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발굴



아직 해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만
이곳으로 올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삼초 간격으로 달라지는 하늘빛을 보세요
마치 적군의 진격을 목전에 둔 마을
여인들의 공포 같은
빛의 움직임

해가 정격 포즈로 하늘을 완전 점령하고 나면
이 발굴지를 덥석 집어 제 식민지를 건설합니다
사탕수수도 목화도 자라지 않는 이 폐허
해는 이곳에 아찔한 정적을 경작하고
햇빛은 자유 데모보다 더 강렬하게
폐허의 심장을 움켜쥐지요

사방으로 줄자를 두르고
칼로 잘라낸 듯 땅을 나누고
(기록을 위해 만들어진 이 기술은 귀여워요, 감쪽같이당신이 이 지구에 있었던 마지막 자리를 남북경위도 숫자로 딱 매겨내지요, 그리고 제가 지금 기록하고 있는 격 - P-1

자 안에 든 작은 발굴지 지도를 좀 보세요, 그 안에 점을 찍으면 그 점이 당신의 마지막 지상의 자리가 됩니다)

그대들은 누구이신지요 앉은 다리로 서쪽을 향해 머리를두고
이 무덤 안에 든 그대들은 누구인지요
햇빛이 나오자마자 날아오는 초원의 파리 떼들
아직 산 자의 뜨거운 얼굴 땀으로 엉겨드는 파리 떼들

이름 없는 집단 무덤
해골 없이 다리뼈만 남아 있거나 마디가 다 잘린 손발을가진 그대들
해와 달이 다 집어 먹어버린 곤죽의 살덩이들은
흙이 되어 가깝게 그대들의 뼈를 덮었는데
아직 흙에는 물기가 남아 있어
비닐봉지에 그대들을 담으면 송송 물이 맺힙니다

그대들은 누구인지요 심장 없는 별을 군복 깊숙이 넣고사는
그대들은 누구인지요 저 초원에 사는 베두인들이
별에 쫓겨 이 폐허로 들어와 실타래 같은 짠 치즈를 팔고
해에 쫓겨 헉헉거리다 잠시 하는 휴식 시간,
설탕에 절인 살구를 치즈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는
이 점령지 폐허에서 그대를 발굴하는
이는 또 누구인지요 - P-1

저 해는 제 식민지를 잘 관리하는 이를테면 우주의 소작인인데
그리하여 우주보다 더 혹독하게 폐허의 등허리를 누르는데
흙먼지 미립 속에 찬연히 들어와 움직이는 식민 권력 속에
목마른 이는 물을 구하러 마을로 가고
폐허에 남은 이는 그대가 든 비닐봉지에 구멍을 뚫어주며
그대의 마지막 물기를 말리고 있습니다 - P-1

그때 달은



그때 달 하나 마치 나를 그릴 것처럼 저 혼자 내 속에서 돋아나더니 내 속을 빠져나가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에 감추어져 있던 나는 그렇게 빛 아래 서게 되었는데 (어쩌다가 내 속은 달을 돋아나게 했을까, 일테면 파충의 기억을 내 속은 가지고 있었던가) 후두둑 까마귀가 날아가는 소리 컹컹 늑대 우는 소리 저 먼 산이나무들을 제 품속에서 끄집어내어 올빼미를 깃들게 하고 (그때 또 달 하나 저 혼자 내 속에서 돋아나더니 내속을 빠져나가) 먼저 걸어 나간 달이 새로 걸어오는 달을 성큼 집어 먹자 산은 깃든 올빼미를 얼른 품으로 끌어안아 들였습니다 (그때 또 달 하나 저 혼자 내 속에서돋아나서는 내 속을 끌고 허공으로 걸어갔습니다) 달을집어 먹은 달은 새로 걸어오는 달과 내 속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빛 속에 서 있던 나는 내 속을 성큼 집어 먹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바라보았습니다 내 속에서 돋아든 달과 내 속을 집어 먹은 나는 그렇게 서로 바라보았습니다 - P-1

해는 우리를 향하여



까마귀 걸어간다
노을 녘
해를 향하여

우리도 걸어간다
노을 녘
까마귀를 따라

결국 우리는 해를 향하여,
해질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해 뜰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갔던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나이 어려 죽은
손발 없는 속수무책의 신들이 지키는 담장 아래 살았던 아이들

