종아리에 그토록 모진 회초리질을 하던 부친의 건강한 팔뚝을 그리워한 건 아니었을지요. 생각해보면 부친과 늘 함께 살았던 것도 아닙니다. 십수 년 전에 이 도시로 떠나온 후론 아버진 시골에 우린이 도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존재는 무슨 상징처럼요. 언제나 그곳에 계시는 분이었지 이 세상에 안 계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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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4월 광주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작고한 출판인 나병식이 지하출판으로 이만 부를 찍어 사방에 뿌리고는검거되었고, 나도 서로 말을 맞추고 시간을 벌기 위해 한 달쯤 도망다니다가 검거되었다. 그이는 경찰이 운암동 집을 수색하기 직전에 그동안 모아둔 항쟁 자료들을 마당의 창고 슬레이트 지붕 아래 숨겼는데, 방마다 뒤지고 화단까지 파헤쳤지만 다행히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의 안기부장은 장세동이었는데, 나병식과 나를 정식으로 구속하지 않고 ‘유언비어 유포죄‘ 정도의 경범죄로 다루더니, 마침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삼세계 문화제‘에 초청받은 나에게 외유하라며 일 년짜리 단수여권을 내주었다. 나는 급히 서울로 올라온 아내와 남대문시장에 가서 옷가지를 사고 밥 한끼 먹고는 공항으로 나갔다.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간나는 망명자 윤한봉과 실로 오 년 만에 상봉했다. 그와 함께 미주 한국청년연합과 재미 한국동포를 조직하기 위하여 13개 도시를 돌며 강연회를 열었고, 동포 원로들에게 그를 보증해주었다. 미국에서 문화패 ‘비나리‘를 만들고 ‘통일‘을 순회공연했으며, 도쿄에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안내로 조성우를 비롯하여 교포 이삼세 청년들과 함께 같은 작업을했다. 그후 우리문화연구소와 문화패 ‘한우리‘를 조직하여 교토와 오사카에 지부를 두었고, 내가 귀국한 것은 일년 만인 1986년 5월 말경이었다. 다시 안기부에 연행되어 행적 조사를 받았으나 구속은 면했다. - P88

처음에는 광주를 떠나려고 운암동의 집을 내놓고 둘이서 서울과 수원 등지에 집을 보러 다닌 적도 있었다. 나는 1984년에 장길산을 끝내고는 정말로 광주를 떠나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가는 당대에 대한 역사적 책무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창작하는 자로서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사회의 온갖 제약에 짓눌려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말 그대로 ‘창작의 자유‘
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광주항쟁을 소설로 쓸 생각은 없었다. 누가 파리코뮌이나 러시아혁명을 소설로 쓰는가. 그 모두가 역사기록과 르포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다만 그런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쓸 수 없는 것‘과 ‘쓸수 있는 것‘은 작가의 자유에 의하여 결정되어야만 한다. 나에게는 세상이 온통 ‘무등산은 알고 있다‘라든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부끄러움‘ 이라든가 하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동어반복이며 억압이었다. - P89

우리는 너무 현실 자체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었고 그 불에 데었다. 나는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생생한 기억들과 더불어 여전히 ‘도청‘에 머물러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에 아마도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앓던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고 아들과 딸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이 사라진 빈집을 지키면서 적막 한가운데서 문득 그이가내린 생의 결단이 아니었을까.
그이는 ‘평온‘을 말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골의 무싯날 같은 그런 나날, 그이의 집요한 요구와 준비에 따라서 우리는 법원에 갔고 나는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집을 나와 서울행 밤기차를 탔다. 얼마 뒤에 그이가 꾸려서 보낸 책이며 물건들을 트럭에 싣고 화가 홍성 - P89