단 한 번도 죄지을 기회를 갖지 않았던 - P-1

아이들의 염소처럼 그렇게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날아가던
해뜰 무렵

아이와 엉겨 있던 염소가
툭툭 자리를 털면서
배고파, 배고파, 할 때

눈 부비며 염소를 안던
아이가 염소에게 주던 마른풀처럼
마른풀에 맺힌 첫날 같은 햇빛처럼 - P-1

연등빛 웃음



소녀가 웅크린 그 부엌 안에
작은 불을 켜며 라디오를 켜며
많은 나날들이 연빛 웃음처럼
소녀 또한 연등빛 웃음처럼

폭약 많은 오후조차
서기들에게 기록되지 않는 (너무나 흔한데요, 뭘, 등뒤에서 저 개들이 또
서기들의 어깨를먹어치울텐데요)
현대,라는 나날 인간 이야기

그러나 어느 날
우리들이 먹은 닭다리가 저 천변에 해빛에서 아득해질지라도
소풍 가는 날
가만히 옷장을 보면 아직 개키지 않은 옷들이
들어 있어도
그냥 둡시다 - P-1

갈잎 듣는 그 천변에서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므로, 돌아올 것이므로
그날 그 소풍에 가지고 갈
닭다리를 잘 싸고 포도주 두어 병도 준비하고

그대가 내 오라비로만
이 지상에서 그대가 나의 누이로만
이 지상에서 살아갈 것을 서약은 할 수 
없을지라도
오오 소풍을 갑시다, 울지 맙시다 - P-1

그해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그해 들판에는 꽃이 유난히도 많이 피고 꽃진 자리에서는 잎도 무성하게 돋아 나오다 잎은 오랫동안 가지에 달려 있고 그 아래에서 소들은 잘 쉬다 염소에게 말을 걸고 장난을 치던 토끼는 연둣빛 풀을 배불리 먹고 작은 토끼를 낳고 들판을 아가 토끼와 걸어다니다 여자들은 아가 토끼를 사랑하여 그 옆에서 책을 읽고 수를 놓다 가지고 온 점심 도시락을 열어 까르르거리며 맑은 장아찌를 흰밥에 올려 먹다 그리고 그해 들판에는 해도 자주나와서 여자들의 등을 만져주다 여자들은 해를 껴안고 깊이 잠이 들기도 하다 바람이 지나갈 때 잠깐 깨어나서 눈을 부비다 구름은 나하고 하늘은 깊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는 이 세상 소리가 아닌 것처럼 맑다 여자들은 다시 눈을 감으며 멀리 잠이 들다 그해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그해 들판에서 많은 짐승들이 평안할 동안 멀리 잠이 든 것처럼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 P-1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얼마나 많았던가



빛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테면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일, 시간을 거슬러 가서 평행의 우주까지 가는 일

그곳에서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다른 부모를 가지고 다른 이름을 가지고
내 육체는 내가 가진 다른 이름을 이루어내고

그곳에서 흰빛의 남자들은 검은빛의 여자들에게 먹히고
(그러니까 내가 살던 다른 평행에서는 거꾸로였어요, 검은빛의 여자를 먹는
흰빛의 거룩한 남자들이 두고 온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자꾸 꾸며 우는 곳이었지요)
나는 내가 버렸던 헌 고무신 안에
지붕 없는 집을 짓고 무력한 그리움과 동거하며
또 평행의 우주를 꿈꾸는데

그러나 그때마다 저 너머 다른 평행에 살던 당신을 다 - P-1

시 만나는 건 왜일까.
그건 좌절인데 이룬 사랑만큼 좌절인데
하 하, 우주의 성긴 구멍들이
다 나를 담은 평행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면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테면 시간을 거슬러 가서 아무것도 만나지 못하던 일, 평행의 우주를 단 한 번도 확인할 수 없던 일 - P-1

여름 내내



사과나무 아래서 책을 읽었습니다, 책 제목...... 기억나지 않네요, 사과가 아주 작을 때부터 읽기를 시작했는데, 점점 책 종이가 거울처럼 투명해져서 작은 사과알들을 책을 읽으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점점 책 종이가 물렁해져서 책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던 사과알들이 책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활자도 사과알을 따라 책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책은 물렁해졌고 물처럼 흐르려고 했어요,
물처럼 흐르는 책의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요, 사과알이 든 흐르는 책을 여름 내내 읽고 있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사과알들이 다 사라지고 난 뒤, 나무가 책의 물 회오리로들어왔습니다, 집과 새와 구름이 들어왔습니다, 해가 그리고 내 위의 하늘조각도∙∙∙∙∙, 책은 무거워지고 더 거세게 흐르고, 여름 내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사과나무도 구름도 해도 하늘조각도 사라지는 자리에서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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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행렬이 이전보다 좀 더 속력을 내는 듯했다. 주제엔 여전히 해가 쏟아지는 빛나는 들판뿐이었다. 하늘의 번쩍거리는 반사광이 이제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잠시후 우리 일행은 최근에 새로깐 도로의 일부를 지나가야겠다. 아스팔트는 햇볕을 받아 터져 나갈 듯 번쩍였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푹푹 박혀 들면서 아스팔트는 번들거리는 죽처럼 뭉개졌다. 운구차 위로 보이는 마부의 모자마저도가죽이 곤죽이 되다시피 하여 마치 이 검은 진창 속에 한데 넣고 짓이겨 놓은 듯한 꼴을 하고 있었다. 나는 푸르고 하얗게 빛나는 하늘과 이 모든 색깔들의 단조로움, 그러니까 녹아 문드러지는 아스팔트의 번들거리는 검은색, 사람들이 걸친 옷의 생기 없는 검은색, 그리고 래커 칠을 한 마차의 윤나는 검은색으로 인해 약간은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 P-1

태양, 운구차에서 나는 가죽과 말똥 냄새, 래커와 향냄새, 불면의 밤이 주는 피로, 이 모든 것이 내 시선과 생각을 어지럽혔다. 나는 한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페레가 저 멀리 열기의 구름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페레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다. 도로에서 빠져나와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그가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길이 내 앞에서 꺾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그제야 나는 이 고장을 잘 알고 있는 페레가 우리를 따라잡기 위해 지름길을 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길이 선회하는 모퉁이에 이르러 마침내 우리와 합류했으나, 이내 또다시 일행과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벌판을 가로질렀다. 페레는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나는 피가 관자놀이를 때리는것 같았다. - P-1

 해결책은 없는 거였다. 그날 본 광경 중 몇몇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예를 들자면, 마을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우리를 따라잡았을 때의 페레의 얼굴, 그의 두뺨 위에는 흥분과 고통이 자아낸 굵은 눈물줄기가 흥건했다. 그러나 주름으로 인해, 눈물은 흘러내리는 대신 번지고 뭉쳐 그 엉망이 된 얼굴에 일종의 물의 유약을 씌워 놓았지. 또 있다. 교회당, 보도 위의 마을사람들, 공동묘지의 묘석들 위에 장식된 붉은 제라늄, 페레의 기절 (그때 그는팔다리가 빠진 꼭두각시 인형 같았다), 엄마의 관 위에 덮이는 핏빛 흙더미, 거기 섞여 드는 풀뿌리들의 하얀 살, 또다시 사람들, 목소리들, 마을, 카페 앞에서의 기다림, 끝도없이 부릉거리는 모터 소리, 그리고 버스가 빛의 둥지 알제에 들어서며 마침내 잠자리에 들어 열두시간동안 잘수있다고 생각했을 때, 순간 내가 느꼈던 기쁨. - P-1

그때 나는 하품을 했다. 그러자 노인은 이제 가봐야겠다고 했다. 나는 더 있어도 된다고, 또 그의 개한테 일어난 일로 나도 마음이 언짢다고 이야기했다. 살라마노는 고마워했다. 그리고 엄마가 자기 개를 무척 귀여워했다고 했다. 엄마 얘기를 할 때 그는 엄마를 <가엾은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엄마가 죽은 뒤로 내가 무척 불행할 것이 틀림없다는 짐작을 그런 식으로 내비쳤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노인은 어색한 태도로, 동네에서는내가 엄마를 양로원에 보낸 일 때문에 나를 좋지 않게 봤지만 자기는 내 사람 됨됨이와 내가 엄마를 무척 사랑했다는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아주 빠른 말투로 덧붙였다. 나는 나 자신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 점에 관해 나를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간병할 만한 돈이 없는 나로서는 얼마를 양로원에 보내는 일이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졌다고 대답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퍽 오래전부터 저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으셨습니다. 혼자서 적적해하셨어요고 덧붙여 설명했다. <그렇지요, 그리고 적어도 양로원에서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잖소> 하고 노인이 응답했다. 그러고는 이만 실례하겠다고 했다. 「가서 자야겠소. 내 생활에도 이제 변화랄 게 생겼는데, 앞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 P-1