담이 내 거처에 찾아왔다. 그는 우리가 그냥 예전처럼 작업실을 따로 쓰는 줄 알고 있다가, ‘아마 그 사람은 나를 다시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말을 듣고는 헤어지면서 나를 붙들고 울었다.
어쨌든 나는 1980년에서 1990년대 말까지 국내외에서 소설은 쓰지않고 광주에서 비롯된 ‘사회봉사‘에 바쳤으니 그냥 이름과 몸으로 때운셈이다. 그이와 나 사이에는 깊은 회한이 오래갔다. 나의 갑작스런 방북은 ‘무산‘을 뛰어넘으려는 것이기도 했고 그것들의 연원인 분단이라든가, 빨갱이라든가, 사상이라든가 하는 억압을 벗어버리는 어떤 ‘글쓰기의 자유‘를 확보해보려는 몸부림이었다. 뒷날 그이가 나를 내보낸 것을 후회했다고 김지하 부인은 내게 전했다. 그후 나는 다른 이와 덧없는살림을 차렸고(이 또한 길게 가지는 못했다), 막내 호섭이가 태어나자마자 방북과 망명생활이 이어졌다. - P90

베를린이나 뉴욕에서 뭔가 어려운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나는 그래도 그이에게 전화를 걸어 의논을 했다. 그이는 언제나 사려 깊은 대답을 해주었고,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 내생각을 잘 아는 동지이기도 했다. 장남 호준이가 ‘전교조 교사들에 호응하여 ‘전고협‘을 조직했다가 구속되고 고등학교를 퇴학 맞았을 때 처음으로 그이는 전화기 너머로 울음소리를 냈다. 당시에 독일 정부와 협의하여 호준이를 초청했지만 한국 정부는 출국시켜주지 않았다.
나중에 돌아와 교도소에 있을 때 그이는 나와 이혼한 처지라 직계가족인 호준이를 앞세워 오 년 동안 나의 옥바라지를 했다. 나는 석방되어나온 뒤에 아들과 만나서 ‘돌아가도 되겠는지‘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한 달이 넘게 대답이 없더니 뒤늦게 말했다. "아버지 글쓰실 때의 긴장을 이제는 어머니가 같이 견디지 못하시겠답니다. 편하게 사시도록 놔두세요." 딸은 언젠가 말했다. 지금도 엄마는 꿈에 허둥지둥한다 - P90

고, 밥상 위의 반찬들이 모두 흙이나 재로 변하거나 손님은 잔뜩 왔는데빈 그릇뿐이어서 나의 성난 얼굴을 피하다 잠이 깬다고도 했다. 이게 내가 그이에게 저질렀던 짓들이다. 그이는 언제나 오고가는 사람들에게따뜻한 밥을 해주었는데, 많을 때는 백여 명이나 되었고 보통 때도 늘서너 명의 식객이 끊이질 않았다.
어찌 그 모든 것들을 글과 말로 할 수 있으랴. 이 역시 나로서는 소설로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P91

홍희담의 「깃발」 『창작과비평』에 발표된 것은 1988년 봄이었고 이는 한 해 전에 양김의 분열에 의하여 대선에 실패하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난 직후였다. "5월은 뭔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 여전히 벌떡이고 불끈거린다. 아마도 5월 넋이 아직 잠들지 못했나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와 신경증과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속에 죽거나 사라진 사람들이 내뿜는 괴이한 힘에 고통받는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갑자기 자다 벌떡 일어나 밤을 새우며 미치도록 뭔가를 쓰게 만드는....... 그것이 「깃발」이다"라고 그이는 말하고 있다.
나는 이참에 「깃발」에서 시작하여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문밖에서」 「김치를 담그며, 그리고 중편소설 「이제금 저 달이」에 이르기까지 다시 한번 읽었다. 마치 퇴색한 옛 사진을 보는 것처럼 아련했다. 마치 일제시대나 한국전쟁 시기의 젊은이들 사진을 보는 것과 같이 시간이 멈춰버린 느낌을 주었다. 나는 홍희담의 성정과 말투와 느낌의 결을 알고 있는데다가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까지도 현실 속의 누구라는 것을 대강 짐작할 정도로 나에게는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세월을 잘 아는 나로서는 어쩌면 객관적인 견해를 말하기가 어려울 것 - P91