잘 모르겠구려.」 그러면서 노인은 내가 그를 안지 처음으로 슬쩍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살갗의 까칠한 촉감을 느꼈다. 살라마노는 약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에 앞서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은 개들이 짖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난 꼭 그게 내 개인 것 같아서 말이지요.」 - P-1

붉은 반사광의 기세는 여전했다. 바다는 헐떡거리며 전력을 다해 모래 위로 작은 파도들의 받고도 숨막히는 호흡을 밀어냈다. 나는 천천히 바위 더미 쪽으로 걸었다. 태양아래서 이마가 부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열기전체가 나를 짓누르며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아섰다. 열기의 뜨겁고 거대한 입김이 얼굴 위로 느껴질 때마다나는 이를 악물고 바지 주머니 속의 주먹을 꽉 쥔 채 태양과 태양이 내게 쏟아붓는 이 뚫을 수 없는 취기를 이겨내기 위해 온몸을 긴장했다. 모래밭에서, 새하얀 조가비나 깨진 유리 조각에서, 빛의 검이 솟구쳐 오를 때마다 내턱은 부르르 경련했다. 나는 오랫동안걷고 또 걸었다.
저만치, 빛과 바다의 먼지가 만들어 내는 눈부신 훈영에 에워싸인 작고 어슴푸레한 바위 더미가 보였다. 나는 그바위 뒤에 흐르던 신선한 샘물을 떠올렸다. 졸졸 흐르는그 샘물 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태양과 힘든 노력과 여자의 울음소리를 피하고 싶었다. 한마디로 그늘과 그늘이주는 휴식을 되찾고 싶었다. 한데, 좀 더 가까이 다가갔을때 나는 그 자리에 레몽을 노렸던 아랍인이 되돌아와 있는것을 발견했다. - P-1

나는 기다렸다. 태양의 뜨거운 기운이 뺨에 와 닿았다. 나는 눈썹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던 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과 마찬가지로 나는 특히 이마가 지끈거리며 아팠고, 피부 밑에서 머리의 혈관 전체가 한꺼번에 쿵쿵거리며 때리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 뜨거움 때문에 나는 앞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나도 그것이 어리석은 행동임을, 그러니까 한 발짝자리를 옮긴다고 해서 태양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한 걸음을, 딱 한 걸음을 내딛고말았다. 그러자, 아랍인이 여전히 자리에 누운 채로 칼을 빼 들었다. 그는 태양의 한복판에서 칼을 들어 내 쪽으로향했다. 단검 위에서 빛이 분출했다. 번쩍이는 길디긴 빛의 날이 내 이마를 강타했다. 그 순간 눈썹에 모여 있던 땀이 단숨에 흘러내리며 내 두 눈꺼풀을 미지근하면서도 두터운 너울로 덮어씌웠다. 그 눈물과 소금의 장막 뒤에서내 눈은 멀어 버렸다. 이제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이마에서 울려 대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 그리고 그것에 가세한 정면의 단검이 뿜어 대는 번쩍이는 빛의 칼날뿐이었다. 그 뜨거운 검이 내 속눈썹을 파고들어 고통에 사로잡힌 눈을 후볐다. 그러자 모든 것이 흔들렸다. 바다로부터짙고 뜨거운 숨결이 실려 왔다. 내게는 마치 하늘이 통째로 열리면서 비오듯 불을 내리붓는 것 같았다. 나의 존재 - P-1