같다. 나는 그야말로 ‘5월문학의 깃발처럼 뚜렷한 「깃발」을 여기서 언급하려 하면서도 사실은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와 「김치를 담그며」에더욱 애착이 간다. 선연한 색으로 나부끼는 「깃발」의 너무도 뚜렷한 투쟁적 계급성보다는 다른 두 작품에 드러난 항쟁 이후의 상처들을 어루만지는 일상의 여성성이 더욱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도 「깃발」이 먼저 존재하지 않았다면 도달할 수 없는 세계라는 점에서나는 이 모든 중단편들을 ‘광주 연작‘으로 보고 연이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92

「깃발」은 방직공장 여공인 순분과 형자가 중심화자로 5.18 이후 도청에 이르기까지 열흘 동안의 일을 다큐 형식으로 보여준다. 이 여공들은 미숙, 영순, 철순 등과 함께 공장에 다니면서 야학에 함께 동참한 동료들이다. 이들은 시내 각처에서 공수부대의 시민 학살과 항쟁의 과정이며 무장시민군의 등장에서 수습위원회의 강온 대립과 도청에서의 최후의 항쟁 등을 각자의 목격과 체험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들이 지도해주기를 바라던 이들은 야학의 강학이며 운동권 청년인 윤강일 같은 지식인들이었건만, 윤강일은 시위가 정점에 이르는 과정에 동참했다가총격전이 벌어지자 ‘어차피 지는 싸움‘이라며 현장을 빠져나간다. 나중에 도청에서 항쟁하다 산화하는 여성노동자 형자의 자각의 과정은 이렇게 묘사된다.


이론적으로 그들은 혁명의 사상을 지녔고, 전사였고, 선진적이었다. 그들이 보통 말하는 무장투쟁, 시가전 등등이 형자의 일상생활을 파고든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에 대한 배신감은 윤강일의 도피로 이미 맛보았지만 역시 지금도 배신감이 치밀어올랐다. (...) - P92

꼬부라져 잠들어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누구인가. 지식도 없고, 이론도 없고, 운동 논리도 없는 저들은 왜 도청에 들어왔는가. 그녀는 동료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자부했으나, 지식인을 향한 신뢰의 부분만큼 동료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녀는 자신을 깊이 자책한다. 그녀는 지금 관통한다. 그녀는 바로 그들이었다. 거기에 잠깐 지식인이 끼어들었던 것이며 그것은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이번 항쟁으로 그녀는 다시 동료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 P93

학생들과 지방 향신층 등으로 구성된 수습대책위가 계엄사의 요청을 받아 ‘무기 반납‘을 추진하고 있었던 데 대하여 도시 하층민, 서비스업 종사자 등 이른바 ‘룸펜프로‘ 계층과 노동자들은 뚜렷한 이론도 없이 총기 반납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이는 지난 며칠 동안의 시민들의 죽음을 더욱 짓밟고 모독하는 일이라고 맞서고 있었다. 몇몇 운동권 청년들과 노동자들이 이들에 합세하여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고 도청 사수를 주장하게 된다. ‘지든 이기든 누군가는 여기 남아서 지키다가 끝을내야만 항쟁이 완성되며, 그것만이 지난 며칠 동안 시민들이 홀린 피에 보답하는 길이다‘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고, 이들은 온건파인 전자에 비교하여 강경파로 기억된다. 형자는 말한다. "도청에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을 잘 기억해둬,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가는가를…… 그것은 곧 너희들의 힘이 될거야."
도청은 죽음을 결단하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 P93

당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자유는 무한히열려 있는 가능성 앞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분명한 당위를 뜻했다. 하나의 상황 앞엔 하나의 결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순분의 회상 속에서 그날 밤 도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말없이 눈만 번쩍이던 사람, 턱에 칼자국이 있던 사람, 거친 욕을 끊임없이 해대던 사람, 몸집은 작은데 손이 유난히 컸던 사람, 밥을 먹으면서도 총만은 거머쥐고 있던 사람, 해맑은 어린 사람, 사람들"이었다. 항쟁이 휩쓸고 지나가고 나서 사망자는 제외하고 부상자와 구속자만을놓고 따져보았는데도 칠팔십 퍼센트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원, 세차공, 식당 배달원, 무직, 외판원, 타일공, 양복공, 세탁공, 청소부, 노점상, 점원, 가난한 주부, 운전수, 보일러공, 소상인, 막노동꾼, 고물상, 행상, 용접공, 자개공, 목공, 구두닦이. - P94

도피하고 다니던 윤강일이 돌아왔을 때 예전 여공 제자들은 여전히 품이 넓고 따뜻했지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여긴 사람도 없고 도시가 텅 빈 것 같다고 그가 말하자 철순이가 말한다. 사람이 없다니요? 쓸 만한 사람들은 다들 감옥에 갔거나 잠수탔거나 죽었잖아? 죽은 사람은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상원이가 죽었잖아? 순분이 말한다. 그 외에 어떤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세요? 죽음조차도 윤선생님 쪽의 사람만 부상하는군요. 그제야 이름 없이 죽은 형자의 죽음을 순분이 말해준다. 죽었다구? 언제 어디서? 마지막 날 도청에서요. 시체는 찾았니? 못 찾았어요. 여공들은 잠든 수배자를 위하여 그의 아침 준비를 해놓고 제각기 돈을 털어 봉투에 넣어두고 출근한다. 안개 낀 이른 아침, 자전거를타고 출근하는 동료 노동자들이 길을 메운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작업복 자락이 펄럭였다. 점점 멀어지면서 새벽 여명 속에 옷자락의 펄 - P94

히럭임만이 보였다. 수없는 펄럭임이었다. 그것은 깃발이었다."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란 데가 점점 크게 드러나기 시작한 현재의 형식적 민주주의체제를 ‘87체제‘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 자본주의의가장 큰 약점으로 진작부터 광주에서 드러났음에도 1987년 6월항쟁을겪으면서 ‘7월 8월 노동자 투쟁‘과 만나지 못했던 정치적·제도적 한계를 표현하는 용어다. 이 소설의 계급성 당파성이 교과서적인 면이 있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재 군부에 의한 학살과 항쟁이라는 모순이 증폭된 상황에서 사회적 조건이 명료하게 드러난 측면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소 거칠고 관념적인 곳은 있으되, 우리가 보다 진전된 민주주의적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를 이 소설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었다. - P95

그이가 소설가 남편과 함께 전라도에 내려갔을 때는 1976년 서른두살이었고 서울로 돌아온 것이 2004년 예순 살이었으니 광주에서 그이는 한평생을 보낸 셈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떠맡은 셈이었고, 내가 길을 떠나 새로운 것들과 대면하고 세계를 겪어가는 동안 그이는 ‘빈터‘에 남아서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고 남겨진 이웃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뒷마무리까지 해냈다. 이것이 내가 문학과 인생에서 놓친 부분이며 그이가 채워놓은 부분이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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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18일, 피의 일요일이었다. 순분이가 다니던 야학은 일요일엔 예배를 보았다. 예배를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노닥거리다가 버스를 탔다. 네시쯤이나 되었을까, 버스가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멈추어 섰다. 시위 군중들이 모여들어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이 내리는 바람에 순분이도 따라 내렸다. 전경들이 쏘아대는 최루탄에 이미 부근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찼다. 금남로와 소방서 쪽에서 군중들이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순분은 군중들과 섞여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쓰라린 눈을 가까스로 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날뛰고 있었다(나중에 그들이 공수특전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 P17