전체가 송두리째 팽팽하게 긴장했다. 나는 경련을 일으키며 권총을 쥔 손에 발작적으로 힘을 주었다. 방아쇠가 굴복하고, 나는 권총 손잡이의 매끈한 배를 건드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무미건조한 동시에 귀를 찢는듯한 그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나는 내가 방금 낮의 균형을, 스스로 행복감을 느꼈던 해변의 그 예외적인 고요를 파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꼼짝하지 않는 아랍인의 몸에 대고 또다시 네 발을 더 쏘았다. 총알들은 바깥으로 흔적을 드러내는 대신 몸뚱이 깊숙이 박혀 들었다. 그 네 발의 총성이내게는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와도 같았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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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1913-1960).
프랑스의 식민지였던알제리의 봉도비에서태어났다. 알제대학철학과를 졸업했다.
인간의 부조리와 자유에대한 고민을 담은작품들을 발표했으며,
1957년 노벨 문학상을수상했다. 대표작으로『이방인』, 『페스트』등이있다. - P-1

서문


오래전 나는 「이방인』을 이렇게 요약한 적이 있다. <우리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 울지 않는 모든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이 말이 매우 역설적이라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단지 이 책의 주인공은 술책을 부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사형에 처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회속에서 변두리의 사적이고 고독하며 관능적인 삶을 살면서 그 가장자리를 떠도는 그는 그 사회의 이질적인 존재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독자들은 그를 일종의 표류자로 간주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과연 어떤 점에서 뫼르소가 술책을 부리지 않은 것인지 자문해 본다면, 우리는 이 인물




서문은 1958년 런던의 Methuen and Co.에서 발간한 영문판 「이방인』에 실렸다. 카뮈가 이 서문을 쓴 시기는 대략 1953년에서 1955년 사이, 다시 말해 그가 반항의 인간L‘homme révolté』의 여파로 논쟁에 휘말리면서자신의 작품과 사상을 둘러싼 각종 오해와 왜곡, 비난에 대응해야 했던 무렵으로 추정된다. - P-1

느끼는 것으로서의 진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자기와 세계에 대한 승리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을 아무런 영웅적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사내의 이야기라고 읽는다면 과히 틀리지 않은 셈이다. 나는 전에 이 작중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형상화하려 했다는, 역시나 역설적인 말도 한 적이있다. 지금 나의 설명을 듣고 난 독자라면 그 말이 결코 신성 모독의 의도에서 나온게 아니라 다만 한 예술가가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에 대해 응당 가질 수 있는 약간의 아이러니 섞인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리라.

A.C. - P-1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까.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예정. 삼가 애도함. > 이걸론 알 수 없다. 아마 어제였겠지.
양로원은 알제에서 80여 킬로미터 떨어진 마랑고에 있다. 2시에 버스를 타면 오후 안에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밤샘을 하고 다음 날 저녁 무렵 집에 돌아오면 된다. 사장에게 이틀간 휴가를 달라고 했다. 이런 종류의 사유를 두고 안 된다 할 순 없었겠지만, 사장은 그리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 탓은 아닙니다>라는 말까지 했다. 사장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괜히 그 말을 했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내가 사과를 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사장이 내게 조의를표했어야 옳다. 하긴, 모레 내가 상복을 입고 있는걸 보면그도 그렇게 하겠지. 지금으로선, 어느 정도는 엄마가 죽지 않은 것과 같다. 하지만 장례가 끝나고 나면, 그땐 반대로 일은 다 처리된 셈이 될 테고, 그러면 모든 게 보다 공식적인 면모를 띨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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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했다. 안드레이 에피미치는 숨죽이고 누워 있었다. 다시 얻어맞을까 봐 공포에 떨었다. 마치 누군가 낫을 들고 와 그의 몸을 찌르고 가슴과 창자를 여러 차례 비트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워서 그는 베개를 이빨로 악물었다. 혼란스러운가운데, 불현듯 견딜 수 없이 무서운 생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와 같은 고통을, 희미한 달빛을 받아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이 사람들이 몇 년이나 매일같이 겪었을 것이틀림없다. 어떻게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런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단 말인가. 그는 고통을 몰랐고, 또 고통에 대한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니끼따처럼 완고하고 투박한 양심이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온 힘을 다하여 소리를 지르며, 니끼따와 호보또프와 사무장과 보조의사를 죽이고 자살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슴속에선 작은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다리도 꿈쩍할 수 없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셔츠와 환자복을 잡아 찢다가, 의식을 잃고 침대에 쓰러졌다. - P-1

바닷가 거리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드미뜨리 드미뜨리치 구로프도 알파에서 지낸 지 벌써 2주일째라 이곳에 익숙해져서, 새로운 얼굴들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카페 베르나에 앉아있다가 그는 창밖으로, 바닷가 거리를 지나가는 젊은 부인을 보았다. 키가 그리 크지 않은 금발의 여자로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뒤에는 하얀 스피츠가 따라가고있었다.
이후로 그는 그 여자를 도시의 공원에서, 네거리 광장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났다. 그 여자는 혼자, 늘 같은 베레모를 쓰고 하얀 스피츠를 데리고 산책했다. 아무도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으며, 그래서 그 여자를 단순히이렇게 불렀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저 여자가 남편이나 친구와 함께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사귀어 보는 것도 괜찮을 텐데>하고 구로프는 생각했다. - P-1

한 달쯤 지나면 안나 세르게예브나도 기억에서 희미해져 아주 가끔, 다른 사람들처럼 측은한 미소를 띠고 꿈속에나 나타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 달도 더지났고 겨울도 깊었건만, 기억 속에서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마치 어제 헤어진 것처럼 또렷이 떠올랐다. 기억은 더생생해져 갔다. 그의 서재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저녁의정적을 가르고 들릴 때면, 레스토랑에서 노래나 오르간 연주를 들을 때면, 벽난로에서 눈보라 치는 소리가 윙윙거릴때면, 기억 속에서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방파제에 갔던일과 새벽 안개 속의 산과 페오도시야에서 온 기선과 입맞춤이. 그는 한참이나 방안을 서성거리며 그때를 떠올리고미소 짓곤 했는데, 그러다 회상은 공상으로 바뀌어, 과거의 일이 상상 속에서 미래의 일로 혼동되곤 하였다. 안나세르게예브나가 꿈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림자처럼 어디든 그를 따라다녔고 사로잡았다. 눈을 감으면 그녀가 생생하게 보였다. 이전보다 더 아름다웠고 젊었으며 사랑스러웠다. - P-1

그자신도 얄따에 머물 때보다 멋진 듯했다. 그녀는 밤마다 책장에서 벽난로에서 방안 한구석에서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그녀의 숨소리와 부드러운 옷자락 소리를들었다. 그는 거리에서 여자들을 쳐다보며 그녀를 닮은 여지가 없나 찾곤하였다......
그러다 견딜 수 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추억을 털어놓고 싶어어졌다. 그렇지만 집에서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이웃 주민들에게 이야기할수도없고 그렇다고 은행에 그럴 만한 상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말한단 말인가? 과연 그가그때 사랑을 했던가? 과연 그와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관체에 뭔가 아름다운 것, 시적인 것, 아니면 유익하거나 순수하게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있기나 한가? 그래서 어쩔 수없이 막연하게 사랑과 여자에 관해서 이야기했지만, 누구도 그 속뜻을 알아채지 못했고, 그의 아내만이 짙은 눈썹을 실룩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지미뜨리, 당신에겐 멋쟁이 역할이 어울리지 않아요.> - P-1

그것도 설명해 주었다. 그는 말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없다. 아마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에게는 두 개의 생활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그런 공개된, 상대적 진실과 상대적거짓으로 가득 찬, 주위 사람들의 삶과 아주 닮은 그런 생활이다. 다른 하나는 은밀하게 흘러가는 생활이다. 우연히이상하게 얽힌 어떤 사정에 의해 그에게 소중하고 흥미로우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그 속에서라면 그가 진실하고 또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는, 그의 생활의 핵심을 차지하는 그런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없다.
면에 진실을 숨기기 위해 자신을 감추는 그의 가식, 껍데기인 모든 것, 이를테면 은행에서의 일, 클럽에서의 토론, 그의 <저급한 인종>인 아내와 함께 가는 기념식, 이런모든 것은 공개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경우처럼 남들을 판단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았고, 누구나 밤의 덮개 같은 비밀 아래서 자신만의 가장 흥미로운 진짜 생활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각자 개인의 생활은 비밀 속에서 유지되며,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그런 이유 때문에 교양 있는 사람들이 그토록 예민하게 사생활의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지도 몰랐다. - P-1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위로하고 기분을 바꿔 줄 생각으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머리가 이미 세기 시작했다. 최근 갑자기 더 나이 들어보이고 추해진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손을 얹어놓은 그녀의 따뜻한 어깨가 떨고 있었다. 아직은 무척 따뜻하고 아름답지만, 분명히 곧 자신의 삶처럼 시들고 바래질이 생명에 그는 연민을 느꼈다. 도대체 왜 그녀는 그를그토록 사랑하는가? 그는 언제나 여자들에게 본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여자들은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들이상상으로 만들어 놓은, 평생 간절히 원하던 그린 사람으로그를 사랑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이런 실수를 알아차리고도 그들은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그로 인해 행복하지 않았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는 사귀고 가까워지고 헤어졌지만, 한번도 사랑한 적은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랑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머리가 세기 시작한 지금, 그는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안나 세르게예브나와 그는 아주 가깝고 친밀한 사람처럼, 남편과 아내처럼, 절친한 친구처럼 서로를 사랑했다. 그들은 서로를 운명이 맺어 준 상대로 여겼다. - P-1