공수특전단들은 무조건 곤봉을 휘둘렀다. 머리고 가슴이고 닥치는 대로 내질렀다. 그들과 맞닿아 있던 군중들이 순식간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손을 뻗치는 사람에게 가차없이 대검으로 배를 쑤셨다. 누군가가순분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골목길로 내달리다가 앞사람을 좇아건물 속으로 숨어들었다. 서너 명이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다. 창밖으로군용 트럭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트럭이 멈추어 서자 이미 포승으로묶은 사람들을 차에다 던져 올렸다. 올라온 즉시 옷을 찢어대더니 등뒤를 개머리판으로 계속 난타했다. 어떤 공수특전단원은 대검으로 청년의 등을 쑤시고는 다리를 잡아 질질 끌어서 트럭 위에 던졌다. 노인 하나가 끌려가는 청년을 뒤따르며 손을 저었다. 공수특전단은 한 손에 청년의 발을 잡은 채로 대검으로 노인을 내리쳤다. 노인은 피를 뒤집어쓰며 고꾸라졌다. 거리에는 일시에 살기가 맴돌았다. 시뻘건 칼날이 햇빛에 번들거렸다. 트럭 안은 던져진 시체들로 가득 들어찼다. 트럭이 움직였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P17

동시에 총소리가 계엄군의 서치라이트를 박살내었다. 주위는 다시캄캄해졌다. 동지들과 더불어 김두칠은 방아쇠를 당겼다. 계엄군의 일제사격이 개시되었다. 그들의 자동화기가 콩 볶는 소리를 내며 일시에퍼부어왔다. 김두칠은 달려오는 수많은 군홧발을 보았다.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 하나가 날아와 김두칠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은폐물 뒤로 나동그라졌다. 동지들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군홧발은 마치대지를 뒤흔드는 것같이 은폐물 위를 넘어 그들을 밟고 지나갔다. 김두칠은 기를 쓰고 몸을 일으키려고 애써보았다. 가까스로 손 한쪽을 은폐물 위에 올려놓았다. 온 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총을 은폐물위에 올려놓았다. 아까보다 더 많은 군홧발이 몰려들고 있었다. 여러 발의 총탄이 천지를 흔들었다. 김두칠은 은폐물 위로 몸을 늘어뜨렸다. 총은 가슴께에 품고 있었다. 부릅뜬 두 눈이 먼 곳을 응시하였다. 두 눈은군홧발을 넘어, 탱크와 장갑차를 넘어, 쭉 뻗은 시가지를 넘어 먼 곳 고향산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입속에서 나오는 마지막 부르짖음이 총성과 군홧발 소리에 묻혀버렸다. - P61

당시 여덟 살 외동아들이 걸려 마지막 순간 도청에 남을 수 없었던 그. 하지만 그때 만난 노동자들의 그 선한 웃음과 따뜻한 마음, 죽음을 넘나드는 절박한 순간에 꽃피던 동지애∙∙∙∙∙∙ 홍희윤에게 그것은 평생을 안고 살아갈 자산이 됐다. 그는 그렇게 새로운 역사의식에 눈을 떴다.
이후 홍희윤은 두 차례나 수사기관에 끌려가 모진 협박을 당했다. 1980년 5월항쟁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 때 송백회의 자금책으로 몰려경찰에 시달렸다. 결국 그해 송백회는 겉으로 해체를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여성노동자들과 구속자 지원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9년엔 황석영의 평양 방문을 간첩사건으로 조작하려던 안기부에서 닦달했다.
홍희윤은 인터뷰를 지독히 싫어한다. ‘나는 한 일이 없어. 그냥 광주시민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거야.‘ 수줍게 손사래를 칠 뿐이다. 하지만 환갑이 넘어서도 여전한 소녀 같은 열정과,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이 어느 5월 그를 벌떡 일어나게 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쓴 글이 바로 1988년 ‘작가 홍희담‘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인 「깃발」이다.
"「깃발」의 주인공은 5월 도청에서 살아 숨쉬었던 모든 노동자들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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