마치 두 마리의 암수 철새가 잡혀 각기 다른 새장에서 길러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과거의 부끄러웠던 일들,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서로 용서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자신들을바꿔 놓았음을 느꼈다.
예전에 그는 슬플 때면, 머리에 떠오르는 온갖 논리로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이제는 논리를 따지지 않고 깊이공감한다. 진실하고 솔직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만 울어요, 내 사랑」 그가 말했다. 「그만 됐어요.......이제 얘기 좀 합시다, 뭐든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남의 눈을 피해야하고 속여야 하며 서로 다른도시에서 살며 자주 만날수 없는 이런 처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어떻게 하면 이 견딜 수 없는 굴레에서 벗어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는 머리를 감싸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으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때는 새롭고 멋진 생활이 시작될 거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그 끝이 아직 멀고 멀어, 이제야 겨우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시작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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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1860-1904).

러시아의 따간로그에서태어났다. 
모스끄바대학 의학부를 졸업한후 의사로 일하며작품들을 집필했다.
러시아가 낳은 최고의단편 작가이자 극작가로 꼽힌다.
대표작으로「개를 데리고 다니는부인」, 「6호 병동」, 「벚꽃동산」등이 있다. - P-1

병원의 마당에 그리 크지 않은 별채가 있다. 우엉과 엉겅퀴와 야생 대마의 무성한 수풀이 별채를 둘러싸고 있다. 별채의 지붕은 녹이 슬어 적갈색이고, 굴뚝은 반쯤 주저앉았고, 입구의 계단은 썩어 잡초로 뒤덮여 있으며, 벽에 바른 석회는 흔적뿐이다. 별채의 앞면은 병원과 마주 보고있고, 뒷면은 벌판을 향해 있다. 별채와 벌판 사이에는 못이 박힌, 병원의 회색 울타리가 쳐 있다. 날카로운 끝이 위를 향하고 있는 못들과 울타리, 그리고 별채 자체의 불길하고 음침한 외관은 이 나라의 병원과 감옥의 건물에서만볼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엉겅퀴에 찔리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면, 함께 좁은 오솔길을 걸어 별채로 가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여다보자. 첫 번째 문을 열면 우리는 현관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의 벽과 뻬치까 옆에는 병원의 허섭스레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매트리스, 파란 줄무늬가 그려 - P-1

진 낡고 찢어진 환자복의 윗도리와 바지들, 닳아 헤진 신발들, 이 모든 누더기들이 구겨지고 엉킨 채 산더미 같이 쌓이고 썩어서 질식할듯한 악취를 풍기고 있다.
이 허섭스레기 위에 언제나 문지기 니끼따가 입에 파이프를 물고 누워 있다. 니끼따는 색 바랜 견장을 달고있는 늙은 퇴역 군인이다. 여위고 험상궂은 얼굴, 초원의 양치기 같은 인상을 주는 처진 눈썹, 붉은 코, 그리고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마른 데다가 힘줄이 불거져 있으며, 태도는 매우 위압적이고 주먹은 단단했다. 그는 세상 그 무엇보다 질서를 사랑해서 <그들>은 맞아야만 한다고 확신하는 그런 단순하고 적극적이며 맹종하고 우둔한 부류의 사람에 속한다. 그는 얼굴이건 가슴이건 등이건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면서, 그렇지 않으면 질서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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